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온은 잠을 자지 않았다. 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잠들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릇이 눈을 감는다고 해서 그의 사고가 멈추지는 않았다. 그의 시간은 매 순간 제정신인 채로 흘러갔고, 바람이 스치는 찰나조차 부유하는 먼지처럼 느리게 이어졌다.
시간을 빠르게 느끼는 법은 알지 못한다. 모든 게 달팽이 걸음처럼 느릿느릿하다. 무저갱처럼 깊고 까마득한 무한이, 심지어 느리게, 게처럼 기어간다.
이런 삶을 제정신으로 버티라고? 우습지도 않은 소리지.
아르키드네는 세월을 유수처럼 지나칠 힘이 있고, 카히텐은 주기적으로 수면에 잠겨 의식을 재충전해야 하는 결핍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제게는 각박한 현실을 외면할 능력도, 결핍도 없었다.
세 명 중에 두 번째. 어중간하게 태어난 자신은 그토록 애매한 고통에 매번 잠식당했다.
제정신으로 영겁을 견딘다는 것.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
저주를 지고 태어난 주제에 발아래를 향해 축복을 내리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신. 그들은 자신을 신이라 칭했다. 누군가는 경칭이라고 하나, 제게는 멸칭이었다.
누가 받들라고 한 적도 없는데 어째서 그들이 자신을 경외하는지 알 수 없다.
어째서 이 존재가 절대적이고 무결하리라 그리 자신하는지.
끝이 있는 생이란 본디 그토록 편안한 의식체계를 허용하는 건지.
자신은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제게 신은 없었다.
“오랜만에 달이 떴네.”
수도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르온은 창가에 두 손을 걸쳤다. 권능을 자제하여 만들어 낸 인공적인 밤하늘에 자연스럽게 뜬 만월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허용한 달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어둠을 허했을 뿐이었다. 나약한 인간들이 저는 모르는 수면에 들 수 있도록.
“아르키드네가 온 거로구나.”
달이 뜬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토록 은밀한 척하였으나, 동시에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지만…….
“다시 돌려보내야겠네.”
하르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두웠던 하늘에 영광스러운 광휘가 머문다. 태양이 물리를 배반하며 비상하더니, 어느새 눈부신 대낮이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제 형제가 현세에 내려오는 일을 막아 왔다. 그 탓에 그녀는 아마 오래 이곳에 머물지는 못했을 것이다.
계율에 얽매이고 인간에게 약한 나의 형제, 아르키드네. 어리석은 두 동생 탓에 긴 세월 편안히 쉬지도 못했지.
차라리 포기하지. 아니면, 내 편에 서든가.
“대체 왜 카히텐을 돕는 건지.”
하르온은 가느다란 눈매를 접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간에게 눈이 먼 머저리에게…….”
애초에 카히텐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떠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카히텐이 그 자신보다 제 성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토록 강한 힘을 그녀에게 물려주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신을 담아낼 수 있는 완벽한 그릇이 될 일 따윈 없었을 테니까.
비록 카히텐의 그녀는 죽어 버렸지만, 이처럼 보란 듯이 되살아났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역시 그 여자였어.”
레티시아가 100년 전 성녀의 환생이라는 확신은 없었으나, 단서는 존재했다.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꿈을 꾸지 못하는 자신을 혼몽처럼 따라다니는 기억.
기억 속에서 그는 제 신도였던 드미트리를 이용하여 아이를 잉태한 레티시아를 죽였다.
아니, 정확히는 시체처럼 만들어 숨만 붙여 놓았지. 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릇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다시, 실패했다.
모두 지금 이맘때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멀쩡히 살아서 신전으로 도망한 이 시기에.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본래 카히텐 성에 머무르고 있었어야 했다. 요새와도 같은 곳에 몸을 숨기고 대공의 부인으로서 지내고 있었어야 했지.
‘하지만 현재 그녀는 아르키드네 대신전의 비호를 받고 있다.’
같은 시간대에 벌어진 일이지만, 기억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혹시 제 기억이 날조되었나?
……아니, 누구도 감히 제게 그런 장난을 칠 수는 없다. 설사 제 형제들이라고 해도.
현 상황의 변수는 크게 세 가지. 체이트 폴린의 존재와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파혼, 그리고 카히텐의 부재다.
자신은 잠을 자지 않으므로 꿈도 꾸지 않는다. 기억이 남았다면 그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일 터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적 없지만, 자신이 행하고 겪어온 일임은 분명한 기억들.
일어나지 않은 일이 어째서 기억에 남아 있는가. 그것도 동일한 시기에, 전혀 다른 양상으로.
‘카히텐이 사라진 건 내게 있어 호재이긴 하지만…….’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카히텐의 본신은 꾸준히 자신을 괴롭혀 왔다.
제가 지금 아르키드네를 현세에 쉬이 내려오지 못하게 하듯이, 그 역시 자신이 현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했다.
아르키드네와 손을 잡고서.
하지만 그 강제적인 구속은 어느 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카히텐의 본신까지 자취를 감췄다.
처음 몇 년간 그는 카히텐을 경계하여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현신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게 아마 3년 전쯤이었나?
헬리아스 황제의 정신을 좀먹고 그를 그릇으로 삼은 시기 말이다.
헬리아스 황제는 살아 있는 자이므로 죽은 그릇을 이용하는 아르키드네보다 자신은 더 많은 권능을 펼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레티시아 브링스턴 정도는 쉬이 손에 넣을 줄 알았는데.
“……체이트 폴린.”
인간 주제에 예사롭지 않은 사내였다. 아르키드네의 가호를 그만큼 강하게 받은 인간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키드네가 제아무리 자비롭다고 한들, 한낱 인간에게 그 정도 힘을 건네줄 리는 없을 텐데. 그녀는 공명정대한 신의 역할에 누구보다 심취해 있으니까.
체이트 폴린은 강했다. 하르온의 몸에 깃든 자신과 비견될 정도로. 이 몸으로 그와 단둘이 싸운다면 아마 고단한 승부가 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이기겠지만.
그래, 그는 인간이다.
한낱 인간.
문제는…… 왜 하필 아르키드네가 그를 선택했냐는 건데.
“역시 그런가.”
단 하나, 가능성은 있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여 차치해 둔 답이 있었다.
“카히텐이 미친 거야.”
윗입술이 일그러지며 첨예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사술을 부릴 리가 없지.”
하르온, 헬리아스가 피식거렸다.
그가 무슨 짓을 벌였든 간에,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비로소 적합한 그릇으로 각성했다. 자신으로 인해서. 이제 더는 이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생각을 마친 그는 이내 시종장을 불렀다.
“해가 너무 밝아서 피곤하네. 밑으로 내려가야겠다.”
시종장이 정중히 고개 숙이고 환복을 도왔다. 휘황찬란한 황제의 로브를 벗고 더러운 것이 묻어도 눈에 띄지 않을 어두운 옷을 걸쳤다.
그는 그대로 황성 지하로 내려갔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의 여동생, 셀레나 브링스턴이 있는 감옥이었다.
셀레나는 감옥 구석에서 멍하니 널브러져 있었다.
“으으……?”
낮은 발소리에 눈을 뜬 그녀가 눈앞의 상대를 발견하고 창살까지 허겁지겁 기어 왔다.
“폐, 폐하! 폐하!”
그녀가 창살을 두 손으로 쥐고 사이로 얼굴을 디밀었다. 예전의 미색은 찾아볼 수 없이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누가 봐도 잘 지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잔인한 물음에 셀레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장에라도 떠나 버릴 것만 같아서. 이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는 건 끔찍했다.
“폐하, 제발 저를 여기서 꺼내 주세요. 저는 폐하의 연인이었잖아요…….”
“연인? 누가?”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정략혼이었잖아. 사실 처음에 날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그렇지 않아요! 저는 폐하의 혼약자가 된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서 어쩔 줄을…….”
“네 언니를 부러워했잖니.”
셀레나의 떼꾼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 언니가 젊고 헌앙한 카히텐 대공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에 질투하지 않았어? 재취도 아니고, 나이대도 비슷하고, 능력도 있는 남자의 단 하나뿐인 정실이 된다는 것에.”
“……!”
셀레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그런 마음을 품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절대 그 마음을 밖으로 내비친 적은 없다.
대체 어떻게 황제가 제 마음을 알아챈 거지? 무슨 독심술을 쓰지 않는 이상 평생이 가도 모를 비밀이었을 텐데!
셀레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떡 지고 먼지 낀 더러운 분홍 머리가 흔들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어떻게 생각했든,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란다.”
“저, 저는 절대로 그런 불손한 마음을 품은 적이 없어요…….”
“중요치 않대도.”
그가 말했다.
“나는 네게 제안을 하러 왔을 뿐이야.”
“제, 제안이요?”
셀레나의 흐린 눈에 희망이 어렸다. 이 어둡고 습한 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 제안.”
그의 화사한 얼굴이 창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셀레나 브링스턴, 네 언니가 부럽지 않니?”
“예……?”
“너는 이 더러운 곳에서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네 언니는 혼자 멀쩡히 빠져나가 온 세상에 추앙받는 성녀가 되었잖니.”
“……성녀가 되었다고요?”
지하로 식사를 나르는 간수가 비아냥거리듯 했던 말이 진짜였다니.
셀레나가 무심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터진 입술에서는 피 맛이 났다.
“그리 억울해할 필요 없어.”
그가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셀레나의 더러운 머리를 쥐었다. 레티시아와 닮은 분홍 머리칼을.
이내 그의 붉은 입술이 요사하게 움직이며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이제 네가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