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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78화 (78/140)

78화

-불과 몇 분 전.

드미트리 디아벤이 사라졌다.

그의 실종 보고를 받자마자 체이트가 미간을 짚었다.

“누가 사라져?”

“그, 그게…… 드미트리 디아벤이…….”

쾅!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거셌다. 안타카스 주교가 붉게 달아오른 주먹을 거두며 사제에게 물었다.

“감시하던 이들은? 모두 뭘 했기에 고작 귀족 자제 하나를 관리하지 못하지?”

“그게…… 한 명은 드미트리 디아벤을 상대하다 소천했고, 다른 이들은 모두 바깥에 있어서 대응이 늦었던 것 같습니다. 소란을 듣고 지하로 갔을 땐 이미 죄수가 사라진 후였다고…….”

“한 명?! 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게야!”

안타카스 주교의 불룩 솟은 아마에 실핏줄이 돋았다.

체이트는 그보다는 조금 차분한 상태였다.

“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드미트리의 행방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이봐.”

그의 시선이 사제에게 닿자, 사제가 겁을 집어먹고 대답했다.

“예, 대주교님.”

“한 명이라도 성력이 있는 사제인데 어떻게 귀족가 영식일 뿐인 드미트리가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지?”

사제가 낯을 굳혔다.

“죽은 사제의 사체에서 성력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성력?”

“예, 그리고 이건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가 입이 마르는지 침을 한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사체의 손등에 화상 자국이 있었습니다.”

“……고온을 흘리는 성력이라면.”

체이트가 벌떡 일어섰다.

“레티시아.”

“예?”

“레티시아는 어디 있지?”

“그분께서는 외출하신 후로는 잘 모르겠…….”

그때였다. 체이트가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렸다.

“대주교님!”

“괜찮으십니까, 대주교님!”

“……조용히 좀.”

신성이 저마다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순한 위험 신호라기보다는 공포에 질린 단말마에 가까웠다.

“……레티시아!”

그는 곧장 신성이 일러준 건물 복도로 뛰어갔다.

“……!”

레티시아는 없었다. 복도는 휑했고 소름 끼치게 조용했다.

“설마.”

체이트가 손안에서 성력을 응축하여 복도 쪽으로 내던졌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끔찍한 굉음과 함께, 성력이 응집된 덩어리가 공중에서 폭파했다.

“……결계.”

이렇게 촘촘하고 빠듯한 결계를 쓰는 남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헬리아스 황제, 하르온.

그가 이곳에 있다고?

……아니, 말이 안 돼.

수도에서 남부까지는 시일이 제법 걸린다. 워프를 쓴다면 단숨에 올 수는 있겠지만 그 후 성력이 바닥나서 공격력이 급격히 떨어지지.

황제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고. 마차와 같은 탈것으로 이동했다면 지금까지 그의 외유가 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체이트는 실눈을 뜨고 텅 빈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드미트리가 황제에 버금가는 수준의 성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방대한 성력으로 지금 레티시아를 위협하고 있고.

“……제길!”

결계를 푸는 건 가능하다.

시간이 문제일 뿐.

레티시아는 지금 공격당하고 있는 상태. 이렇게 견고한 결계를 만들 수 있는 상대라면 레티시아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낼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안타카스 주교의 성력을 조금 더 받으면 모를 일이지만, 솔직히 제 성력에 비하면 그 수준은 미미했다. 그를 부를 시간에 레티시아가 변을 당할지 모른다.

당장에 승부를 보아야 했다.

‘풀어낼 게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쳐서 박살을 내야 해.’

이렇게 되면 결계가 파괴되면서 체이트 본인도 자연치유가 불가능한 수준의 중상을 입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가?

제 목숨과 레티시아의 목숨.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체이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성력을 쏟아부었다.

싸아아-

아르키드네의 힘이 그의 손바닥에서 복도의 바닥으로 점점이 퍼져나갔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가 흐를 새도 없이 떨어졌다.

붉은 눈이 매처럼 앞을 노려보았다.

결계는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 깨지지 않았다.

웅웅…….

그는 제 생명력까지 일부 갈아 넣고 있었다.

결계에 금이라도 하나 간다면 이후는 금방일 텐데.

……라고 생각하던 차.

실제로 결계에 쿵쿵거리는 충격이 닿더니, 복도 쪽 바닥의 한 귀퉁이가 부서졌다.

‘여기다.’

체이트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남은 성력을 모조리 흘려보냈다.

동시에, 퍼엉! 고막을 파괴할 것 같은 파열음과 함께 성력의 파편들이 체이트를 덮쳤다.

“쿨럭……!”

그가 피를 토했다. 방금 여파로 장기가 손상된 듯했다.

보통 때라면 자연 치유되겠지만…… 지금 그가 가진 성력은 마이너스다. 생명력까지 갈아 넣은 상태. 회복하려면 신관이나 의사의 치료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체이트에게 망가진 제 몸을 돌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레티시아가 농락당하고 있었다. 머리가 피범벅이 되어서는,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아…….”

안 돼.

상체부터 앞으로 기울었다. 그가 성치 않은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 두 다리를 채며 달려 나갔다.

……턱!

그는 성력 한 톨 없이, 오로지 사내의 근력만으로 레티시아를 받아냈다.

제 손바닥에 닿은 눈두덩이가 금세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체이트가 반대 손으로 피 묻은 입가를 훔치며 엉망진창인 분홍 머리칼 위에서 말했다.

“……늦었습니다.”

* * *

“인간은 참 어리석은 것 같아.”

드미트리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냥 너희 둘이 유독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여전히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상태였고, 체이트에게 얼굴을 기댄 채였다. 도로 일어날 힘도 없었거니와 그럴 용기도 없었다.

시야가 닫히자 청각이 기민해졌다. 아, 고막은 아직 멀쩡한가.

체이트의 거친 숨소리까지 귀에 선하다. 불규칙하고 고르지 못한 숨소리. 어딘지 억눌린 듯한 호흡.

“……체이트?”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체이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레티시아.”

그가 겨우 운을 뗐다.

“고개…….”

도중에 말이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들지 마십시오.”

“……?”

긴박한 상황이었다.

드미트리가 언제 재공격을 퍼부을지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런 대치는, 어딘지 이상했다.

“…….”

체이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적막 속에서 드미트리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생글거리는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그의 음충맞은 눈매를 보자 왜인지 헬리아스 황제가 떠올랐다.

‘왜 저렇게 여유롭지?’

나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체이트를 올려다보았다.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한들 체이트보다 강하지는 않을…….

“아…….”

체이트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안구의 흰자위는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턱이 굳은 듯 떨려왔다.

그가 시선을 내려 나를 보았다.

“들지…… 말라니까…….”

애써 웃는 그는 내가 아는 능글맞은 체이트가 아니었다. 그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변해갔다. 누가 그의 몸에서 피를 뽑아가기라도 하는 듯이.

“아, 정말.”

드미트리가 투덜거리며 내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윽.”

“정말, 한참 기다렸잖니.”

“……!”

왜 시간이 정지된 듯 우리가 멈추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드미트리는 내게 이 광경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던 거다.

“어떠니? 구세주인 줄 알았던 사람이 만신창이로 들어온 걸 본 소감이?”

“……네 짓이야?”

“뭐, 엄밀히 말하자면.”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때, 체이트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 머리칼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그 손…… 놔.”

“하하, 그 몸을 하고, 진짜 웃기네.”

“……놔.”

드미트리가 싱긋 웃었다.

“마침 잘됐다. 너도 처리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머리를 틀어쥐던 손이 풀렸다.

내가 풀썩 바닥으로 가라앉자마자 드미트리가 체이트의 목을 틀어쥐고 반대편 벽에 부딪쳤다.

“안 돼!”

체이트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드미트리가 광기 어린 눈을 하고 만신창이의 체이트에게 조잘거렸다.

“너, 지금 성력이 요만큼도 없구나? 다른 사제들을 믿었나 봐. 그런데 어쩌니? 결계는 네가 들어오자마자 막아 버렸어. 물론 다른 사제들이 들어와도 사상자만 늘었겠지만.”

헛소리를 지껄이는 저 입을 틀어막고 싶다.

“그렇게 이 여자를 구하고 싶었어? 쓸모도 없고 방해만 되잖아. 대체 뭐가 그리 좋아서 옆에 끼고 다니는 거야? 내가 좀 알아도 되나?”

체이트를 함부로 노려보는 저 눈도 뽑아 버리고 싶다.

“똑똑히 봐, 레티시아. 네가 죽이는 거야.”

나를 돌아보며 도발하는 저 얼굴 전부를, 짓이겨 버리고 싶다.

“……대지 마.”

“응?”

“손…….”

나는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내 몸 안에서 분노가 불꽃처럼 들끓었다. 그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나의 내면이었다.

“손, 대지 마.”

손끝에 화한 느낌이 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환해지고 흔들거리던 치아가 제자리를 찾아가며, 부러지고 찢긴 상처들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내 안에서 화마처럼 이글거리는 이건…… 단순한 감정의 잔재가 아니었다.

가시적으로 환한 빛무리들이 전신을 감쌌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 빛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성력의 첫 발현이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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