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84)화 (84/140)

‘은발이라고…….’

이안 카히텐은 아니겠지. 그는 100년 전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비슷한 외관을 가진 이들 중 달리 그런 일이 가능한 인물은…….

“카히텐 대공가의 사람이라는 거야?”

로체는 침묵했다.

“그자가 날 죽인 이유는?”

“모릅니다.”

“왜 죽였는지 모른다고?”

“예, 저는 보고 들은 것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을 뿐, 신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네가 본 걸 그대로 얘기해 줘.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며 신은 그 무엇도 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체 또한 한참 전의 과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로체는 씁쓰레한 미소를 입에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직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쓰럽게도.

“그때, 저는 당신과 북부로 워프 했어요. 그러니까 전생의 레아 양과…….”

“덧붙일 거 없어. 이해했으니까. 그냥 편히 얘기해.”

“네. 당시엔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어요. 그저 자작나무가 앙상하게 솟아오른 숲속이었고, 호수의 찬 기운에 입김이 나는 걸로 보아 사철이 쌀쌀한 북부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죠.”

로체는 내가 앉은 소파 앞에 의자를 끌고 와 마주 앉았다. 제법 긴 이야기인 듯했다.

“탁 트인 호수보다는 안쪽으로 피신하기를 권했지만, 당신은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분이 우리를 구해 줄 거라고요.”

꿈속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꿈에서 나는 카히텐 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저는 몰랐습니다. 알 필요도 없었고요. 저는 그저 당신을 구하는 게 목적이었고, 다른 사정에는 무관심했죠.”

로체가 눈을 감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후회 섞인 중얼거림 뒤로 회상이 이어졌다.

“당신 말대로 금발의 사내가 나타난 건 맞습니다. 저도 단박에 그 자가 헬리아스 황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보다 반짝거리는 금발은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

“그럼 내가 꿈에서 본 금발은 환상이 아닌 거지?”

“네.”

“그 자가 나를 죽인 것도 아니고……?”

“경계할 가치는 충분한 상대였습니다만, 혼자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다 갑자기 사라졌으니 당시에 그 의중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체 왜 당신 앞에 나타난 건지…….”

“갑자기 사라졌다니…… 어떠한 공격도 안 하고 그냥 사라졌다고?”

“공격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손을 대긴 했지만요.”

“……손을 댔다?”

“말 그대로, 손을 댔습니다. ……이쯤?”

그가 제 왼쪽 가슴께를 짚었다.

“그게 다였다고?”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요.”

그건 그냥 변태 아닌가…….

그 와중에 ‘아닌가? 오른쪽인가?’ 하고 혼잣말을 해 대는 로체 때문에 더더욱 긴장감이 떨어졌다.

“너는 그때 뭐 했는데?”

그냥 물어본 건데 왠지 따지는 투가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부채감을 갖고 있는 애한테 괜한 죄책감을 심어줄까 싶어서 한마디 더 보태려던 차, 그가 말했다.

“공격할 수가 없었어요.”

“……?”

“어떻게든 막으려고 시도는 해 봤습니다만, 불가능했습니다. 통과돼 버렸거든요.”

“유령처럼?”

“예. 사람이 아니라…… 레아 양 말대로 유령 같았습니다, 그 사내는.”

왜인지 헬리아스 황제가 떠올랐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거리감과 이질감. 단순히 직위에서 오는 위압감만은 아니었다.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순간,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마치 100년 전의 그 자리에 그와 내가 마주 보고 서 있는 듯이.

내가 굳어 있자 로체의 눈에 걱정이 깃들었다.

“레아 양, 괜찮습니까?”

“괜…… 찮아.”

나는 이 이야기의 끝을 들어야 했다. 내가 모르는 전생의 죽음 이후까지 전부, 낱낱이.

“계속 얘기해 줘.”

로체는 조금 더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당신을 한번 건드리고는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이어서 다른 사내가 나타났죠. 이안 카히텐과 굉장히 흡사한 머리색과 눈동자를 가진 사내.”

“…….”

“그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예, 적어도 공격을 했고, 당신이 쓰러졌죠. 그리고 전…….”

로체는 눈을 내리 깔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그가 눈을 질끈 감자, 샛노란 속눈썹이 눈꺼풀 사이로 깊이 묻혔다.

“저는 당신의 시체조차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로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한심한 역사를 읊자니 역시 창피하네요.”

마음 같아서는 그의 손을 맞잡아 주고 싶었지만, 내 쪽도 여유만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연신 오므렸다 펴며 벅찬 감정을 억눌렀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은발에 벽안, 로체를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사내라면 분명 성력을 가진 카히텐 대공가의 사람일 텐데. 왜 그들이 전생의 레티시아를 죽였을까?

내가 모르는 갈등관계가 있었나? 아니, 그랬다면 카히텐 성에서 온갖 역사서를 독파할 때 알아보았을 것이다.

혹시 로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로체, 혹시.”

“제 눈은 정확했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어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어요.”

“…….”

“레아 양이 직접 봤다면 제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절대 인간이 아니었어요.”

“…….”

“제가 신을 따로 섬기는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그가 인간이라고는…….”

“알았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땀에 전 손바닥이 볼을 뜨끈하게 감싸왔다.

“알았다고…….”

두 손을 그대로 올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입에서는 자연히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간이 아니었다.’

설마.

카히텐 대공가가 아니라, 카히텐 신이 직접 전생의 레티시아를 죽였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남자가 그럴 리가 없어.

‘왜냐하면 그는 그녀를…….’

툭. 소파 위로 두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왜일까. 꿈속의 나는 진짜 나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인물인데 이토록 배신감이 드는 것은.

입으로 전해 듣지는 않았지만 100년 전의 그녀가 카히텐 신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여자를 제 손으로 죽이다니. 그런 정신 나간 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내 꿈이 잘못 되었나? ……아니,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이건 그냥 개꿈이 아니라 내 전생이니까.”

지금까지는 로체가 전해 준 말과 꿈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이번이라고 다를 바는 없을 텐데.

그러니까, 카히텐 신이 전생의 레티시아를 죽인 게 맞는다면…….

‘꿈에서 내가 겪은 그 느낌을 뭐였지?’

금발의 남자가 내게 다가온 순간, 그에게 내 전부를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

엄연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시려고요?”

“응.”

현재 내 신분으로는 대신전의 서고를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100년 전의 사건을 뒤져보면 뭔가 괜찮은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지.

로체의 말만 믿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다.

“얘기 들려 줘서 고마워. 오래 전 기억이라 회상하기 힘들었을 텐데.”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로체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흐린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레아 양, 엘프가 타인에게 무심한 이유 혹시 알고 있어요?”

“아니, 그냥 성향이 그런 거 아니었어?”

“엘프는 한번 느낀 강렬한 감정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사랑도, 친애도, 상실감과 죄책감도. 그래서 굳이 느끼지 않으려고 하죠. 가뜩이나 긴 삶이 고통스럽길 바라진 않으니까.”

“…….”

‘잊지 않은’ 게 아니라 ‘잊지 못한 거였다’라. 한 세기가 다 가도록 지난한 감정을 품고 사는 로체가 왠지 가여워졌다.

“너무 축 처지지 마. 안 어울려.”

그리 말하며 로체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손이 닿을 때마다 파직, 파직 소리가 나며 로체가 펄쩍 뛰었다.

“아, 아파요! 레아 양!”

“아, 미안.”

정전기가 올랐나?

미안해서 그를 쓰다듬자 이번에는 파지지지직, 하고 길게 전기가 올랐다. 로체는 거의 자지러졌다.

“그어어어…….”

“……설마.”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결계’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 내가 건드리는 것도 안 되는 거였냐고.

이건 좀…….

‘심한데.’

돌아가면 체이트에게 다시는 이런 거 걸어 두지 말라고 해야지.

“아, 진짜 미안.”

두 손을 모아 사과하자 로체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면 500리스만…….”

이건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나 가 볼게.”

도망치듯 슬쩍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가 소파 밑을 가리켰다.

“저거 가져가셔야죠…….”

“응? 나 빈손으로 왔는데?”

로체가 가리킨 건 한 권의 책이었다.

“제 것도 아닌데요.”

로체를 지나쳐서 소파로 가 책을 살폈다. 낡은 외피에 제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흠…….”

무심코 그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머리가 쨍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두통이 밀려왔다. 더불어 잊고 있었던 기억들도.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이내 빈 소파 위에 어떤 여인의 모습이 겹쳤다.

“……코렐리아.”

방금 전까지 그녀가 여기 있었다.

입을 벙긋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지.

뭐라고 했더라?

그녀의 입술을 따라 발음을 되새기던 기억을 애써 떠올렸다. 그때 분명…….

“아……!”

생각났다.

‘당신은 아직 각성하지 않았어.’

그녀는 그렇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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