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이트는 팔짱을 끼고 등을 뒤로 물렸다.
“마침 레티시아가 애타게 찾던 여자의 이름도 코렐리아지. 흔한 이름은 아니야. 아니, 정확히는 흔한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지.”
신전은 성인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100년 전 카히텐의 성녀 코렐리아의 이름은 신전에 적을 둔 이가 아닌 이상 쉬이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그들이 아르키드네를 모시고 있다고 해도, 신의 존재를 맹신한다는 점에서 아르키드네의 형제인 카히텐 또한 숭상받아야 할 존재임은 명확했기에.
“사실상 사장된 이름을 멀쩡히 달고 있는 걸 보면 보통 여자는 아닐 텐데……. 나는 왠지 레티시아가 찾는 그 여자가 100년 전의 성녀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로체가 말이 없자 체이트가 채근하듯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글래디안.”
그의 진명을 거론하며 도발하자 로체의 볼이 씰룩거렸다.
“글쎄……?”
“글쎄가 아니지. 당신은 코렐리아 폴린과 분명 연관이 있어. 내가 이만한 정보로 그 정도 사실조차 유추하지 못할 것 같아?”
“…….”
로체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너라면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에 많은 걸 깨달으리라 생각했지.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믿었고.”
“레티시아에게 접근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겠군. 그녀를 노렸나?”
“노렸다니, 서운하게 말하네.”
“현신 때문이지.”
체이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당신은 신의 현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어. 실제로 그 과정에 관여하기도 했지. 물론 기록상에는 당신이 현신을 방해했다고 했지만, 역사는 곧잘 왜곡되는 법이니까.”
“왜곡되지 않았어. 나는 실제로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으니까.”
“도망쳤다? 납치가 아니라?”
체이트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로체가 말을 이었다.
“납치라고 적혀 있었어? 그들 입장에서는 그리 보였을 수도 있었겠네. 그녀는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핏줄이었어. 나는 그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지. ……결국 지키지 못했지만.”
“기록상으로 제물은 실종되었어. 당신은 그녀가 죽었다고 얘기하는 건가?”
“그래.”
“사제는 제물을 죽일 이유가 없으니 논외로 치고, 그만한 성력을 가진 여자를 죽였다면 상당한 마력이나 성력을 지닌 자겠군.”
“미리 말하지만 엘프는 인간사에 무관심해. 내가 조금 이례적이지.”
“사제도 이종족도 아니다? 그렇다면 신밖에 없군.”
체이트가 빠르게 답을 도출했다.
로체는 조금 의외롭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네가 레아 양보다 비상하긴 하구나.”
레티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에 체이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제 성녀의 육신을 그릇 삼아 현신했나?”
“카히텐이? 말도 안 돼.”
로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체이트가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추론을 이어갔다.
“카히텐의 종자인 드워프와 후손인 북부 대공가의 자손들이 성력을 잃은 시점이 딱 그즈음이었지.”
“그렇지.”
“현신한 게 아니라면 본신으로 내려왔다는 건데. 그랬다면 카히텐의 권위가 일시에 사라진 것 또한 말이 되는군.”
대주교로 재직한 시기를 제하고도 체이트가 신전에 몸담은 세월은 제법 길었다. 신이 정한 계율에 대해서도 그는 다른 이들보다 소상히 알고 있었다.
“카히텐이 제 손속의 여인을 죽였다는 건가?”
“…….”
로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상하군. 굳이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나?”
체이트가 로체를 노려보며 명령조로 말했다.
“아는 대로 말해.”
로체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우리 앞에는 카히텐 외에 다른 존재가 있었어.”
“다른 존재?”
“그래.”
“인간이라면 네가 막아내지 못할 리 없었을 테니, 비단 신이었겠군. 아르키드네라면 북부까지 나서지 않았을 테고. 헬리아스인가?”
“나는 그게 귀신인 줄 알았어.”
“헛소리 집어치워. 헬리아스야?”
체이트는 로체의 변명을 받아주지 않았다.
로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체이트가 알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신전은 현신을 예고한 자가 당연히 그들의 신인 아르키드네일 거라 생각하고 제물을 확보하는 데 협조했지만, 실은 헬리아스가 현신을 바란 거야. 그렇지?”
“돌이켜 생각해 보자면…… 그 말이 맞아.”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듯이 카히텐 신 또한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 수 있었겠군. 그래서 한발 늦게 등장한 거고.”
체이트는 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힘을 빌린 채 살아가고 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신은 전혀 완전무결하지 않다.
애당초 그들을 신이라고 명명한 건 인간이니까.
체이트 자신도 인간에 비견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레티시아의 애정을 갈구하는 한낱 사내에 불과했다.
강한 존재가 반드시 선은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들을 단순히 받들기보다 경계해야 했다.
그들이 구원자라고 누가 그러던가?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들을 장난감으로 여길 수도 있을 터인데.
“본신으로 올 정도면 사안이 시급했다는 거고, 어쩌면…… 일이 벌어진 후였을 수도 있겠군.”
체이트가 말했다.
“헬리아스는 이미 제물의 몸에 현신했고, 카히텐은 그를 막아야 했겠지. 그래서 자신이 택한 여인을 죽인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가장 타당한 듯한데.”
“……내가 그 순간 너만큼 머리가 잘 돌아갔다면 좋았을 텐데.”
로체가 회한에 젖은 눈으로 웃었다. 어딘지 서글픈 미소였다.
체이트는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레티시아에게 접근한 거지?”
“그녀가 100년 전의 성녀처럼 헬리아스의 표적이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코렐리아 폴린이 내게 알려줬어. 레아 양을 지켜보라고.”
“코렐리아 폴린이?”
“그래. 너에게도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어?”
“…….”
체이트는 낡디낡은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제게 있어 그녀는 아주 짜증나는 구원자였다.
자신을 악몽에서 꺼내 주었지만, 동시에 악몽에 집어넣은 여자였다. 자신이 레티시아와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나, 한편으로 자신을 한때나마 무력하게 만든 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금계를 걸지 않았다면 나는 레티시아를 죽였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그러한 가정 속의 자신을 찢어발기고 싶어질 정도였다.
혹시 그녀는 이러한 경우의 수까지 모두 염두에 둔 건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자신이 레티시아를 해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대체 그 여자가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체이트는 미간을 찡그린 채 턱을 괴었다.
앞서 가졌던 의문은 머릿속에서 거의 풀렸다.
헬리아스는 소기의 목적을 위해 현신을 원했고, 카히텐의 성녀를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카히텐이 본신으로 그를 막아서며 한 차례 계획이 불발되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그간 자신이 봐 온 드미트리와 헬리아스 황제 또한 헬리아스 신 본인일 것이다.
다만, 그릇이 적합하지 않아서 온전한 힘을 모두 발현하지 못하기에 그에게는 더 괜찮은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엔 레티시아를 노린 거겠지. 아르키드네가 레티시아를 성녀로 각성시킬 것을 예상하고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드미트리를 그릇 삼아 레티시아를 공격한 걸 테고.
꼬아 올린 다리 위에 얹어 놓은 손이 무릎을 꽉 쥐었다. 신이든 뭐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는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카히텐 신과 다르다. 레티시아를 헬리아스의 그릇이 되도록 좌시하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한 가지 확인할 사안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어.”
계속해서 꼬리를 물던 고민을 풀어내기 위해 체이트가 입을 열었다.
“100년 전의 코렐리아가 그 코렐리아 폴린과 무슨 연관이 있지?”
100년 전 코렐리아는 인간이었다. 한번 죽은 인간이 되살아날 수는 없었을 테고. 그러므로 둘이 동일 인물일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서로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라기엔 겹치는 단서가 너무나 많았다.
로체가 대답했다.
“네가 본 코렐리아 폴린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야.”
“껍데기?”
“그래. 100년 전에 죽은 여자의 껍데기.”
즉, 100년 전 카히텐의 성녀가 죽은 후, 그 육신을 누군가가 거두어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가.
하지만 죽은 존재다. 현신에 적합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설사 그릇으로 쓸 수 있다고 해도 성력이 미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존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제게 금계를 걸 수 있었단 말인가.
“아르키드네 여신은 무용한 살생을 싫어해. 그녀는 절대 살아 있는 존재로 현신하지 않지.”
로체의 말에 체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이 없는 존재로는 현신 자체가 불가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또한 인간의 억측인가?”
“아니, 거의 사실이야. 하지만 그녀는 특별했으니까.”
로체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카히텐의 성녀는 신의 사랑을 받았어. 단순한 총애가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지.”
“…….”
“코렐리아 폴린이 했던 말이야. 신이 가호를 내릴 때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힘을 나누어주게 된다고.”
체이트는 로체의 이야기를 잠자코 경청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르키드네는 인간을 연민하여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성력을 주었고, 헬리아스는 오로지 권력 있는 자만을 총애했다. 그래서 고대에 득세했던 가문에 헬리아스의 권위가 내리고 그들이 곧 헬리아스 황가가 되었다.
카히텐은 대체로 무심했지만, 자신이 맡은 영역인 북부에 책임감을 느꼈다. 그게 토지 개간에 능한 드워프들과 척박한 북부를 이끄는 대공가의 힘이 되었다.
로체가 이전에 들었던 얘기들을 회상하며 말했다.
“인간이 갖는 성력이 신이 보내는 관심의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면 말이야. 만약 그 존재가 제 전부를 주고 싶어질 때, 그 대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