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80화 (80/140)

80화

안타카스 주교의 콧김이 황소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체이트가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지만, 그의 전신을 에워싼 신실함에 튕겨 나갔다.

그는 내 손을 기도하듯이 꼭 부여잡은 채 울먹거렸다.

“신탁의 성녀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그저 영광일 따름입니다!”

“신탁의…… 성녀요……?”

“네! 역시 대주교님과 함께 오셨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랑 체이트가 붙어 있을 때마다 가자미눈을 하고 지켜보시던 분이 갑자기 무슨 봉창 두드리는 말씀이신지…….

안타카스 주교님의 태세 전환이야말로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지금 돌이켜 보면 역시 주교님이라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안타카스 주교의 뒤로 체이트와 은근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를 보는 체이트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웃으니 따라 웃음이 났다.

복잡했던 내 마음을 말끔히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는 감출 것도 없고, 참을 것도 없…….

“앞으로 성녀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감추자. 감히 대주교랑 성녀가 연애를 해? 들키면 우리는 그날로 역적 되는 거야.

* * *

아르키드네의 성녀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여신의 신전인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대주교보다 더 종교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대단한 역할을 정말 내가 맡아도 되는 걸까.

나는 기도라고는 수능 전날, 면접 전날, 빙의 다음 날밖에 한 적이 없다. 심지어 평소 무교지만 그 순간만은 다신교가 되는, 공부도 안 했으면서 마지막 양심마저 개털 난 키메라였다.

이런 내가 신을 모시며 숭고한 과업을 짊어지는 성녀가 된다니. 말세다.

나는 프레스코화에서 머리에 반원 달고 인자한 얼굴로 땅을 굽어보는 성인이 될 자신이 쥐뿔도 없는데.

천지창조를 묘사한 세기의 걸작을 보면서도 모 외계인 영화를 먼저 떠올린 몹쓸 인간이 바로 나였다.

내가 성녀가 된다면 그건 참된 종교인에 대한 모독이다.

난 한사코 거절하려고 했다.

“저길 봐! 신탁의 성녀님이야!”

……신전이 내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나마 체이트가 공론화를 막아 주어서 다행이었다.

“최근 황실과의 관계가 농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죠. 이런 시기에 신탁이 공표된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

안타카스 주교는 나를 밀림 속 사자 새끼처럼 들고 방방곡곡 자랑하지 못해서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전 사람들은 다 아는 비공식 성녀가 된 덕에 공식 행사는 없지만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아싸, 책임 없는 쾌락. 너무 좋고?

“……아.”

아냐. 너무 좋은 것까진 아니야.

정말이지, 나는 거절하려고 했다.

로체가 때깔부터 좋아진 나를 보며 부러워서 복통을 앓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째지긴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최근, 나는 졸지에 성녀 취급을 받게 된 일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황제가 이번 거짓 신탁으로 대놓고 신전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의심 많은 이안에게 뒤늦게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그리고…….

“으음…….”

나와 체이트의 사이가 밝혀지지는 않을까.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이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감정에 불이 붙기 전과 후는 차이가 컸다.

전에는 그를 보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품어 주고 싶었다면, 지금은 일전의 미온한 감정과 더불어 보다 뜨거운 욕구가 치솟았다.

첫 키스 이후, 그와 시선만 얽혀도 손끝이 저렸다. 곧장 다가가서 그를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졸지에 견우와 직녀,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난처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대주교와 성녀라니, 양쪽 다 의도한 바가 아니라서 더욱이 아찔해지는 단어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직함대로 살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어?”

“네.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신전을 나와 있었다. 외딴곳을 미리 알아보고 집을 하나 놓아두었다.

매일 신전에서 서로를 볼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 보는 건 느낌이 달랐다. 긴 시간을 애가 닳은 채로 보내다가 비로소 남자와 여자로 재회하는 느낌이었다.

“좋아. 안아 줘.”

체이트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언제나 그렇듯 뜨거웠다. 그 안에 얼굴을 묻으면 노곤해져 잠이 솔솔 왔다.

“하아, 좋다아…….”

내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자 그가 내 머리를 조금 더 깊게 감싸 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내 성에 차지는 않았다.

“꽉 안아 줘.”

“그러고 있어요.”

“……더.”

그는 예전부터 습관처럼 나를 귀중품 다루듯 아껴 만지고는 했다. 그 섬세한 손길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숨이 막히도록 세게 끌어안아 주었으면 했다.

“더 세게.”

그가 내 어리광을 듣고는 되레 손을 풀었다.

“뭐야.”

내가 불만스럽게 턱을 들자,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던 내 입술이 쏙 들어갔다.

그는 숨조차 뜨거웠다. 닿으면 데일 듯하여 이따금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옮겨 받으면 혀끝이 녹아내릴 듯 달콤했다.

“더 할까요?”

체이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계속, 해 질 때까지 안아 줘.”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아, 이거 아무래도 꿈꾸는 중인 것 같은데, 언제 깨지?”

“평생 안 깰걸.”

“그럼 평생 안고 있어야겠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소파 쪽으로 등을 기댔다. 그의 위에 누운 상태로 있으면 쿵쿵하고 심장의 고동이 들렸다.

나는 이 고동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는 걸 좋아했다.

“……체이트.”

“네, 레티시아.”

“나 돌아가기 싫어.”

내 투정에 체이트가 ‘저도요.’ 하고 맞장구쳤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신전 밖에서 밀회를 나눴다. 안에서 하지 않는 건 나의 티끌 같은 도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때가 되면 돌아가야 했다. 어쩌다 성녀가 된 나는 사실상 한량이었지만, 체이트는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체이트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황제를 끌어내릴 때까지만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게 언제일까?”

내가 그의 위에서 고개를 빼꼼 들고 눈을 맞추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만.”

그가 눈썹을 찡그린 채 미소 지었다.

“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니. 그때는 꽤 지난한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

드미트리가 내게 건넨 마지막 인사는 잔상처럼 계속 머리에 남았다.

‘죽을 거였으면서, 마치 돌아올 사람처럼 굴었어.’

죽기 직전 그의 평온했던 태도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언제든 그가 되살아나 나를 노릴 것 같았다.

‘체이트가 대주교직에 남아 있는 것도 결국은 나 때문이지.’

신탁의 성녀는 황실과 신전이 반목할 때마다 표적이 되었다.

황실과 신전이 대놓고 척을 지게 된 이상, 내 안위도 안전하지만은 않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게도 대항할 무기가 생기긴 했지만…….’

드미트리 사건 때 체이트가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실을 돌이켜 보면, 역시 혼자 힘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헬리아스 대 아르키드네.

성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요즘. 각자 힘을 가진 파벌끼리 유대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주교들도 체이트나 내가 신앙심이 대단치 않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한 존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승리할 확률이 올라갔다. 신앙과 무관하게 한 명이라도 십시일반 힘을 모아야만 하는 시기이기에, 우리는 신전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체이트, 만약 드미트리가 살아 돌아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체이트는 못을 박듯 부정했다.

“그럼 황제가 나를 표적으로 노리면……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 게 좋을까? 내가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

내 생각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자, 잠자코 듣던 체이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어떤 방식이든 따르겠지만, 당신을 미끼로 쓴다는 건 도저히 못 들어 주겠네요.”

나를 던져놓고 황제를 꾀어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했을 때였다.

“레티시아, 당신이 다치면 저는 미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미치겠죠. 그가 덧붙였다.

나는 드미트리의 공격을 받을 당시 제 생명력까지 담보로 걸어가며 무작정 결계를 뚫고 들어온 체이트를 회상했다. 눈물이 줄줄 흐를 만큼 감동적이었지만, 결코 일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네가 가끔 나를 버렸으면 좋겠어.”

머리를 쓰다듬던 체이트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는 절대 나를 버리지 않겠지.”

“…….”

“나는 그 사실이 정말 미안하면서도…… 좋아.”

마지막 말에 목소리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멈춰 있던 그의 손이 다시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몇 가닥씩 장난치듯 들었다 놓으며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나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콕 박고 작게 끄덕거렸다.

쪽.

가벼운 입맞춤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틈새로 힐긋 그를 훔쳐보았다.

눈을 감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사내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내 머리카락 한 줌에 그는 경건해졌다. 신앙은 그리 깊지도 않으면서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좋아.”

나는 그의 모순이 좋았다.

때로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때로 못 참겠다는 듯 달려드는 그의 이중성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