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오오오오오!”
드미트리가 입이 찢어지라 웃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체이트의 목을 스륵, 내려놓았다. 시선은 내게 꽂혀 있었다.
“각성한 거지? 응?”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역겨웠다. 순수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환한 함박웃음이었다.
“내가 각성한 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
오히려 불리한 요소 아닌가.
보통의 사제들이 어느 정도의 성력을 가지고 태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보다는 못할 것 같았다.
성력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혈관 가득히 힘이 차올라서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샘솟았고, 또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무슨 의미냐고?”
드미트리가 깔깔 웃었다.
“내가 너 각성하는 꼴 보자고 이 초라한 몸뚱이까지 끌어다 썼잖니?”
“뭐?”
애당초 내가 각성하는 걸 원했다는 뜻인가?
……어째서?
내 표정에서 날 선 경계심을 읽었는지, 드미트리가 손을 내저었다.
“어휴, 그러지 마. 어차피 이 몸으로는 너 못 이길 거 안단다.”
그러고는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다.
“어때? 각성한 기분? 좀 강해진 것 같니?”
“……일단 당신 얼굴 봐서 기분 더러운 건 알겠는데.”
“아하하!”
그가 면전에 대고 웃었다. 안면부로 그의 침이 닿은 순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인다.’
나는 손에 성력을 가득 담아서 그의 왼쪽 뺨을 강타했다.
퍼어억!
시원스러운 타격음과 함께 드미트리의 몸이 벽면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쩌억, 벽에 금이 갔다.
“미…….”
친.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 너무…….
“대단한데?”
아직 성력이 조절되지 않아서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담아서 주먹을 날렸다. 그랬더니 벽이 부서진다.
차력쇼 나가면 그날 자양강장제는 내가 다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이런 살인적인 펀치를 맞고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드미트리였다.
벽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가 비척비척 일어나서 무릎의 먼지를 털었다.
“어휴, 이제 겨우 각성했는데 대단하구나.”
그가 날 대견하다는 듯이 말하는 게 어이없었다. 저게 지금 맞은 쪽이 할 말인가.
“음, 훌륭해.”
나는 다시 일 발 장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왼쪽 눈에 멍을 단 그가 씩 웃었다.
“역시 이 몸으로는 못 당하겠어.”
바람처럼 돌진해서 그의 코를 찌그러트려 버리기 직전. 드미트리가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 그 힘, 내 덕이라는 거 잊지 말고.”
“뭐라고?”
뜬금없는 행동에 내가 멈칫한 찰나의 순간에 그가 눈을 감았다.
이윽고 드미트리의 몸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야.”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혼이 싹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
나는 그를 한번 일별하고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체이트!”
쓰러진 체이트에게 달려가 그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괘, 괜찮아……?”
그가 가물가물하는 눈을 뜨고 입술을 더듬더듬 떼었다.
“레…… 티시아?”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입술에 채 마르지 못한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머리를 벽에 부딪치면서 후두부에서도 피가 배어 나왔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레티시아.”
“응, 응. 나야.”
난 울면서 그를 살폈다. 성력으로 나아야 할 상처가 전혀 낫지 않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체이트가 결계를 억지로 열면서 성력이 바닥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몸에는 스스로를 치유할 성력조차 남지 않은 걸까.
나 자신이 성력을 가진 몸이 되어 보니 그가 나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성력은 체내의 혈액과 같았다. 혈관을 따라 피처럼 흘러 다니는 것이 몸에서 쑥 빠지는 순간, 미묘한 상실감과 함께 기분이 아주 요상해졌다.
내 일부를 잃는 느낌이었다.
체이트는 날 구하기 위해 일부도 모자라서 전부를 내어준 것이다.
“어쩌려고 그랬어. 그 몸으로…… 대체 어쩌려고…….”
내가 울먹거리자 체이트가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당신이 안에, 있으니까…….”
“…….”
“당연히…… 내가 곁으로 가야…….”
나는 눈꺼풀을 닫았다. 눈물이 그의 손등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항상 네가 날 지켰으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야.”
나는 손끝에 성력을 집중시켰다. 파괴하려는 용도가 아니라 치유하려는 용도였다.
아까처럼 무작정 방출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난 신성 치유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깊숙한 내면의 한 부분이 그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손에 따스한 빛무리를 모아서 체이트의 상처 곳곳에 가져다 대었다.
“……됐어!”
그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갔다.
내가 그를 보며 웃자, 상태가 호전된 체이트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얼마 전에 신탁이 내렸어요.”
그가 서서히 회복되는 제 상처를 보면서 읊조렸다.
“성녀의 각성을 알리는 신탁이…….”
“……!”
신탁의 내용 또한 실제로는 원작과 달랐다는 건가.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그 각성하는 성녀는 아마도…….’
“신탁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어쩌면 그게 당신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이트가 힘없이 웃었다.
“당신과 신전은 연관도 없는데…… 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신탁의 내용을 조작하고 있더군요.”
체이트가 이 사실을 감춘 건 만에 하나 제 예감이 맞을 경우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그를 보며 웃어 주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니, 부정하지 마. 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심각한 부상이 어느 정도 아물었을 때, 난 조심스럽게 그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
“나를 좋아해 줘서.”
“…….”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줘서.”
나는 피로 얼룩진 그의 볼에 입 맞추고 얼굴을 뗐다. 그와 눈을 맞추고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좋아해, 체이트.”
“…….”
그의 눈과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윽고 그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입매를 살짝 끌어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싫어하실 줄 아는데…….”
“응?”
“키스, 해도 됩니까?”
“…….”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가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자잘하게 떨어졌다.
입술이 바로 맞닿을 줄 알았는데, 말캉한 감촉은 이마에서 먼저 느껴졌다.
이윽고 눈두덩이와 콧등을 찍고 내려온 입술이 마주 포개어졌다.
그의 키스는 평소 행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설펐고, 나는 그 사실이 조금 기꺼웠다.
우리의 입맞춤은 풋내나는 어린아이처럼 시작해서 점차 농익어 갔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가볍게 맞닿은 손이 이윽고 서로 엇갈리며 포개어졌고, 틈새로 파고들며 깊이 얽혀갔다.
* * *
드미트리가 막아 놓은 결계는 서서히 걷혔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사제와 안타카스 주교가 피떡이 된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게 폭주했어요.”
나는 기진한 체이트를 대신해 앞으로 나섰다. 안타카스 주교는 구석에 쓰러진 드미트리를 보고 다가갔다.
“조, 조심하세요.”
저게 또 일어나서 패악을 부리면 어쩌지? 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래서 그가 쓰러진 후에는 일부러 근처에 가까이 가 보지도 않았다.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안타카스 주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죽었습니다.”
“……!”
방금 전까지 멀쩡한 얼굴로 대화하던 인간이 죽었다니.
“진짜로 죽은 거 맞아요? 숨 참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확실하게 죽었습니다.”
“…….”
나는 체이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체이트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어쩌면…… 드미트리의 몸에 뭔가 사특한 것이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요.”
“사특한 거? 뭔가 짚이는 거 있어?”
“없진 않지만……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말이 되나 싶기도 하고.”
나는 드미트리가 정신을 잃기 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갑작스럽게 능력치가 확 올라간 것도 그렇고, 작별 인사를 하자마자 혼이 빠진 사람처럼 쓰러지더니 아예 죽어 버린 것도 그렇고.
‘혹시 그도 나처럼 빙의한 건가?’
그렇다면 누가 그의 몸에 들어갔지?
“…….”
불현듯 오늘 드미트리의 말투와 굉장히 흡사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떠오르던 상대였다.
‘헬리아스 황제…….’
하지만 그는 이 세계에 현존하고 있었다.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이 같은 동시대 사람에게 빙의할 수도 있나? 그런 건 마법으로도 신성으로도 가능하다는 얘길 듣지 못했다.
체이트도 그 점이 미심쩍어서 내 앞에서 말을 아끼는 눈치고. 나 또한 섣불리 확신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염두에는 두는 걸로 하자.’
소설 속 단역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남다른 전생이 있고, 인연이 있고, 성력이 있었다.
황제 또한 그만의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더 이상 소설 속이 아니었다. 글에서 서술되는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큰코다칠 것이다.
“그런데…….”
나와 체이트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안타카스 주교였다.
“아, 말씀하세요.”
나는 체이트와 그가 대화하기 편하도록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주교는 도리어 내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그의 두 눈이 고대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할 말…… 있으세요?”
“레티시아 님의 몸에서 강력한 성력이 느껴집니다.”
그가 불쑥 다가와서 내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혹, 레티시아 님. 성력이 있으십니까?”
“…….”
숨길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너무 쉽게 들키니 이건 이거대로 허무하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