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 소녀가 설마 나야?”
“레아 양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로체가 말했다.
“아마 ‘그 여자’의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당신의 전생일 테니까.”
전생이라니. 지금 계속 장난을 치는 건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난 이렇게 진지한 로체는 농담으로라도 본 적이 없었다.
“내 전생이라는 여자가 대체 누군데?”
“카히텐의 성녀였죠. 아르키드네 여신의 현신을 위한 제물로 팔려 온 여자기도 했고.”
“팔려 왔다고?”
“카히텐의 신자들이 그녀를 배신했거든요.”
로체의 눈이 옛날 생각을 하듯이 아득해졌다.
“그때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어요. 야만적인 시대였죠.”
“……그래서 나는 카히텐의 성녀였고, 아르키드네 신전에서 제물로 희생되기 직전에 네가 나를 구출했다는 거야?”
“예.”
“너랑 내가 전생에 무슨 사이였길래?”
“아무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속눈썹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목소리가 어쩐지 섧게 느껴졌다.
“정말이야?”
“예. 우리는 그랬죠.”
“……?”
“제가 전에 얘기 안 했었나요? 인간 여성분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그때였지? 내가 사교계 예절 때문에 끙끙거릴 때.
맨 도움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길래 그냥 몰라서 대충 얼버무리려는 건가 생각했는데, 그 나름의 찐사랑이었다는 건가.
“그 여자가 설마…… 전생의 나야?”
“어우.”
“……그렇게까지 질색할 건 없잖아.”
로체가 고개를 빠르게 휘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훨씬 고귀하고 기품 있고 아름다우십니다.”
“……전생까지 싸잡아 욕먹은 기분이 드는데.”
로체가 입매를 둥글게 말았다.
“욕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전생의 조모님 되시는 분이니까.”
“……!”
이럴 수가!
나는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 로체 너 혹시…… 내 전생의 할아버지……?”
“?”
로체가 입을 벌렸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립니까. 당신은 저랑 아무 사이 아니었다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엄연한 순혈 인간이었습니다.”
“그, 그럼?”
“짝사랑이었죠. ……한 50년 정도?”
“너…… 의외로 순정파구나.”
로체가 쓰게 웃었다.
“지금도 종족 간 혼혈은 흔치 않지만,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럼 네가 전생의 나를 구한 이유는……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사랑하던 여자의 손녀’라서 그랬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로체가 산뜻하게 인정했다.
“와, 충격이다.”
단역인 줄로만 알았던 레티시아에게 이런 세계관 설정집 후면에나 등장할 법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을 줄이야.
그럼 내가 꿈을 자꾸 꾸게 되는 이유도 이 몸이 레티시아의 몸이기 때문인 건가?
‘근데 몸과 영혼은 이 세계에서 분리되어 취급되지 않아?’
아직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몇 있었으나, 내 가장 큰 궁금증은 해소된 듯했다. 더불어 로체가 왜 갑자기 내 카페를 찾아왔는지까지.
“그러니까 너는 내 전생을 미리 알고 나를 찾아서 델린 영지까지 온 거네.”
“알았다기보다는, 알게 된 거죠.”
“알게 됐다고?”
“네. 말씀드렸다시피 제게 당신은 타인입니다. 특히 환생한 당신과는 옷깃조차 스칠 일 없는 관계죠. 그런데…… 10년 전 북부에 있을 때,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자?”
로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요.”
“……설마.”
“맞습니다.”
로체가 내 의심에 확신을 더하듯 말했다.
“코렐리아, 당신이 찾던 그 여자였어요.”
* * *
드미트리는 신전 지하의 깊숙한 곳에 갇혀 있었다. 육신은 이미 너덜너덜했고 정신 또한 온전치 못했다.
그나마 신성의 기운이 모두 빠진 후에는 기진한 상태에서나마 남들처럼 사고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평소 머릿속에 담고 다니는 사상들은 남들과 달랐지만.
“크흐…… 헬리아스 님.”
그는 정신만 들면 신을 불렀다.
“제 하찮은 몸뚱이가 더는 필요치 않으십니까? 훨씬 훌륭한 그릇을 찾아서 저는 이제 심심풀이 장난감으로도 무가치하신 겁니까?”
그는 자신이 머잖아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헬리아스 황족처럼 성력을 타고난 몸도 아니다.
자연치유도 불가능한 몸으로 이 정도 치명상을 이겨낼 도리는 없었다. 제 몸에 신이 깃들어 주지 않는 이상.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대로 버려져도 감히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헬리아스 님, 단 한 번이라도…… 존안만 뵙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그릇에 임하시고부터 단 한 번도 진정한 당신을 뵙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헬리아스 님. ……보고 싶습니다.”
이내 그의 고개가 푹 꺾였다.
간당간당하던 호흡도 조금씩 느려졌다.
죽음이 임박한 그때.
“……흐으.”
그의 터진 입술이 힘겹게 올라갔다.
“흐으…… 흐, 흐흐…….”
조잡한 웃음소리 뒤로 그가 누군가에게 속살거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헬리아스 님…….”
감격에 겨운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의 몸이 요동을 쳤다. 위아래로 사지가 흔들릴 때마다 의자가 쾅쾅거리며 요란한 소음을 자아냈다.
달그락달그락-!
덜컹덜컹-!
그 소리에 외부에서 드미트리를 감시하던 사제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사지를 경련하는 드미트리에게 다가갔다. 요동치는 몸과 의자를 바닥에 고정하기 위해 그의 어깨를 내리누른 순간.
쿵…….
삽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뭐, 뭡니까?”
사제는 불길한 느낌에 드미트리의 어깨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손바닥이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이거 왜 이래! 도와줘!”
그가 어쩔 줄 모르고 비명을 질렀다.
“크흐…….”
섬찟한 웃음소리가 어깻죽지에 놓인 손등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사제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도, 도와……주…….”
드미트리가 웃을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흘렀다. 처음엔 한기라고 생각했지만, 손등에 연기가 닿는 순간 사제의 편견은 산산조각이 났다.
“크아악! 뜨거워!”
그건 열기였다. 손에 닿자마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김이 드미트리의 입가로 흘러나왔다.
사제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로 넘어갔다. 드디어 어깨 위의 손이 떨어졌다.
드미트리는 허전해진 어깨를 양쪽으로 으쓱거리며 뚜둑, 하고 빠진 부분을 맞춰 나갔다.
부러진 부분은 빤히 바라보았다.
눈부신 황금빛이 그의 전신에서 퍼져 나왔고, 부러지고 깨지고 찢긴 부분들이 점차 아물어갔다.
사제가 뒷걸음질 쳤다.
“괴, 괴물……!”
“인간 주제에 내게 괴물이라니.”
그가 손을 뻗자, 성력이 사제의 안면을 덮쳤다. 드미트리의 거죽을 덮어쓴 무언가가 서슬 퍼런 눈으로 절명한 사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이 심하잖니.”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시는 의무적인 조치였을 뿐인지, 사제는 그 한 명이었다.
“아르키드네의 개가 이런 식으로 드미트리를 방치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구나. 아직 신임받지 못하고 있구나.”
마지막으로 잘 붙지 않던 엉덩뼈를 치유한 그가 허리를 뒤틀며 조잘거렸다.
“그럼 이쪽은 다가가기 편하겠어.”
레티시아 브링스턴에게.
* * *
나는 로체가 방금 한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코렐리아, 당신이 찾던 그 여자였어요.’
그 말은 곧, 로체는 코렐리아를 앞서 만났다는 뜻인가.
그리고 내가 그녀를 백방으로 찾아 헤매는 걸 알고도 여태껏 침묵한 거고?
배신감에 입술이 떨려왔다.
“너…… 다 알았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모른 척 입 꾹 닫고 내 옆에 있을 수가 있어? 천연덕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어쩔 수 없었어요.”
로체가 손을 내저었다.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날이 오기까지 함구하라고 했으니까.”
“이날?”
“레아 양의 각성이 가까워진 순간이요.”
“…….”
“그 전에 말하면 준비해 온 많은 것들이 어그러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준비해 온 게 대체 뭔데? 너는 거기에 대체 왜 협조한 거고.”
내 목소리가 직전보다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의 각성을 위한 발판이 먼저 마련돼야 하고, 그 발판을 당신이 모두 밟고 여기까지 당도해야 무사히 각성할 수 있다고.”
“그게 뭐야. 그냥 알려 주면 안 되는 일이야?”
“음, 저도 이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는 제약이 많아서 인간에게 뭔가를 주려면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더군요.”
로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 과정의 보조자로서 선택된 거고요. 원래는 초반만 지켜보다 마는 역할이었지만…… 제가 생각보다 레아 양이 마음에 들어서요.”
그가 씩 웃었다. 이제야 조금 내가 아는 로체 같았다.
“그럼 체이트가 내 카페에 오게 된 것도.”
“예, 그 또한 각성의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 코렐리아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무대였다는 뜻인가.
그가 나에게 보여 주는 헌신도?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도?
아냐, 나는 진심이었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레아 양.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세요.”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로체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 코렐리아가 대체 누군데? 누구길래 너는 그녀의 말을 순순히 믿은 거야?”
로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
로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와의 격차가 백 년이 훌쩍 넘는다는 걸 상기했다.
동료라고 생각했지만, 그조차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로체와 만날 수 있었던 건 코렐리아라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너는…… 그 여자의 부탁 때문에 내 곁에 머물기로 결심한 거야?”
로체는 묵묵히 생각하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뇨. 저는 그저 빚을 갚고 있을 뿐입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