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뜨니 나는 체이트의 품 안에 있었다.
언제 닿아도 뜨거운 체온이 오한으로 몸서리치는 피부를 녹인다.
이게 현실이었다.
방금 그건 그저 악몽.
……악몽?
아니, 그저 악몽은 아니다.
그건, 누군가의 삶이었다.
아마도 레티시아의 전생이었을 먼 옛날의 과거.
나는 그 멈춰 버린 시간 속에 갇힌 채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
그래, 죽음.
꿈속에서 나는 죽었다.
……한 남자에 의해서.
어딘지 낯이 익은 남자였다.
내 기억을 가위로 듬성듬성하게 잘라서 조각보처럼 붙여놓은 것 같은 얼굴.
그의 금발은 헬리아스 황제와 레오넬 헬리아스를 떠올리게 했고, 푸른 눈의 채도는 이안 카히텐과 조금 더 흡사했다. 그리고 생김새는 마치…….
“레티시아.”
“……헉!”
체이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의 단단한 몸체는 너무나도 손쉽게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저를 밀어낼 거라 상상도 못 한 눈치였다.
“레티시아?”
그가 당혹스럽게 나를 불렀다.
“으응, 미안.”
나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꽂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멀어지는 온기에 미련과 해방감이 동시에 드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 잠시 가 볼 곳이 생각났어.”
“지금요? 신전에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급한 일이야.”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그의 고개가 창가로 돌아가는 모습이 흐릿하게 잡혔다.
“곧 해가 저물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원한다면 가야죠. 어디로 갈 건가요?”
“로체한테.”
“허.”
허탈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거절하지는 않는다.
“좋습니다. 가요.”
나는 당연하게 맞잡아 오는 그의 손을 슬쩍 빼냈다.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건 안 됩니다.”
“…….”
“갈 거면 같이 가요.”
근래, 체이트는 신전 외부로 이동할 때 항상 나와 함께 다녔다. 드미트리가 일으킨 대사건 이후로 가뜩이나 심각했던 과보호가 맥스를 찍은 듯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를 과보호해 본 우습지도 않은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는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요 며칠 자발적으로 그의 옆을 졸졸 쫓아다녔다. 볼일이 있거나 나가고 싶을 땐 그의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금처럼 함께 이동했다.
그 탓에 각성 후 로체를 만났을 때도 내 옆에는 체이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로체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전생에 카히텐의 성녀였던 내가 아르키드네 신전의 신탁에 걸맞은 성녀가 된 것인지, 내게 깃든 이 힘은 대체 어느 신의 가호인지.
하지만 옆에 체이트가 있으니 물을 틈 따윈 없었다. 또한 당장에 확인해야 할 일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현재의 나에게 체이트보다 중한 건 없었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로체가 내게 졌다는 빚이 내 죽음이란 걸 안 이상, 나는 반드시 그에게 전생의 진실을 캐물어야 했다.
대체 왜 내가 죽어야 했나?
꿈속의 나를 죽인 그 남자는 누구인가?
……어쩌면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사내가 나를 죽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기에 공통의 기억을 가진 로체에게서 내가 느낀 죽음의 공포가 타인의 것임을 확답받고 싶은 것이다.
그건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전생이었을 뿐이고,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삶이라고. 진짜 나 자신과 꿈속의 나를 격리하고 싶었다.
“……미안.”
나는 다시 한번 체이트를 밀어냈다.
“혼자 갈래.”
그는 완강하게 버텼다. 누굴 닮았는지 이런 쪽으로는 고집이 아주 쇠심줄 같다.
결국 전신에서 성력으로 예기를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의 가호인지도 모를 힘을 흘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 내가 아직도 약해 보여?”
그의 눈이 움찔거리고 입매가 굳었다. 당황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당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직전까지만 해도 함께 사랑을 속살거리던 여자가 꿈 한번 잘못 꿨을 뿐인데 새끼 맹수처럼 털을 바짝 세우고 있으니까.
하지만 체이트는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만 유독 약하다는 사실을 아주 이기적으로 써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바늘 백 개를 삼킨 것처럼 위가 시큰거렸다.
“……그래요.”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손을 뻗었다. 귓불에서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이어서 신성이 내게 닿았다.
“이거…… 전과 느낌이 다른데.”
“결계예요. 누구도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결계.”
체이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맞닿은 그의 피부에서 파직, 전기가 올랐다. 그가 재빨리 손을 떼어냈다.
“헬리아스 황제가 레오넬에게 걸었던 것과 같은 거야?”
“그보다 강합니다. 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당신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제가 따로 만든 거니까.”
나는 멋쩍게 귓불을 매만졌다. 체이트가 그토록 바쁘게 지냈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까?
누군가 나를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는 강한 결계를 만들기 위해서.
“…….”
결계가 강하다는 말은 즉, 그가 또 내게 제 성력을 한참 낭비했다는 뜻이었다.
“나 이제 약하지 않대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약하니까.”
그가 설핏 웃었다.
“나 항상 당신한테 지잖아요.”
“…….”
나는 미안하다는 뻔한 사과 대신에 그와 눈을 맞췄다.
한없이 다정스럽기만 한 눈동자.
어떻게 저 얼굴을 꿈속의 그 사내와 혼동할 수 있었을까?
닮았지만 달랐다.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를 깊이 껴안았다. 그리고 작게 사랑을 속삭였다.
끌어안은 몸체가 살짝 떨리더니, 그가 조심스럽게 내 등을 감싸고 고개를 떨궜다.
내 어깨에 파묻힌 낯이 어쩐지 안쓰러워 머리를 한번 더 쓰다듬은 뒤 나는 로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저 직감일 뿐이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에 불안한 전율이 돋았다.
‘장난은 끝났어.’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