75화
드미트리의 상태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금세 지쳐 버렸다.
체이트가 나를 이끌고 신전의 방 한편으로 들어갔다. 그가 너른 자리 위에 천을 여러 겹 깔고 나를 뉘였다.
“괜찮아요?”
“응. 조금만 쉬면 돼.”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질 때면 종종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악몽은 아니었지만, 깨고 나면 심장이 아릿하고 헛헛했다.
그게 싫어서 어떻게든 자지 않고 버티자, 체이트가 눈을 흘겼다.
그가 이만 쉬라는 듯 내 손바닥을 문지르고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으음, 나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코렐리아를 찾아가야…….”
“내일 찾아도 돼요.”
“아니, 안 되는데…….”
내 의지와는 반대로 스르륵 눈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수마에 빨려 들어갔다.
* * *
……카히텐 님은 끝까지 보지 못했다.
나는 오늘, 남부로 떠나야 했다. 아르키드네 여신의 현신을 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
그녀의 그릇이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고, 모두가 나를 부러워했다.
아니, 정말로 부러운가? 그저 부러운 척하고 있는 건 아니야?
어차피 죽는 건 자신들이 아니니까…….
희생을 부럽다는 듯 말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드높이고 과시하려는 거잖아.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들이 해.
나는 죽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그와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고 싶지는 않아.
하나 내 육신은 가진 힘에 비해 비루하여, 구속구를 차고서는 어린애만큼의 힘조차 쉽게 내지를 못했다.
나는 그저 꼬챙이가 꽂힌 날짐승이었다. 도망은 생각조차 못 한 채, 이미 죽어서 타 버릴 일만 남았다.
제물은 곧 그릇이니, 화형처럼 아프지 않을 거라고. 사제들이 위로 아닌 위로를 보냈다.
그래 봐야 내 영혼이 죽는 날이라는 건 변치 않았다.
내 영혼은 이제 소멸할 것이다.
환생을 거듭할 수도 없이 여신이 강탈한 육신 한 귀퉁이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기어코 진짜로 숨 죽어 버릴 것이다.
그릇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영혼의 사멸.
‘혹여 죽거든, 돌고 돌아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이젠 그조차 못하게 되었다.
사제들이 제단에 나를 놓는다. 나는 돼지머리처럼 누워 있다. 언제 몸을 뺏길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로.
심장이 널을 뛴다. 누운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인다. 죽기 직전의 노파처럼 숨을 쉰다. 헐떡거리며 쉰다.
이러다 그릇이고 뭐고 그냥 절명하게 생겼다고 생각할 즈음.
신앙 없는 비명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귓전이 요란했다.
하도 시끄러워 눈이 절로 뜨였다. 죽는 날도 참으로 고상하지 못하다고, 속으로 푸념했다.
하지만.
“…….”
나는 어쩌면 오늘.
“…….”
안 죽을지도 모르겠다.
금발에 귀가 길쭉한 놈이 나를 안아 들었다.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물었다.
“왜, 너무 잘생겨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 * *
“……허억!”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둠이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석벽의 촛대를 찾았다. 초에 불을 붙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게 낯설었다.
내 몸이지만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이질적인 감각은 꿈에서 현실로 정신이 돌아오면서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오늘 꾼 꿈은 여전히 조금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로체가 거기 있었던 거지?”
* * *
다음 날, 나는 체이트가 알려 준 장소로 코렐리아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시일이 너무 많이 지나 버린 걸까.”
“…….”
체이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왜 혼날 때 자주 하는 행동을 지금 하지?
“괜찮아! 한번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조만간 또 소식이 있겠지!”
그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정말 이상하네.
나는 체이트의 기운도 북돋아 줄 겸, 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체이트는 오전부터 밀린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입맛도 별로 없어 보였다.
‘밥 좀 맛있게 먹는 거 보고 싶다.’
자고로 한국인이 밥심을 얼마나 강조하느냐는 그 사람에게 보이는 애정의 지표다.
나는 어미 새의 마음으로 그에게 밥을 먹이기로 결심했다.
수저로 리소토 같은 음식을 잔뜩 떠서 덥석 입에 물려주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맛있지?”
내가 뻔뻔하게 묻자 그가 입을 가리고 잔웃음을 터뜨렸다.
“네, 한 입 더 주세요.”
“이제 네가 먹어.”
“그럼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
나는 마지못해 다시 수저를 떠서 입에 물려 주었다. 체이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옆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플인가 봐.”
“어머, 닭살 돋아.”
얼굴이 살짝 벌게졌다.
“이, 이제 네가 먹어.”
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체이트가 웃으며 내 접시 위의 고기를 조금 더 잘게 썰어 입에 물려 주었다.
“……!”
“어때요?”
“우움, 어떠냐니.”
“남이 먹여 주는 게 더 맛있죠?”
……잘 모르겠는데.
내 입엔 둘 다 맛있었다.
* * *
체이트는 공사가 다망하여 자리를 떴다. 내게 함께 돌아가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다들 일하는데 내가 게서 혼자 뭐 하겠는가.
“난 로체 만나고 올게.”
그렇게 말하자 체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늙은이는 알아서 잘살고 있을 거예요. 나이가 몇 갠데.”
“걱정돼서 보려는 것도 있는데, 사실 물어볼 게 있어.”
어제의 꿈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물론 꿈일 뿐이지만…… 이렇게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꿈은 그저 개꿈으로 치부하긴 힘들다.
그리고 그 꿈에 내가 아는 사람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면, 이는 더더욱 웃어넘길 수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체이트가 내 귀를 매만졌다.
“뭐 한 거야?”
“신성 걸어 놨습니다.”
“신성?”
“예. 위급 시 제게 연락이 가도록요.”
“와, 그거 좋다. 진작에 하지!”
체이트의 표정이 다시 미묘해졌다.
음,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 * *
그와 헤어진 후, 나는 로체를 찾아갔다.
“이쯤이라고 했는데.”
나는 모래사장 한가운데 있었다. 걸음마다 파도가 철썩철썩 들이쳤다.
“바다 뷰라니, 집 되게 싸게 잘 구했네.”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이 공존하는 풍경이라니. 로체가 조금 부러워졌다.
근데 집이…… 어디 있지?
아무리 찾아봐도 집이 없었다.
“로체?”
급기야 나는 두 손을 입가에 대고 로체를 불러 헤맸다.
“로체? ……로체!”
얘가 대체 어디를 간 거야?
집은 또 어디 있는 거고?
백사장 한복판에서 집을 못 찾았을 리는 없고. 내가 아예 길을 잘못 든 건가?
고심하던 그때.
“……아 양.”
누군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기시감이 들었다.
“너…….”
고개를 내리자 보인 것은 물미역.
“레아 양…….”
물미역 같은 머리를 늘어뜨린 로체였다.
“너, 꼴이 왜 이래?”
“그게…… 집을 빌렸는데 말이에요…….”
로체가 혼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분명 전망 좋은 해변 근처라고 했는데.”
“응.”
“해변 근처가…… 땅이 아니라 바다 쪽일 줄은 몰랐죠.”
“……어?”
로체가 손가락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하루의 절반만 뭍으로 나옵니다. 12시간은 있을 수 있어요.”
“…….”
갯벌에 있는 집을 빌렸다는 건가.
아니, 어떤 미친 작자가 갯벌에 집을 지어. 그건 사기꾼도 수지 안 맞아서 못 할 짓이다. 광기 그 자체가 아닌가.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들고 낼 때마다 빼꼼 나오는 집의 형태가 어딘지 익숙했다.
“저거 혹시 체이트가 만든 거니……?”
“어, 어떻게?”
“어떻게고 자시고, 똑같이 생겼잖아!”
저 통나무집에 신성으로 결계를 걸어 벽면을 코팅하고 바닥을 고정한 건가. 정성이다, 진짜.
“수중 뷰도 볼 수 있겠구나.”
……의외로 쩔겠는데?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로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결계도 12시간만 작동합니다.”
“…….”
사탄인가.
“다른 집에 묵으면 되잖아.”
“그게…….”
로체가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이미 다 써 버려서…….”
“아.”
나는 체이트의 고생스러운 행동을 바로 이해했다.
“그냥 계속 저러고 살아라.”
정신 차릴 때까지.
로체가 울상을 지었다.
이러고 모래사장에서 찌그러져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그를 끌고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레아 양?”
“그건 그거고. 나 물어볼 거 있어.”
나는 어제의 꿈 얘기를 그에게 풀어주었다.
“……그래서 이상한 꿈이 계속 반복되다가 어제는 네가 나왔거든. 이거 무슨 꿈인 것 같아?”
로체는 말이 없었다.
또 대답 한번 하는데 100리스씩 달라고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내 시답잖은 생각이 무색하게도, 그는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평소의 가벼움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사방에 어둠이 내렸다.
손을 뻗자 새카만 벽이 만져졌다. 마력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너, 이런 걸 잘도 만들어 내면서 왜 지금까진…….”
“레아 양, 드디어 각성의 조건을 해방한 겁니까?”
로체가 성급하게 물었다.
“각성의 조건이라니?”
내 물음에 로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꿈은 이전 생들에서 물려받은 능력을 실현할 조건입니다. 신이 선택하여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고, 조건이 충족될 경우 전생의 능력을 발현시키죠.”
로체가 뭐라고 이런 걸 다 알지?
난 의아해졌다.
“내 전생의 능력이 뭐길래?”
로체가 답했다.
“신의 가호를 받은 강한 성력입니다.”
“성력……? 내가?”
“네.”
“하하, 내가? 내가 뭐라고?”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주연 캐릭터도 아니고 성력은 무슨 성력.
난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로체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요.”
로체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백 년 전, 저는 제물이 될 뻔한 한 소녀를 구했습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