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94)화 (94/140)

나는 턱을 괸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중반부까지 다시 정독했는데 아직까진 내가 알던 내용이랑 별 차이가 없어. 코렐리아는 정의로운 주인공이고, 레오넬은 남주 탈을 쓴 곁다리고.”

“레오넬? 레오넬 헬리아스 말입니까?”

그가 아예 바닥에 자리 잡고 앉은 채로 물었다.

“아, 응. 레오넬 황자님. 거기서는 주연이었거든. 시간대가 지금보다 훨씬 이후였으니까.”

나는 얼른 단어를 정정했다. 체이트와 단둘이라고 해이해져서 그만 레오넬을 너무 편하게 불러 버렸다.

하지만 체이트는 관심도 없다는 듯 내 의자 아래에 머리를 기대고 돌아앉았다.

그래, 신전 밑바닥에서 갇혀 살아온 체이트가 새삼 황권이나 신권에 휘둘릴 이유는 없겠지.

또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체이트의 과거를 상상하면 내가 다 분이 치민다.

‘코렐리아…… 아니, 아르키드네. 대체 체이트를 그런 곳에 가둔 이유가 뭐야. 왜 하필 체이트여야 했어?’

내게 이 책을 건네준 이유는 또 뭐고.

‘분명 책에 뭔가 대비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는 주변 인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원작의 내용을 상당 부분 잊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 온 세월이 벌써 얼마인가.

내 머리는 천재보다는 주꾸미에 가깝다는 걸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언젠가 이렇게 잊을 줄 알았다.

미리 메모라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 살기 급급해서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조차 마련해 두지 못했다.

……가만. 이거 혹시 아르키드네의 실책 아니야? 헬리아스의 만행을 막기 위해 빙의자를 데려왔는데 그게 하필 멍청한 나였던 거지.

치밀함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델린 영지 사람들이랑 시시덕거리면서 허송세월 보낼 줄은 미처 몰랐던 거야. 메모 한 장 안 해 두기에 기억이라도 잘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거지!

“그런가……. 내가 너무 멍청해서 보다 못해 치트키를 내려 준 건가…….”

나는 체이트가 들고 있던 책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나는 원작에 나오는 헬리아스 황제의 의뭉스러움보다는 흑막의 사술을 막는 데 집중하고 있었거든……. 혹시 그게 너무 답답한 나머지 코렐리아가 직접 나타나서 책을 건네준 게 아닐까 하고 생각 중이었어.”

‘너는 지금 화자의 심리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출제 의도 자꾸 이렇게 거지같이 파악할래?’라는 의미로 말이지.

“이 책의 흑막이 헬리아스 황제가 아닌가요?”

체이트가 물었다. 아, 그는 책을 봐도 내용을 모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엔 이안 카히텐이 최종 흑막으로 등장해.”

“그럴 듯한데?”

“아니…… 악의 섞지 말고.”

“악의 아니고 진심인데.”

그게 악의 아닌가.

나는 체이트에게 딱밤 한 대를 더 먹여 줄까 고심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직접 본 이안 카히텐은 원작의 묘사와는 다른 인물이었어.”

“흑막 같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

“그가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고?”

“당연하지. 내가 그런 나르시시스즘 환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러다 곰곰 생각하며 말을 덧붙였다.

“……뭐, 이래저래 미운 정은 조금 쌓였지만.”

“…….”

체이트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그가 한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

“응?”

그가 고개를 숙이고 피식거렸다.

“괜찮습니다. 당신 그러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날 도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게 오히려 서운하기는 하지만요.”

“……?”

싸늘하다. 가슴에 눈새가 날아와 꽂힌다.

음,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너무 에너지를 많이 써서 뇌에 힘이 빠졌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

“뭔지도 모르면서 사과를 왜 해요.”

체이트가 말했다. 혹시 삐진 건가 싶어서 슬쩍 안색을 살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미소를 입에 건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그런 모습조차 사랑하는데.”

“…….”

훅 들어오네.

나는 당장 그의 멱살을 끌어다 입 맞추고 싶은 기분을 애써 누르고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말이야. 카히텐 대공이 사술을 쓴 건 지금으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야. 당장 시급한 일은 아니지.”

“그가 쓴 사술이 뭐였는데요?”

“악신과 계약하여 세계를 파괴하는 일. 아니, 재창조라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세계의 진리를 파괴하고 계율을 무너뜨려 신의 입맛에 맞게 다시 창조한다. 그게 사술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악신? 악신이라…….”

체이트가 세운 무릎에 걸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까닥였다.

“이상하군요. 이 대륙에 악신 같은 건 없을 텐데.”

“나도 그게 이상해. 신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단 셋뿐이잖아.”

아르키드네, 헬리아스, 그리고 카히텐.

독자 입장에서는 그러려니 했던 ‘악신’이라는 단어가 막상 성녀가 되어 보니 조금 이상하게 다가왔다.

각자의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 서로 대립한 역사는 있어도, 모두가 한데 입을 모아 ‘악신’이라고 칭한 존재는 없었다.

“헬리아스였을까?”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이안과 계약한 ‘악신’으로서 가장 유력하다.

헬리아스는 자신이 직접 가호를 내린 황제의 몸을 숙주로 삼아 현세를 멋대로 주무르고 있을 뿐더러, 드미트리를 이용해 나와 체이트를 공격하고 내 몸을 두 번째 숙주로 삼아 완전한 현신을 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악신 소리 들을 만하지 않나?

하지만 체이트는 부정적이었다.

“황가는 예부터 헬리아스 신을 자신의 선조라고 자칭하며 황권을 돈독히 해 왔죠. 아무리 이안 카히텐이 양심도 정의도 없는 쓰레기라고 해도 자신과 상극인 헬리아스와 순순히 계약을 했을까요?”

쓰, 쓰레기…….

난 눈을 꾹 감았다 뜨고 물었다.

“그럼 달리 누가 있겠어? 카히텐은 소멸했고 아르키드네는 이안 카히텐과 접점이 없잖아.”

“접점이 왜 없어요.”

체이트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안 카히텐이 코렐리아 폴린과 접선했다면서요.”

“하지만 그건 이번 생에서…….”

“이 책 속의 사정이 그와 달랐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그녀는 외관상 나이를 먹지 않잖아요. 언제 어떤 시점에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

난 어제 체이트에게 이안 카히텐의 병에 대해서 얘기했다. 코렐리아 폴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주제였다.

체이트는 그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추론을 하고 있었다.

“이안 카히텐이 병에 걸렸고 그로 인해 코렐리아 폴린…… 아르키드네의 껍데기와 접선했다면, 훗날 사술을 일으킨 원인 또한 그 병과 관련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악신이 아르키드네라도 이상할 건 없죠.”

아르키드네는 코렐리아 폴린의 껍데기를 쓴 상태로 이안 카히텐의 병을 치료해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헬리아스의 아성을 막기 위해 사술을 제안하고 병의 완치를 대가로 걸었다는 건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데.’

원작에서 이안의 사술을 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코렐리아였다. 스스로 계약한 상대를 버리고 뒤늦게 사태를 수습한다? 완벽한 삽질이잖아.

“그건 말이 안 돼. 아르키드네는 절대 이안과 계약한 악신이 아니야.”

난 단호히 말했다.

“그런가요?”

체이트는 순순하게 내 말에 수긍했다. 원체 내게 큰소리 내지 않는 이였기에 속으로는 계속 아르키드네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원작의 모순점을 따로 설명해 주었다.

역시 속으로는 부정하고 있었던 듯, 그제야 그는 고개를 주억였다.

“아르키드네는 아니군요. ……이 책이 믿을 만한 이야기라면 말이지요.”

“응?”

“이건 코렐리아 폴린이 전해준 책이잖아요. 얼마든지 자기 식대로 위조가 가능합니다.”

그건 또 그렇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만 봐도 아르키드네가 경계하고 있는 존재는 헬리아스지, 우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세계를 지키고자 하고 있다.

문득, 꿈속에서 ‘거래’를 운운하던 이안이 떠올랐다.

‘나는 당신을 담보로 내 명을 챙겼으니까.”’

이안은 그렇게 말했다. 내 몸을 담보로 명을 챙겼다. 악신과 나눈 계약의 대가가 곧 ‘레티시아’였다면…….

“헬리아스야.”

나는 이안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술을 벌였다는 체이트의 가정을 일부 받아들였다.

그 경우, 내 시점에서 가장 의심 가는 대상은 역시 한 명뿐이었다.

“카히텐 대공을 그런 식으로 꼬드길 인물은 헬리아스밖에 없어.”

원작에서 이안은 이미 내 몸을 대가로 헬리아스와 거래를 한 거다. 내가 헬리아스의 숙주가 될 걸 알고 나를 줄곧 피하고, 아이가 태어나지 못할 걸 알고 애정을 주지 않은 거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꿈의 내용이 모두 납득이 된다.

“나쁜 놈…….”

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원작에서 레티시아가 품은 아이가 내 아이도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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