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86)화 (86/140)

나는 체이트를 보내고 책을 다시 열었다. 읽어 내려 갈수록 오래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역시…….”

내가 알던 원작이랑 똑같아.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물론이고, 잊고 있던 부분까지 도로 생각날 정도로 한 치 달라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원작 그 자체.

빙의 전에 읽은 책이 어떻게 빙의 후의 세계에 있는 걸까.

그것도 코렐리아를 만난 직후에.

본래 이 세계에 있었던 책이라면 왜 지금에서야 나타난 거고?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책의 도입부를 반복해서 읽었다. 내가 죽어 가던 그 순간을.

이안은 죽어 가는 제 아내를 권태로운 낯으로 내려다보았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초상을 미리 비관하며, 동시에 재혼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복중 아이마저 죽어 버리다니. 이러면 꼼짝없이 새 장가에 들 수밖에 없잖은가.

의사는 본디 대공비의 자궁 자체가 자식을 잉태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누구와 혼인하고 임신하든, 종내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던 거다.

“시간 낭비를 했군.”

그가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에 산파가 몸을 움찔거렸다. 와중에 죽어가는 여인은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전하, 단 한 번만…….”

그토록 차갑고 정 없던 남편에게 여인은 마지막까지 사랑을 갈구했다.

“한 번만 제 이름을…….”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 말에 이안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적선하듯 말했다.

“다음 생에서 보지, 레티시아 브링스턴.”

이윽고 여자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안은 마지막 한순간까지 그 깡마른 손을 맞잡아 주지 않았다. 또한 제 성씨를 나누어 주지도 않았다.

실로 비참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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