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95)화 (95/140)

내가 울먹이자 체이트는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레티시아?”

그가 가까이 다가와 양손으로 턱을 감싸 올렸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미안.”

나는 그의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원작에 너무 몰입해서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원작과 관련된 꿈을 꾼 탓이지만.

“이안이 계약한 악신이 아르키드네가 아니라면 남은 건 헬리아스뿐이잖아. 그때도 헬리아스는 내 몸을 그릇으로 원하고 있었을 테고, 만약 이안이 그걸 알고도 계약을 한 거라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제 아이를 가진 날 헬리아스에게 바친 거나 다름이 없잖아.”

그게 서러워서…….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인식하면서도, 자꾸만 그 감정이 내게로 전이된다.

부푼 배를 보듬던 꿈속의 손이 내 것이었기에.

“그건 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레티시아.”

체이트가 무릎을 구부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선홍색 홍채가 부드럽게 나를 응시했다.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있잖아.”

“…….”

“앞으로도 그럴 테고.”

덧붙인 말에는 안심하라는 위로보다 더 큰 독점욕이 묻어났다.

나는 애써 숨기려고 해도 드러나고 마는 그의 집착이 기꺼웠다. 그 간절한 마음조차 내 것이었다.

“맞아.”

난 그를 끌어안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너야, 체이트.”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임과 동시에 불안해하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던진 말이었다.

체이트가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말했다.

“그 책, 역시 가짜 같아요.”

“응? 왜 그렇게 생각해?”

“제가 당신을 카히텐 대공과 혼인하도록 놔두었을 리가 없잖아요.”

“…….”

“거기서도 정략혼이었다면서. 그럼 더더욱 그냥 안 놔뒀지.”

“너는 책 속에서 나랑 만나지도 않았어. 내 얼굴도 몰랐을 거라고.”

“몰라도 찾아갔지.”

푸흡, 웃음이 터져서 주먹을 쥐고 입을 막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지만 당신이잖아.”

별도 달도 따 주겠다는 연인의 허황된 속삭임, 내지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이트의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그 어떤 생이든, 우리가 인연이 없었을 리가 없어.”

체이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떤 생이든 내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고.”

그의 말에는 기이한 확신이 느껴졌다. 체이트는 운명론자도 아니고, 감상적인 성격도 아니다. 무슨 의미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그거, 책 속의 인물들이 모두 지금의 우리와 연관이 있다는 의미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었다.

“당신과 이안 카히텐, 헬리아스 황제와 레오넬 헬리아스, 그리고 코렐리아…….”

체이트가 한 명 한 명 이름을 거론했다. 모두 책 속의 인물이자, 현실 인물이었다.

“이해관계든 혈연관계든 연결점이 있어요. 그런데 과연 그 자리에 제가 없었을까요?”

원작에서 내가 별 의미도 없는 엑스트라로 보였다면, 체이트는 중요한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언급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게 그저 서술의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아르키드네가 고의로 체이트를 누락시킨 걸까.

나를 원작의 엑스트라로 만들어 전생의 사건을 숨겨 놓았듯이, 체이트 또한 숨겨진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실례로 그는 코렐리아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일 수가 없지. 코렐리아는 아르키드네 신의 껍데기잖아. 나이도 안 먹는데 무슨 아버지가 필요해.’

새삼 과거의 흑역사가 떠올라 현타가 밀려왔다. 나는 그간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하고 살아온 걸까.

‘존재하지도 않는 코렐리아의 어머니를 찾겠다고 그 난리를 치지 않나, 죄 없는 체이트를 들들 볶고 쫓아내기까지 한 걸 생각하면 진짜…… 아…….’

개쪽도 이런 개쪽이 없다.

하지만 체이트가 코렐리아와 함께 다녔다는 건 원작에서 공인된 사실이지. 아버지라는 표현까지 나왔으니 오해할 만하잖아!

‘……가만있자.’

그렇다면 원작의 체이트는 코렐리아가 아르키드네 신과 다름없다는 걸 알고도 어째서 함께 있었던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

“레티시아, 이 책에 저도 나오기는 했지요?”

체이트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하마터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뻔했다. 나는 뜨끔한 내심을 감추고 대답했다.

“으응, 언급은 있었어.”

그가 코렐리아의 아버지 역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기로 하자.

만에 하나라도 체이트가 내 삽질의 이유를 알게 된다면 쥐구멍에 머리 박고 일주일간 곡기를 끊겠어.

내 두루뭉술한 답에 체이트가 의문을 표했다.

“언급이 있었다? 그랬다면 더더욱 내가 당신을 모르고 지낼 리가 없는데.”

“…….”

“알았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입에 버터를 물었나? 왜 저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해?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흔들리는 나였다. 분명 듣기에도 낯부끄러운 대사가 맞는데…… 나는 왜 또 이딴 식으로 가슴이 뛰는 걸까.

상대가 체이트라서? 물론 그것도 있지.

하지만 사랑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난 본디 항마력의 역치가 상당히 낮은 사람이다. 원래라면 이런 소리, 애인에게 들었어도 본능처럼 등짝 스매싱을 갈겼을 거라고.

버터 바른 고백을 듣고도 오히려 마음이 설레는 이유는 역시…….

‘얼굴……. 얼굴 탓인가.’

내 고양이, 처음 봤을 때부터 세젤예긴 했지.

체이트는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홀리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질투심 많고 속 좁은 사내가 기생오라비라고 부를 법한 얼굴.

눈가에 찍힌 눈물점의 위치까지 완벽하게 매혹적이다.

이런 남자가 일평생과 그 밖의 모든 생을 통틀어 나만을 사랑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심장이 죄는 것처럼 아릿하고 닭살이 오소소 돋을 만큼 짜릿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생, 체이트 하나로 충분히 성공했다.

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흐…….’ 하는 변태 같은 신음을 내뱉자 체이트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음,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거죠?”

“너는 모르겠고 나는 지금 정신 못 차리게 기쁜데. 지금 좀 과분하게 멋진 인생을 사는 중인 것 같거든.”

10년 전에 멋모르고 박아 둔 주식이 어느 날 우량주가 되어 있는 기분. 그래, 딱 그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쓰리스타의 대주주가 되어있는 이 느낌. 미치게 짜릿하다.

‘더는 못 참겠어.’

아까 얼굴로 꼬실 때부터 아슬아슬했지만 이제 진짜로 한계다.

나는 앞서 상상한 대로 체이트의 멱살을 잡아끌고 그에게 물었다.

“체이트, 할까?”

“……응?”

그가 멍하니 눈을 슴벅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당신 제안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이해했어.”

단호하게 긍정했다.

“힘들지 않아요?”

“응?”

“하지만 어제도…….”

“아, 이해 못 했어.”

단호하게 부정했다.

창밖으로 햇살이 반짝거리고 새가 짹짹거리는데 그게 무슨 엄한 소리니.

지금 시간에 그런 거 하면 아침짹으로 퉁치기도 힘들어지니까 사람 난처하게 하지 말고.

“입 맞춰 줘.”

그가 조금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내가 눈썹을 치켜들고 노려보자 이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분부대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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