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방금 레티시아라고…… 하셨습니까?”
안타카스 주교가 입을 헤벌린 채 물었다. 그는 이안의 살기등등한 얼굴을 살피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래.”
이안은 직전의 불쾌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레티시아라면…….”
“그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없습니다!”
안타카스 주교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안이 웃었다.
“역시. 신전에 몸을 은닉하고 있었나 보군.”
“……!”
이런, 유도신문에 바보같이 걸려버렸다!
눈치 없이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안타카스 주교가 이안의 시선을 피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 그런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내 발로 직접 대신전에 가 보면 답이 나오겠지.”
“자, 잠깐!”
안타카스 주교가 그를 붙잡았다.
이안은 오늘따라 인기가 많은 제 소맷자락을 차갑게 응시했다.
“뭐지?”
“그…… 레티시아라는 아가씨를 어찌 찾으십니까?”
“말했잖아. 내 전 약혼녀라고. 그런 여자가 수도에서 변을 당했다는데 응당 확인해 보는 게 도리 아닌가?”
“그게, 그러니까, 그분을 왜 남부에서…….”
”남부에 있다고 예상했으니까.“
”그럼 브링스턴이라는 성은 혹시…….”
“수도의 브링스턴 후작가도 모르나?”
“아뇨, 압니다. 아는데요…….”
안타카스 주교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비웃음이라기에는 비굴하고, 아첨이라기에는 난처한 미소였다.
“그 아가씨는 분명…… ‘전’ 약혼자라고 하셨지요?”
“…….”
“그럼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아닙니까?”
“하하,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이안의 이마 위로 핏줄이 불룩 솟았다.
“혼인을 약속했던 사이가 아무 사이도 아닐 리가 없잖아.”
약속했‘던’. 과거형이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상당히 예민한 반응이 돌아왔다. 안타카스 주교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보자…….
‘전 약혼자면 분명 파혼한 사이지?’
비록 자신은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어 한평생 이성과 연이 없었지만, 통속소설은 한창 시기에 몰래 읽어 보았다.
죽고 못 살던 남녀가 헤어지면 남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던데. 심지어 귀족 간 약혼이면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도 아니지?
그런 사이에 약혼이 깨졌다는 말은 즉.
‘아무 사이도 아닌 거 맞잖아…….’
안타카스 주교가 그를 이상스럽게 바라보았다. 할 말은 많지만 차마 할 용기가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으음.”
그는 그저 침음과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 있나?”
이안의 태도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했다. 누가 보아도 전 약혼자를 찾아온 구질구질한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안이 그 특유의 오만무도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십 년.”
“예?”
“무려 십 년이야. 그녀와 내가 약혼했던 기간이.”
“사제도 아니신 분이 뭐 하러 십 년이나 도를 닦으셨…… 아니, 십 년이나 되셨군요.”
“그래.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지. 우린 그토록 긴 세월을 함께…….”
이안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이었다.
“……했어.”
‘함께하다.’
관용어가 아닌가.
반드시 몸이 붙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이안은 여전히 당당했다.
안타카스 주교는 그를 바라보며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네.’
이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성녀님의 이름에 잠시 당황했던 그는 한층 차분해진 태도로 찻잔을 들었다.
“안타깝지만 그 아가씨는 남부에 계시지 않을 것 같군요.”
동명이인일 것이다. 성녀님이 그 속물적인 브링스턴 후작가의 핏줄이자 카히텐 대공의 약혼녀였을 리가 없다.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수도에서 돌아오며 여자를 하나 데려오지 않았나?”
“하하, 정보력이 좋으시군요. 예, 아주 귀하신 분을…….”
“그 여자가 내가 찾던 약혼자다.”
주르륵-
안타카스 주교의 턱 밑으로 찻물이 흘러내렸다.
“예……?”
이안이 갑갑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설명했다.
“아르키드네 대주교, 체이트 폴린이 브링스턴가의 화를 피할 수 있도록 그녀를 남부로 데리고 온 거라고.”
“……?”
성녀님이 브링스턴 후작가의 사람이라고? 정말로?
안타카스 주교는 브링스턴 후작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전에 거액의 기부금을 바쳐 온 가문이니 공금을 꾸준히 착복해 온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신전에는 돈으로 환심을 사는 동시에 황가와 대공령 사이에서 혼맥 줄다리기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었다.
본인도 그다지 당당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본래 남의 흠은 제 얼룩보다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신의 종자 되는 입장에서 브링스턴가는 중요한 돈줄인 한편, 신앙과는 거리가 먼 속물 가문이었다.
황제의 약혼녀, 셀레나 브링스턴의 황자 시해 시도로 인해 브링스턴가가 풍비박산 났다고 했을 때도 그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 버러지 같은 가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신도의 도덕심 향상을 위해 더 이로우니까.
뭐, 돈도 충분히 받을 만큼 받았고.
그런데 그 흉물 가문의 핏줄이…… 다름 아닌 우리 성녀님이라고?
아르키드네 님이 인정하신 그분이?
“그럴 리가 없어…….”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 ……설마 몰랐던 건가?”
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신전의 사제라도 수도 사정을 그렇게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
이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안타카스 주교는 물정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제치고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었지.
물론 신전 하나를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여러 장소를 직접 돌아다닐 수도 없고, 사제 된 입장에서 귀족들의 사교에 참여할 수도 없지만.
‘귀는 늘 활짝 열려 있었지.’
이번 금언령과 금족령의 계기가 된 드미트리와 셀레나의 사건도 자초지종을 모두 알고 있던 그였다.
드미트리가 어디 가문의 사람인지, 얼마나 광적인 헬리아스의 신도인지.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해 냈다.
그런 자신이 성녀님의 출신을 몰랐다? 레티시아라는 이름을 듣고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정도로 허술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가 레티시아 브링스턴이라는 생각을 여태 하지 못했다는 건…….
‘아.’
순간, 낯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낯선 여자를 데리고 신전으로 돌아왔을 때.
젊고 잘생긴 사내와 그가 데려온 아름다운 여인. 누가 보아도 미심쩍은 조합이었다.
여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신전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안타카스 주교는 체이트 폴린에게 몰래 다가가 속삭였다.
‘저 여인을 데려오시면 어떡합니까!’
‘응?’
‘레티시아 브링스턴 맞지요? 이번에 멸문했다는 브링스턴 후작가의 장녀 말이에요.’
‘아, 알고 있었어요?’
‘드미트리를 심문한 게 바로 접니다. 외관이 셀레나 브링스턴과 판박이잖아요.’
‘판박이는 아닌데.’
‘저, 저 머리 색! 혈육인 건 확실하지요?’
‘뭐, 그래요. 맞아요. 당신은 금세 알아챌 것 같았어요.’
체이트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내가 그래서 워프를 안 쓰고 왔지.’
그리고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그 뒤에는…….
뭔가, 자연스럽게 여인의 존재를 납득해 버린 것 같다.
안타카스 주교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르키드네 대주교……! 내 기억을 봉인했구나!’
하지만 그는 대주교와 성녀의 밀회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는 건 더는 그녀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인가?
‘그런 생각이었다면 정확하다…….’
아르키드네 신을 섬기는 입장에서 신탁의 성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밀회를 직접 목격하고도 그 모든 사실을 함구하고 신전으로 돌아온 거지.
마음 같아서는 분통이 터져서 당장 아르키드네 대주교에게 가서 따지고 싶다.
물론 가서 따진다 한들, 그는 뻔뻔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제 얘기를 귓등으로 듣고 넘기겠지만.
이젠 절로 상상이 간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아, 이제 기억나셨습니까? 어쩌다가요?’ 하고 태연히 묻는 모습이.
“혼자 찻잔으로 쇼를 하더니 이제는 혼자 화내는군. 혹시 정신에 문제가 있나?”
그가 갑자기 씩씩거리자 이안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차마 외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발설하지도 못하고 그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아가씨는 안전히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걸 인정하는군. 내가 더 확실히 보호할 수 있어. 약혼자였으니까.”
그놈의 약혼자, 약혼자, 약혼자!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안타카스 주교가 인상을 팍 쓰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깔고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전하.”
“아르키드네 대주교 때문인가?”
“제가 무슨 그 사람 하수인인 줄 아시나 본데……!”
“아냐?”
“…….”
울컥해서 반박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안타카스 주교는 십 년은 더 늙은 얼굴로 말했다.
“대주교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레티시아 님은 이제 저희 신전의 귀하신 분이십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예.”
안타카스 주교가 턱을 바싹 들고 대답했다.
“그분은 아르키드네 님의 가호를 받은 성녀님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