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하.”
긴 침묵 끝에 안타카스 주교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저기, 무슨 말씀이라도.”
이안은 대답에 앞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차향을 한번 들이마신 뒤,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독은 없군.”
“네?”
“환청은 아니란 거지.”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혹시 실없는 농담을 즐기나?”
“제 성향을 물으시는 거라면 제법 진중하고 근엄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군. 실없는 농담을 즐기는군.”
이안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농으로 한 소리겠지?”
“아뇨, 저는 정말로 진중하고 근엄…….”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성녀라는 얘기 말이야.”
“아.”
안타카스 주교가 두 주먹을 맞부딪혔다.
“진심으로 한 소리입니다만.”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시켰나? 그렇게 말하라고?”
“그러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분의 하수인이……!”
안타카스 주교가 입을 다물었다. ‘그분’이라고 언급한 시점부터 이미 반쯤 굽히고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
……됐다. 재능 차이를 이제 와 나이로 극복할 수도 없으니까. 싹수 노란 어린애를 윗사람으로 모시게 됐다면 이 또한 신의 뜻이지.
안타카스 주교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층 더 확고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직 공언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레티시아 님은 아르키드네 신전의 성녀가 맞습니다.”
이안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그녀에게서 성력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어.”
“예, 과거에는 평범한 여성이셨으니까요.”
과거에는 평범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비범해졌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이안이 코웃음 쳤다.
“성력은 천부적인 힘이야. 신체가 성장하면서 그릇이 다소 커질 수는 있어도 하루아침에 없던 성력이 생길 수는 없지. 주교인 그대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물론 그렇죠. 보통은 말이죠.”
안타카스 주교는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일반적으로는 그게 정설이긴 하지.’
하지만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경우가 다르다. 신탁의 계시 자체가 ‘각성’이라는 단어로 해석되었으니까.
뭐든 예외는 존재하는 법. 그 예외를 직접 공언한 것은 다름 아닌 아르키드네의 신탁, 신의 말씀이었다.
“아르키드네 님이 친히 선택하신 겁니다. 그래서 레티시아 님은 평범한 인간으로 나셨음에도 비범한 기운을 얻어 성녀로서 새로이 탄생하신 거지요.”
“무슨 사이비 광신도처럼 말하는군.”
“미치진 않았지만 일단 독실한 신자긴 합니다만.”
“…….”
이안은 말없이 탁자를 두드렸다. 더 부정할 의지는 없는 듯했다. 그저 골몰할 뿐.
“성녀라…….”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여자가 성녀……?”
홀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내 작게 피식거린 그가 안타카스 주교를 향해 물었다.
“아르키드네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나?”
“……!”
직설적인 힐난에 안타카스 주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 지금 제 소재의 신전에서 아르키드네 님을 모욕하신 겁니까? 그분은 완전무결한 분이십니다!”
“모욕이라니. 당치 않지.”
이안이 흥분한 그를 손짓으로 진정시켰다.
“그대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건지, 그걸 묻고 있는 거야.”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 말대로 ‘완전무결’한 아르키드네가 친히 한 여인을 성녀로 삼았다면…… 왜 하필 레티시아지?”
“……?”
“그녀의 가문인 브링스턴은 신앙과 거리가 멀어. 지극히 속물적이지. 수도 귀족이니 오히려 가깝다면 헬리아스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안타카스 주교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신앙심으로 따지자면 레티시아라고 다를 바는 없었을 거야. 내가 봐 온 그녀는 신자와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어.”
“…….”
그것도 알고 있다.
성녀라는 사실을 떼놓고 보자면 신자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신전을 욕되게 하는 수준이지.
안타카스 주교는 마지못해 그 사실을 침묵으로 인정했다.
이안이 쐐기를 박듯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도 하필 그녀를 골랐다면, 신앙은 애당초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건데. 그럼 달리 무슨 연유가 있었을까?”
“그건…….”
주교가 대답을 궁싯거렸다.
신탁이 현실로 이루어졌고, 진정한 성녀가 눈앞에 있다는 데 정신이 팔려서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는 쪽이 더 타당하겠지.
그가 머뭇거리자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신앙에 눈이 멀어 미처 깨닫지 못했나 보군.”
“……저는 그저 아르키드네 님의 뜻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거기에는 이유도 의심도 없습니다.”
“참된 신자로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된 신자치고 돈을 심히 좋아하긴 하지만.”
“……!”
아니, 어떻게 알았지!
“모를 리가 있나. 그렇게 대놓고 빼돌렸는데.”
이안이 혀를 끌끌 차며 턱을 들었다. 주교의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맺혔다.
이안으로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근래에 자신의 전 약혼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에 비하면 말이지.
그가 팔짱 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그 천방지축인 여인이 성녀라……. 제법 충격적이었어.”
브링스턴 가문이 풍비박산 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들은 바가 없는 이야기였다.
중부와의 연결로가 단절되면서 북부의 정보력이 떨어진 건 분명하다. 역시 무리하면서까지 남부를 찾은 건 여러모로 필수불가결한 결정이었어.
그는 저 좋을 대로 판단을 마치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착복을 들킨 후로 눈치만 살살 보던 안타카스 주교가 엉거주춤하게 따라 일어섰다.
“가, 가시게요? 어디로요?”
“어디긴.”
당연히 레티시아 브링스턴과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있는 곳, 대신전이다.
“호위할 사제는 기민하고 능력 있는 자들로 부탁하지. 어느 정도 무학을 익힌 자라면 더 좋고.”
결국 성녀님을 앗아가겠다는 건가! 대체 왜? 안타카스 주교가 갑갑한 투로 외쳤다.
“그러니까 레티시아 님은 이제 신전의 성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예?”
“왜? 내가 그녀를 억지로 압송해 가기라도 할 것 같아?”
단신으로 와서 분란을 일으켜서 뭐 하겠어? 이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그러면…….”
“소재와 처한 상황은 충분히 알았어. 어찌 되었건 그녀는 안전하다는 거군. ……아르키드네 대주교와 함께 말이야.”
이안이 비뚜름한 미소를 입에 걸고 말했다.
“이제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외교적인 대화를 좀 해 보지.”
“아, 그럼 지금이라도……!”
“그대랑?”
“……아.”
이제 정치적 회담을 가질 건데, 그게 너는 아니고.
‘이건가.’
자신이 그 급은 아니라고…….
‘대충 그런 뜻인 건가…….’
안타카스 주교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물었다.
“그럼 저희 신전에 먼저 찾아오신 이유는……?”
이안이 턱을 매만지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좌표가 잘못 찍혀서.”
“아.”
주교의 로브가 어깨 아래로 스르륵 내려갔다.
“방비를 단단히 해 놨더군. 덕분에 들어오는 데만도 꽤 애를 먹었어.”
“워프 말씀이신가요? 그건 저희 권한 밖인데…….”
“신전 측이 막아 놓은 게 아니라고?”
“예. 최선을 다해 경계하고는 있습니다만, 저희 능력으로 그 정도 방어선을 구축하긴 어렵습니다.”
“그럼 아르키드네 대주교인가? ……아니, 그도 단신으로 장기간 그만한 힘을 내기는 힘들 텐데.”
미간을 좁힌 채 예리한 시선으로 밖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내 걸음을 돌렸다.
“뭐, 직접 가 보면 알겠지.”
안타카스 주교가 그의 등을 향해 애처롭게 손을 뻗다가 주먹을 쥐고 외쳤다.
“저, 저기!”
“음?”
“그…….”
주교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 자금줄에 관해서는…… 대주교님께는, 그러니까…….”
“아하.”
이안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조소를 입에 걸었다.
“걱정하지 마.”
“아……!”
주교의 환해진 얼굴을 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 작자라면 진작 알고 있었을 테니까.”
“……!”
안타카스 주교의 황망한 표정을 끝으로 이안은 신전을 나섰다. 사제 몇 명을 골라서 나오자, 죽다 살아난 제스가 졸래졸래 달라붙었다.
“저, 오늘부로 신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는 치료 사제의 능력에 감탄한 듯했다.
이안은 늘 그렇듯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제 할 말만 뱉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대신전에 있다더군.”
“아, 역시. 전하의 예상은 빗나가지를 않네요.”
“성녀가 됐다던데.”
“아, 역시 전하의…… 예?”
아첨이 입에 붙은 제스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번쩍 떴다.
“누가요? ……브링스턴 영애가요?”
“그래.”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이안이 차가운 실소를 흘렸다.
“전에는 결혼 정보 회사를 통해 얼굴을 내밀더니 이번에는 멸문 후 성녀라. 재회 시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군.”
“……그러게요.”
제스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영애…… 성녀라기에는 조금…… 그, 조금…….”
“독특하지.”
“네.”
“괴팍하고.”
“그렇죠.”
“일반인이기도 했고.”
“아, 그러고 보니.”
일반인이었다는 게 제일 마지막에 떠올랐다는 점에서 레티시아는 성녀와 심히 거리가 멀었다.
“그분이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는지……?”
노숙자 안부 묻듯이 성녀 안부를 묻는 제스를 일별하며, 이안이 눈살을 좁혔다.
“그게 제일 의문이지.”
이안은 많은 이들이 신앙과 애정에 눈이 멀어 흐린 눈으로 바라본 현실을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왜 하필 그녀였을까.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