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91)화 (91/140)

코렐리아가 체이트를 대신전으로 데리고 왔다고?

“……이렇게 될 줄 알고서?”

어린 네가 어두운 지하에 갇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걸 예견하고도, 직접 너를 신전 바닥까지 이끌었단 말이야?

“…….”

체이트는 말없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이상의 긍정도, 부정도 필요치 않았다.

그의 등에 얹혀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엉망진창으로 주름이 진 가운을 내 쪽으로 당겨 안았다.

그런 걸 너는 고작 앙금이라고 해?

분노가 일었다.

“나는 네게 그런 여자를 함께 찾아 달라고 했어.”

“…….”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화가 났다.

왜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코렐리아 폴린이 당연히 도의적이고 선한 인물이라고 단정해 둔 것일까.

원작의 여주라서?

아니, 이제 원작 따위는 없어.

그건 이제 한 편의 소설일 뿐이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이 진짜고, 지금 내 앞에 존재하는 이들이 진짜 내 사람이다.

“…….”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걸까.

“체이트.”

나는 그에게 고백해야 했다.

“사랑해.”

그가 얼굴을 들었다. 이미 여러 번 들은 말을 다시금 귀에 담고도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벅차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에게 고백해야 했다.

“네게 할 말이 있어.”

그가 나에게 자신의 가장 어둡고 비참한 과거를 고백했으므로.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

“……아니라고 생각했어.”

물론 이제는 나 역시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이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의 나는 다른 세계에서 몇십 년을 살다가 이 몸에 들어온 이방인이었어.”

계속 비밀을 감춘 채 나만 그의 과거를 아는 건 너무 치사하다.

나는 그에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빙의 전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고, 그의 눈은 동그랗게 변하다가 천천히 차분해졌다.

유아용 동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만큼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웃지 않았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하며 심지어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면구스러워진 내가 참지 못하고 말미에 덧붙였다.

“모두 거짓일지도 몰라. 긴 꿈을 꾼 걸지도. 아니면 내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그와는 한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파자마 파티에 설렌 여자애들처럼 이불을 들쓰고 마주 본 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그의 가슴이 내 등에 닿았다.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내 어깨에 두 손을 걸쳐 놓고 있던 그가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글쎄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구체적이라서 제 머릿속에 그 세상이 그려질 것만 같은데요.”

체이트는 내가 느끼는 혼란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이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일 것이다.

네가 무슨 얘기를 해도 허황하지 않다. 그럴 수도 있다. 괜찮다.

그의 위로에 눈물이 핑 돌았다. 도리어 위로를 받아야 할 쪽은 더 심한 과거를 가진 체이트인데. 나는 이번에도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가 내 양 어깨를 둥글리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안 카히텐의 부인이 될 운명이었다는 얘기는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요. 그건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일지도 몰라. 나는 그 일을 소설로 읽었을 뿐이니까.”

“뭐가 되었든. 이 세상도 처음엔 소설처럼 느껴졌다면서요. 어떤 세상이든 당신이 그 남자의 부인인 세상이 있다면, 나는 그 세상을 부숴 버렸을 거야.”

……장난이 아닌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진심이구나.”

난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단단한 팔뚝이 움직이며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아챘다.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제게 당신과 관련해서 진심이 아닌 일 따윈 없습니다.”

깍지 낀 손이 위로 올라갔다. 말캉하고 따뜻한 감각에 고개를 들자 그의 감은 눈이 보였다.

경건하게 눈을 감은 그가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 맞추고 속삭였다.

“내 세계.”

“…….”

“내 세상의 전부.”

그가 아득하게 깔린 밤안개와 같이 말했다.

“당신이 내 곁에 없다면…… 나는 세상을 잃은 거나 다름이 없어.”

삶이 무겁게 느껴진다.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그의 삶과 내 삶이 하나로 이어져 운명공동체가 된 것만 같다.

나는 그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대고 대답했다.

“나도 그래.”

숨결이 서로의 폐부 깊숙이까지 흘러들었다.

“이제 네가 있는 곳이 내 세상이야.”

“……레티시아.”

난 그의 두 손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체이트는 거부하지 않았다. 신전에서는 결코 안 된다던 행각을 스스로 자행하면서도 어느 하나 거부할 의지들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방만한 객이었고, 그러므로 신도는 아니었다.

나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너일 것이다.

너 또한 그러하겠지.

나의 가벼움이 너의 진중함에 먹혀 이대로 짓눌려도 좋다. 나는 기꺼이 그 무게를 받아들일 테니.

서로가 꾹 감쳐물고 있던 비밀을 고백한 날.

그날,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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