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로체와의 대화는 어려웠다. 내 전생이 아니라 내 몸 주인의 전생이기 때문일까?
와닿지 않는 이야기들에 정신이 온통 혼미해졌다.
‘아, 이야기.’
문득, 잇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게 한 편의 이야기나 다름이 없어.’
내가 원작을 참고했듯이, 누군가가 나의 삶을 표적으로 삼아 정해진 루트대로 소설을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민간인 사찰당하는 기분이랄까? 그다지 유쾌하진 않다.
‘코렐리아, 그렇게 안 봤는데 악취미가 있네.’
내가 아는 코렐리아는 그런 나쁜 취향의 여자가 아니었는데…….
나는 오래전에 소설에서 봤던 ‘흑막을 찢는 성녀 코렐리아’를 회상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로체와의 대화에서 비로소 확신하게 된 사실이 두 개 있었다.
첫째, 이 세계는 원작과 무관하다.
이 세계가 원작의 과거라면 나 하나의 개입으로 이렇게까지 사태가 급변할 수는 없었다. 원작은 그야말로 ‘소설 쓰고 앉아 있네’의 소설일 뿐이고, 나는 그와 비슷한 다른 차원의 세상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체이트 폴린은 거짓말을 했다.
코렐리아가 자신의 각성을 위해 목적하는 바가 있다면 한가로이 남부 대신전을 어슬렁거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뭐 하나라도 더 판을 깔려고 안달을 냈겠지.
그걸 지금 하지 못하고 소식이 싹 끊겼다는 건 로체와 이안이 코렐리아를 만난 후, 그녀에게 나름의 사정이 생겼다는 뜻일 테고.
……그래. 사정이 생긴 코렐리아가 대신전 근처까지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다면 진작 행적이 잡혔겠지.
‘그럼 나 이번에도 또…….’
나는 이를 갈며 씩씩거렸다.
“또 속았어!”
나쁜 놈! 허구한 날 속아 주니까 끝도 없지, 정말!
나는 바닥을 팍팍 밟으며 짜증을 토했다. 하지만 체력이 금세 고갈 난 탓에 발길질은 금세 멎어 들었다.
“헉, 헉…….”
숨이 찼다.
요즘 들어 유독 숨이 쉽게 차올랐다. 아니,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꿈을 꾸고부터는 종종 이랬다. 몸 상태가 좋은 날보다 좋지 않은 날이 더 많아졌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라고, 누구 말마따나 머리에 꽃밭 열 평 기우는 것처럼 흥에 겨웠던 내 정신도 자주 지쳤다.
혹시 이것도 각성의 전조 증상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가 전생의 성녀고, 그 힘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로체의 말이 머릿속에서 달콤하게 맴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실만은 싫지 않았다. 화가 나는 한편, 설레기도 했다.
“내게도 힘이 생긴다고…….”
지난 세월, 나는 너무 무력했다.
이슬로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애벌레처럼 연약한 몸에 빙의해서 나비 날개 찢기듯 운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이 삶은 시작부터 현실을 거슬러 온 삶이었다.
그 후에도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 왔다. 회사에서도 무능한 사원이 되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나는 항상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평범한 이전의 삶에서는 대체로 그에 걸맞은 대가가 찾아왔다.
하나, 이 세계에서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능력은커녕 나 자신을 자구할 힘조차 없었다.
스스로를 건사하는 것만으로 벅찬 주제에 원래 성격대로 살기 위해 온갖 바보짓을 저질러 왔다.
그렇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룬 건 거의 없었지만.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리 다짐했으니까.
레티시아 브링스턴이라는 열일곱 소녀의 몸에 처음 빙의해서 그녀의 기억을 들춰본 순간부터 생각했다.
‘이 기억에 매몰되어선 안 돼.’
나는 이를 악물고서라도 나 자신의 자아를 유지해야 했다. 레티시아의 자아가 나를 자신이 있는 어둡고 습한 방향으로 끌어당겨도 버텨냈다.
내가 그쪽으로 끌려가는 순간, 우리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런데도 허약한 신체만큼은, 무능력한 재능만큼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했어.’
모두에게, 너무 미안했어.
나도 돕고 싶었는데.
강해질 수 있다면 강해지고 싶었고.
혼자 해낼 수 있다면 해내고 싶었어.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 손에 쥔 것은 사람뿐이었고, 하여 나는 그들 모두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현재, 로체가 내게 희망을 주었다.
‘성녀의 각성이라고.’
성력을 얻을 수 있다.
그것도, 체이트와 맞먹는 방대한 성력을.
‘나도 이제 그를 지킬 수 있어.’
“……아.”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그만 주저앉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무릎에는 고개를 묻었다.
어쩐지 오늘은 눈물이 났다.
나답지 않게도.
* * *
“체이…… 아니, 대주교님 어디 있어요?”
나는 어서 체이트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왜냐?
걔가…… 나한테 개뻥을 쳤으니까?
한바탕 울고 나니 정신이 번쩍 뜨였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구라는 구라였다.
구라는 이따금 맞는 말이 된다. 처맞는 말.
“그믄드지 은케따…….”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찾아다녔다.
그때, 내 눈앞으로 흑발의 단정한 뒤통수가 쓱 사라졌다.
“어? 야! 거기 서!”
나는 곧장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아씨, 그거 좀 뛰었다고 또 숨 차.
애써 달려 나가면 체이트는 나를 약 올리듯 사라졌다.
“체이트!”
나는 그를 몇 번 부르다가, 도중에 멈춰 섰다.
“…….”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자, 체이트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천천히 복도 모퉁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왜 안 따라왔니?”
남자, 드미트리가 물었다.
“환각이라서 비슷하고 말고를 떠나 그냥 똑같았을 텐데.”
“똑같다고?”
난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 체이트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씹은 적이 없었어.”
발의 중심축을 뒤쪽으로 돌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숨차게 쫓아가게 할 정도면, 그건 체이트가 아니지.”
“이야, 그게 그…… 말로만 듣던 그거인가?”
드미트리가 턱을 갉작이던 검지를 위로 들어 올렸다.
“스토커?”
사랑, 새끼야! 사랑!
마음 같아서는 복식호흡을 하며 외쳐 주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바깥을 향해 내달렸다. 동시에 ‘살려주세요!’ 하고 소리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낮이었고 조금만 나가면 건물 밖이었다.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내 목소릴 들어 주겠지.
“살려 주세요!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미친놈이 탈옥했어요!!”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주위가 조용했다. 그냥 반응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소용없을 거야.”
그런 내 의문에 대답해 주듯, 드미트리가 뒤에서 한 걸음씩 걸어왔다.
분명 한 걸음인데,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나와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여○괴담에 나오는 순간이동 하는 귀신 같았다.
“흐억!”
단숨에 내 뒤에선 그가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어, 어떻게…….”
“네가 내 환각을 본 순간부터 사술에 걸린 거야. 그때 한 발자국이라도 나를 따라오면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돼 있거든.”
“……?”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나도 모르는 새에 진실의 방에 소환된 것인가.
……시간 제한 있나? 존버 가능합니까?
“각오는 돼 있지?”
……안 될 듯.
“다, 당신 이런 걸 어떻게 쓰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당연히 시간벌기용이었다.
“어떻게?”
그가 고개를 까닥이며 동시에 나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 쓰냐고 물어도.”
그가 나를 뒤로 잡아당겼다가.
“그냥, 타고났지.”
휘익-!
손을 놓았다.
정신 차렸을 때 나는 허공에 있었다.
쿵……!
“커헉!”
입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저런. 아파?”
“미친놈……아냐…….”
어금니 하나가 달랑거리는 것 같다. 아니, 어떻게 영구치를 건드리지?
“괜찮아?”
“금이빨 박아 줄 거 아니면 닥치세요.”
나는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그렇게 대화하는 척하며 주변을 스캔했다.
주변은 똑같지만, 여기가 진실의 방이라면 방의 끝이 있을 것이다. 로체가 투명화를 했을 때 그 후면이 울렁거리게 보였듯이,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그러짐이 보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경계선을 찾아 헤맸다.
그가 내게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떨려오는 숨을 삼키며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외면해선 안 된다. 외면하면 끝장이다.
어디지? 빈틈이…….
“……!”
찾았다.
그가 걸어오고 있는 두 다리 사이에서 작은 균열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기가 출구다.’
하지만 목적지는 상대의 등 뒤에 있었다. 어떻게 저기까지 돌파하지?
‘……직접 돌파는 불가능해.’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가 점점 다가왔다.
“내가 오늘 너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가야 해서, 아마 조금 아플지도 몰라.”
그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예고하는 사이.
“으갸가가갑!”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목이 잡혔다. 예상한 일이었다.
난 다리를 굴려 그와 포지션을 바꾸고, 불나방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
그가 조소와 함께 나를 들어서 아까 전처럼 집어던졌다.
쿵!
벽이 아닌 곳에 몸이 맞았다.
‘……여기다.’
정신이 아찔하고 시야가 겹쳐 보이며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고 이마에서 흐른 피가 속눈썹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 상태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팔꿈치로 뒤편을 찍어 내렸다.
텅 빈 곳에서 텅! 텅! 소리가 났다. 팔꿈치가 까지고 피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파편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됐……!”
머리채가 잡혔다.
직전까지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그는 이번엔 한 걸음 만에 내 앞에 당도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걸로는 빠져나갈 수 없어.”
그가 절망적인 소리를 하며, 내 머리를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끝났다…….’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고통을 감수하려던 순간.
턱.
장인의 도자기처럼 대차게 깨질 줄 알았던 머리통이 단단한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어어…….”
눈물이 핑 돌았다.
위에서 다시는 못 들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늦었습니다.”
헐떡거리는 숨 사이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