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스는 카히텐 성이 혹자의 말대로 진짜 얼음성이 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비단 최근 며칠만이 아니다.
‘꽤 되었지.’
제 주군이 파혼한 후, 수많은 혼서가 도착했다. 마치 십 년간 이날만을 기다린 사람들 같았다.
밀려드는 혼서를 대부인이 추려서 이안의 앞에 갖다 놓으면, 그는 밀랍을 뜯지도 않고 통째로 난로에 집어넣었다.
‘집무실 벽난로엔 불쏘시개가 필요 없겠어.’
하녀들의 우스갯소리가 더는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제스는 이안의 날 선 모습을 볼 때마다 차라리 용감한 처자 하나가 그를 낚아채 주길 바랐다.
물론 그를 위해선 목 하나쯤은 더 준비해 두어야겠지만.
근래 이안의 태도는 그만큼 예민했다.
“제스, 서류의 날인이 빗겨나갔다. 다시 해 와.”
“철자 하나가 틀렸어. 다시 만들어.”
“옷깃이 비뚤어졌잖아. 다시 고쳐 입어.”
왜, 아주 다시 태어나라고 하지 그러냐.
하지만 언젠가 칼을 빼 들고 실제로 그렇게 말할 법도 하여 제스는 조용히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약혼녀에게 차인 건 상관인데 왜 부하인 제가 그 고통을 함께 감수해야 할까. 이대로는 숨이 막혀 살 수가 없다.
어느 날, 제스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금주치 혼서입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이안이 탑처럼 쌓인 혼서를 일별하고 다시 펜대를 움직였다.
“태워.”
파혼한 이후 그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집무실에서 먹고 자는 중이었다. 제스가 조금 수척해진 그의 낯을 보며 생각했다.
‘살짝 마르셨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내가 더 말랐겠지…….’
상대의 안색을 확인하며 제 상태까지 짐작할 수 있다니, 저 작자와 이렇게까지 끈끈한 유대를 맺고 싶지는 않았는데.
“예, 그럼 분부하신 대로.”
제스는 혼서를 모아드는 척하며 낱장을 떨어뜨렸다. 이안의 시선이 자연히 바닥의 종이로 향했다.
“…….”
무감했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뭐지?”
그가 물었다.
“아, 다른 분으로부터 온 서신인데 혼서에 끼어 잘못 들어왔나 봅니다.”
제스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북부의 변방 남작가에서 온 편지입니다. 본래 이맘때면 조금이라도 대공가와 연이 닿아 보고자 별별 가문들에서 시답잖은 안부 인사를 보내오지 않습니까. 함께 태우면 되겠죠?”
그리 말하고 제스는 혼잣말처럼 편지 앞면에 적힌 성명을 읽었다.
“델린의 마리안느…….”
“잠깐 기다려.”
이안이 그를 불러 세웠다.
‘계획대로.’
제스는 초췌한 낯으로 미소 지었다.
“무슨 하명하실 일이라도?”
“그 편지, 이리로 가져 와.”
“예입.”
그가 잽싸게 델린 남작 부인의 서신을 이안에게 전달했다. 이안은 커팅 나이프로 능숙하게 밀봉을 뜯고 글을 읽어 내렸다.
“……서두가 한 장이라고?”
그 부인이 말이 좀 많긴 하지.
이안은 뻔한 미사여구를 한 장으로 늘여 쓴 앞장을 내던지고 다음 장에 시선을 두었다.
“…….”
이번에는 뭔가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예상대로인가?’
제스가 실눈을 뜨고 상관의 반응을 살폈다.
편지 앞면에 수 놓인 델린이라는 영지명을 본 순간부터 그는 레티시아를 떠올렸다.
델린 영지는 이안의 약혼…… 아니, 전 약혼녀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긴 세월 칩거했던 장소였다.
권력에 미련이 없는 변방의 영지에서 예고도 없이 서신이 왔다. 그녀와 관련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브링스턴 영애에 관한 일이라면 저 인간은 어떻게든 반응을 하겠지.’
애당초 지금의 예민함은 모두 그녀와의 파혼 때문이니까. 뭐, 저쪽은 줄곧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만약 브링스턴 영애의 소재와 연관된 얘기가 있다면…… 어떻게든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지옥이라 함은 이안의 집무실 소파를 일컬었다.
상관이 일하는데 부하가 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안이 집무실에서 숙식을 할 때마다 제스 역시 그의 옆에서 뜬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서류의 날인 위치까지 각을 잡아가면서!’
끔찍했다. 끔찍한 나날이었어…….
제스는 눈물을 훔치듯 장갑 낀 손끝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그 틈새로 계속 이안의 얼굴을 주시했다.
“…….”
얼음장 같은 낯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다. 그게 더 섬뜩했다.
‘뭔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대체 델린 남작 부인이 무슨 얘기를 적어 보냈기에?
제스의 불안이 고조될 무렵, 이안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요 며칠 한 몸처럼 끼고 있던 안경도 벗어 던졌다.
‘해방인가?’
제스가 눈을 반짝였다.
“무슨 일이시기에 변방 귀족의 서신을 그리 뚫어져라 읽으십니까?”
그가 모른 척 물었다.
“이 부인, 오지랖이 넓군.”
이안의 대답이었다.
제스는 델린 영지에서 들었던 갖은 소문을 기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로는 유명한 분이시더군요.”
“그래.”
이안이 웃었다. 어찌나 살벌하게 웃는지, 하얀 송곳니가 여실히 드러났다.
“내 약혼녀의 거취를 서신으로 전할 생각까지 할 정도로 말이지.”
무례하게도. 그가 나직이 덧붙였다. 레티시아를 여전히 ‘약혼녀’라고 칭하고 있는 본인의 말버릇은 알아채지 못한 얼굴이었다.
“브링스턴 영애라면 지금 수도의 타운하우스에 계시지 않습니까?”
“브링스턴 가는 멸문했다.”
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안은 그를 외면하고 서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 여자의 말대로라면 말이지.”
“그, 그런 중대한 소식을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
제스는 꽤 유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보를 수집하고 결과는 산출하는 것만은 신전 사제들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그런 제가 변방 남작 부인도 아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자괴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황제가 입막음을 해 둔 거겠지. 당시의 상황을 아는 자들에게 말이야. 외부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면 똑같은 꼴로 만들어 주겠다고 협박했다면 그 누가 황제에게 항명할 수 있겠나.”
“……아무리 그래도.”
“그래, 언젠가는 알려질 사실이었다. 그저 나를 이곳에 조금 더 오래 잡아 두려는 수작질에 불과해.”
브링스턴 가문은 고위 귀족이지만 병력보다는 자금력을 기반으로 명맥을 이어온 가문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멸문이 충격적이기는 해도, 구태여 입을 놀려 목을 내놓을 만큼 헌신적인 가신이나 충복은 없었을 것이다.
“……단순한 오지랖은 아니겠군. 이 여자도 내 약혼녀를 위해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사실을 알린 거겠지.”
레티시아의 지난 세월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오래 한곳에 발붙이고 살아 온 이유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인복이 좋군.”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성정에 끌렸지.
자유분방하면서도 무책임하지는 않고, 눈치는 없지만 악의 역시 티끌만큼도 없는 여자.
어쩌면 자신도 그녀에게…….
“제스, 외출 준비해라.”
이안이 환복을 위해 집사를 부르고 제스에게 명령했다.
“수도로 가십니까?”
“아니. 남부로.”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눈살을 좁혔다.
“내 약혼자가 그 만한 곤경에 처했다면 체이트 폴린이 좌시하고 있었을 리가 없어. 그가 레티시아를 옥에 갇히게 두었을 것 같나?”
“아, 그렇…….”
습관적으로 그의 말에 긍정하려던 제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결국…… 브링스턴 영애는 무사하신 것 아닙니까?”
“?”
“그러니까…… 브링스턴 영애의 안위를 확보하러 가시는 거…… 맞지요?”
“…….”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크라바트를 고쳐매던 이안이 손을 멈췄다. 그 또한 제 행동에서 모순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
그의 눈가가 길게 늘어졌다. 가늠할 수 없는 뭔가를 추론하듯이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이내 대답했다.
“그래.”
목적성이 뚜렷할 때 보이는 투명한 시선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창처럼 내리꽂혔다.
“도로, 확보하러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