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90)화 (90/140)

내가 당황스럽게 두 사람 사이를 곁눈질하자, 체이트는 뒤늦게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가 걸치고 있던 가운의 매듭을 바로 했다.

“주교께 흐트러진 꼴을 보였군요.”

아니, 그쪽은 자기에게 그런 꼴을 보인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안타카스 주교는 두 손을 모은 채 ‘아르키드네여!’ 하고 외쳤다.

“아니면?”

그가 안타카스 주교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키 차이가 제법 나서 그의 얼굴은 늙은 주교보다 한참 위쪽에 있었다.

붉은 눈이 주교를 심상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이럴 줄 모르고 데려왔어?”

말끝이 짧아졌다. 난처하긴 해도 일견 가볍게 느껴지던 분위기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내가 필요해서 이 자리에 앉혔고, 필요치 않을 때 도로 앗아갈 작정이었잖아.”

안타카스 주교가 입을 다물었다.

“체이트…….”

“신전 치들은 하나같이 이런 식이지. 멋대로 거둬서 도구로 용하게 써먹고 제멋대로 내가 신실해지길 기대해. 있던 신앙도 재가 될 정도로 굴려 놓고는.”

“……대주교님, 지금 성녀님의 앞에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 사료됩니다만.”

“성녀님이라……”

체이트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갔다. 안타카스 주교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차갑지 않았다.

“내가 레티시아를 처음 데려왔을 때도 그녀가 성녀였던가…….”

체이트가 읊조렸다.

“신전과 무관한 여인을 데려왔을 땐 한마디 말도 못 하다가 이제 와 성녀랍시고 나와 레티시아 사이에 선을 그으려 하다니.”

“…….”

“주제넘어.”

커다란 손에 어깨가 잡혔다. 그대로 체이트의 너른 품속에 끌려갔다. 졸지에 그에게 안긴 상태가 되어 살짝 민망해졌다.

“체, 체이트 무슨?”

당혹스러웠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품은 여전히 뜨거웠고 숱하게 안겨 있던 만큼 익숙했다.

“레티시아는 건드리지 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를 끌어당긴 행위 역시 소유욕을 내비치는 치기 어린 사내의 행동보다는 신전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경고의 제스처에 가까웠다.

“주교께서는 오래전에 종교에 귀했으니 내 출신을 듣지 못했을 리 없겠지. 내가 그런 핍박을 받고도 이곳에 머무르며 당신들의 편에 서는 건 오로지 레티시아 때문이야.”

“대주교님, 그 일은 제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함구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 나는 그런 수모를 겪고도 여기 있어. 그 사실에 감사해.”

그가 내 손을 끌어다 보란 듯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모시는 신은 아르키드네가 아니라, 여기 있으니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고작 인간인 주제에 여신 취급을 받아 버렸다. 그것도 신실하기 그지없는 아르키드네의 종자 앞에서.

“…….”

나는 안타카스 주교가 이 말도 안 되는 발언에 참지 못하고 분노할 줄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를 기도실로 이끌어 방석에 앉혀 놓거나.

하지만 주교는 그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 숙였다. 생기 없는 입술 사이로 체념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

“양심이 있는 신자라면 감히 그럴 수는 없겠지요.”

“당신에게 양심이 남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체이트는 유명한 독설가처럼 쏘아붙였다. 안타카스 주교의 손끝이 주먹을 쥘 듯 말 듯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우리 꼬리를 잡는 행동은 그만둬.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신전을 지키기 위해 협조할 테니. 그 후에 이 자리는 당신 몫이야.”

“…….”

안타카스 주교는 한때 체이트의 자리를 탐냈다고 했지. 본래 원했던 바대로 체이트가 확신을 주자, 주교는 가타부타 말없이 돌아섰다.

그가 몇 걸음 가다 미련 남은 사람처럼 뒤돌아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한 걸까.

체이트는 묻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궁금한데…….’

둘의 대화가 내가 묻고자 하는 이야기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안타카스 주교가 완전히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체이트가 내 어깨에서 팔을 풀고 손을 잡아끌었다.

“들어갈까요, 레티시아?”

“……응.”

나는 체이트에게 이끌려 그의 침실 안으로 걸어갔다. 끼익, 문 닫히는 소리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와 단둘이 한 방에 있던 적이야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만의 공간에 대놓고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단출한 가구들과 민무늬 커튼 아래의 은은한 촛불 하나가 나를 맞이했다.

등도 없이 그저 촛대 하나라.

신전의 모토에 검소와 겸양이 있다고 해도 대주교의 침실이라기엔 지나치게 빈약한 곳이었다.

마치 언제 누가 들고나도 티가 나지 않을 손님방 같다.

그는 항상 이 방과 같은 마음으로 대신전에 있었던 건가. 언제든 이곳을 떠날 마음으로.

“먼저 찾아와 준 건 처음이네요. 솔직히 너무 설레서, 아까의 무례에 화도 제대로 못 낼 뻔했어요.”

안타카스 주교가 그의 침실 근처를 어슬렁거린 건 확실히 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로 당신이 내게 먼저 왔을까요?”

난 문가에 망연히 서 있다가 몇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이 감겨 왔다.

“……보고 싶어서.”

“거짓말.”

그가 내 허리를 당겨 배꼽 부근의 천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당신은 괜찮아요. 나를 얼마든지 속이고 이용해도 돼. 당신만은…….”

“…….”

체이트는 자신이 신전의 도구로 이용당해 왔다고 했지. 역시 그의 과거는 신전과 무관하지 않다.

난 그의 뒷머리를 동정하듯 쓸어내리며 운을 띄웠다.

“방금, 안타카스 주교한테 했던 얘기 말이야.”

“네.”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 거지?”

“…….”

그가 내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고양이처럼 머리를 비비고 등을 간질였다.

“레티시아.”

“응.”

“내 레티시아.”

“……응.”

석양 같은 눈동자가 나를 비춘 채 둥글게 휘어졌다.

“언제 이렇게 눈치 빠른 여자가 된 거예요?”

그야 나도 살아야 하니까.

살아남아야 하니까.

“내 사랑은 그렇게 느리게 깨달았으면서.”

애정 어린 타박에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 한 줌을 쥐어 잡아당겼다. 아프지 않도록 살짝 당겼음에도 그는 내 손길대로 이끌렸다.

그의 얼굴을 마주 내려다보며 묵언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어릴 때, 신전에 잠시 있었어요.”

“사제로?”

“사제……일까요.”

그의 눈초리가 가늘게 늘어졌다.

“그들이 저를 사제라고 불렀으니, 달리 선택권은 없었겠네요.”

“부모가 너를 신전에 의탁시킨 거야?”

그가 웃었다.

“레티시아, 저는 제 부모가 어디서 뭐 하는 누구인지 얼굴조차 알지 못합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고아라는 건가?

함부로 단어를 골라 말을 얹으면 상처 주기 쉬운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머리에 고개를 묻은 채 잠자코 눈을 감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누군가가 저를 신전 문 앞에 놓고 갔습니다.”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아 듣기 좋은 음성이 귀를 울렸다.

“선대 대주교는 제 방대한 성력을 경계했고, 저를 지하에 가두고…….”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괜찮아. 작게 속삭이며 그의 머리를 다독였다.

네가 무슨 과거를 가졌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괜찮아. 네가 내 존재를 맹신하듯이, 나 또한 고작 그런 일로 너를 재단하지 않을 거야.

내 속삭임에 긴 숨을 내쉰 체이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저를…… 개로 길들이고자 했습니다.”

“개?”

“예, 말 그대로입니다. 신전의 더러운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번견으로 들이고자 했죠.”

“…….”

사람을 개로 길들인다니. 비유라도 너무 잔혹하다.

“그래서 도망친 거야?”

“예.”

등에 감겨 있던 손이 살짝 떨어졌다.

“저는 그때 손에 피를 묻혔어요. 저를 가르치던 이를 제 손으로…….”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머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서? 그 뒤엔 무사히 도망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작게 물었다.

“저 혼자서는 무리였습니다. 한 여자가 돌연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죠.”

“그거 설마.”

“네, 그 여자가 당신이 찾던 코렐리아입니다.”

“……!”

그렇다면 체이트에게 코렐리아는 은인이 된다. 어째서 은인을 찾는 행위에 그토록 꾸준한 거부감을 보였던 걸까?

“그녀는 제게 금계를 걸었어요. 인간을 쉬이 살생할 수 없는 금계를……. 그래서 저는 단지 도망칠 수밖에 없었죠.”

과연. 그 때문인가.

체이트의 성력은 어지간한 사제 한 무리를 가볍게 상회한다. 그가 추적하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면 제 앞에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와 달리 능력이 있는 그라면 지난한 도망자 생활을 할 필요 따윈 없었을 테니.

하지만 체이트는 그러지 못했다. 코렐리아가 걸어 놓은 금계 때문에.

“그래서야?”

내가 물었다.

“그래서 코렐리아를 그토록…… 원망한 거야?”

“원망처럼 보였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였군요.”

“아니야?”

“아뇨. 원망이라면 원망이죠. 다만 그때의 일은……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감사한 일이고.”

“응?”

그가 나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뇨. 아무튼 원망이 있다면 그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면?”

“남은 앙금이 있다면…….”

그가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코렐리아 폴린이 어린 저를 이 대신전에 데려다 놓은 장본인이라는 것. 그게 가장 의문스럽고, 짜증스러운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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