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93)화 (93/140)

예로부터 아르키드네의 사제들은 성녀를 모셔 왔다. 하지만 그들이 여신의 가호를 받은 진짜 성녀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원에는 사제가 필요하고 신전에 신도가 필요하듯, 그들에게는 성녀가 필요했다.

대주교가 사제를 관리한다면 성녀는 신도를 끌어모은다. 이따금 사내를 성자로 모시기도 했으나 그 영향력이 성녀와 비견되지 않았다.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원하면서도 변화에 극도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 가호의 대상이 여인이기 때문이었을까. 대주교와 성녀가 각기 사내와 여인이라는 건 어느 순간부터 기정사실이 되었다.

대주교는 성력이 뛰어나고 정치력이 높은 사내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성녀의 조건은 그보다 애매하다.

가호를 받았다는 것을 어찌 증명할 것인가. 가장 쉬운 수단은 성력의 입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전은 성력이 있고 외모가 곱상하며 마을에서 선량하기로 소문난 여인을 골라 성녀로 앉혔다.

외적으로 추앙받았으나 내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신도의 참회를 듣고 이마에 손을 올리는 포교용 도구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들이었으므로, 북부와의 거래 수단으로 삼는 데에도 거부감은 없었다.

왜 북부 대공령이 성녀를 필요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전을 위하여 충분히 해내 주었다. 그뿐이었다.

그 덕에 아르키드네의 권세가 중부에 미치며 지금처럼 부흥하지 않았는가.

이곳은 여느 성처럼 피로 세운 궁전이 아니다. 이곳은 신앙의 근원, 신성한 신의 요람이다.

어린 사제는 그 사실이 퍽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이 아름다운 요람 속에 몸을 의탁했다는 사실 또한 더없이 기쁘고 감사하기만 했다.

심지어 자신이 이번에 모시는 성녀는 그저 그런 포교의 수단이 아니다.

신탁의 성녀, 레티시아.

아르키드네 신의 가호를 받은, 진짜배기 성녀였다.

자신은 이번에 그녀를 모시는 종으로서 발탁되었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사제의 발걸음이 들떴다. 복도를 뛰지 않고 걷는 법을 배웠음에도 자꾸만 레티시아에게 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쿵!

그러다 기어코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야…….”

사제는 주저앉은 채로 이마를 매만졌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복도에서 경박하게 무슨 짓이지?”

남부 지부의 부속 신전을 관리하는 안타카스 주교였다.

그가 꼬장꼬장한 얼굴로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에 사제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죄, 죄송합니다!”

“성녀님께 가는 길인가?”

“예……? 어찌 아셨죠?”

“나중에 와라.”

“하, 하지만 기상을 알려야 하는데…….”

“나중에 와.”

주교는 수척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거기 안 계실 테니까.”

“그게 무슨…….”

주교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나야말로 주 신전으로 돌아가야 하니 이쪽 준비나 도와라.”

“하지만.”

“하지만?”

“……예에.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제는 풀 죽은 얼굴로 주교의 뒤를 따랐다. 주교가 나지막이 툴툴거렸다.

“세상 참…… 말세지…….”

“……?”

사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