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00)화 (100/140)

로체의 귀를 잡고 들어간 곳은 주택가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남부에도 이런 곳이 있었네.”

목조로 감싼 벽면에 파릇파릇한 덩굴식물을 두르고 곳곳에 화분을 배치한 인테리어가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옛날 생각난다.”

로체와 투덕거리며 체이트에게 헛된 교육을 일삼던 그 시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델린 영지에서 지내던 게 사실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직감한 탓이겠지.

‘카히텐 성에 있을 땐 그곳이 엄청 그리웠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어.’

체이트가 곁에 있었던 덕택일까? 나는 어쩌면 그 시절보다도 체이트와 함께하던 순간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눈에 띄는 데로 대충 찾아서 들어간 카페가 내 카페와 닮았다니,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이쯤 되면 카페 사장이 진짜 내 운명이었을지도.

“어디의 누가 내린 커피와 달리 여기 음료는 정상이네요.”

“…….”

쟤 진짜 죽일까.

나는 초 치는 발언을 일삼는 로체의 귀를 한 번 더 잡아당겼다.

“아야야.”

“사람 성질 건드리지 말고 얘기해. 돈 언제 갚을 거야?”

이번에는 봐줄 마음이 없었다. 누구든 한 번은 얘 정신머리를 고쳐 놔야 한다. 그래야 죽기 전에 철이 들겠지.

“제가 돈이 어디 있습니까.”

“어쭈, 너 당당하다? 돈도 없는 게 보증금 빼서 사기꾼 배나 불려 주고 있어?”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고 그 양반이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아주 청산유수로…….”

“자꾸 어디서 개가 짖네…….”

“……잘못했습니다.”

로체가 풀 죽은 꼴로 고개 숙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이 절로 움직였다.

“너…… 혹시 코렐리아한테 순순히 협조한 것도 나 때문이 아니라 돈 받고…….”

“무슨! 제 사랑을 폄하하지 마세요!”

아, 그건 아닌가?

“지원금 조금밖에 안 받았습니다!”

“…….”

백 년의 사랑이 이렇게 부질없이 보이는 건 또 그거대로 새롭네.

“하지만 그 정도 돈은 당시 제 능력으로 얼마든지 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든지 쓸 수 있었겠지.”

나는 살면서 로체가 돈을 모으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돈에 눈이 돌아가 있는 주제에 막상 손에 금전이 떨어지면 이상한 데 써먹기 일쑤지.

엘프도 노화가 늦어서 그렇지, 나이를 먹으면 늙긴 늙는다던데. 나중에 외모로 먹고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대체 어쩌려고 저럴까?

지금처럼 성력이 만성한 시점에 마력으로 돈벌이가 변변하지도 않을 텐데.

나는 진심으로 로체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애정과 걱정을 가득 담아 그에게 얘기했다.

“이번 달 내로 못 갚으면 인생 불편해질 줄 알아.”

“……무슨 성녀가 대부업체 바지사장 같은 말투를 씁니까.”

어이없어. 내가 성녀 시켜 달라고 신전에 가서 배 까고 드러누웠나? 지들이 알아서 갖다 앉혔지.

나는 원래 아르키드네와 밤톨만큼도 연이 없던 사람이다.

“억울하면 너도 빽 얻고 낙하산으로 취직하든가.”

“……좋아요.”

로체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

“그럼 저 취직 좀 시켜 주세요, 레아 양.”

……을 리가 없다.

“뭐?”

“지금 제 주변에서 제일 큰 빽이 레아 양인데요.”

“너 신전 올 수 있어?”

“에이, 저 거기에서 현상금 걸렸던 거 아시면서.”

“그러니까. 난 신전 아니면 힘쓸 수 있는 데가 없는데?”

“아…….”

안타까워하지 마라. 얄미우니까.

날로 먹는 습관이 아주 몸에 붙었지?

“정직하게 일해서 갚아. 너 재주 많잖아.”

내가 지금까지 로체에게 들은 그의 직업만 해도 한 손가락이 꽉 찼다.

“일……. 일이라.”

로체는 그제야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레아 양은 절 버린 것 같고.”

안 버렸다. 그저 로체한테 대가 없이 뭔가를 쥐여주는 게 공부 안 하는 애한테 참고서 사 주는 격이라는 걸 깨달은 것뿐.

“흐음. 점이라도 다시 쳐 봐야 할까요?”

“점?”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그랬었지. 점이라면 자기도 볼 줄 안다고.

“타로 말하는 거야?”

“네. 예전에 어떤 귀부인한테 배웠거든요.”

“오…….”

타로라. 로체의 말빨이라면 꽤 잘 먹힐 것 같긴 하다.

문제는 여기가 신앙이 넘치는 남부라는 거지.

“그러니까 사이비로 낙인찍혀서 신전 지하로 잡혀가고 싶다는 거지?”

그럴 거면 그냥 지금 신전에 가서 정체를 밝혀 보는 게 어떨까. 길게 끌 것 없이 지하에 빈자리 하나 내어주고 평생 먹여 살려 줄 것 같은데.

“하하, 그러니까 여기서 써먹을 능력이 없다고 했잖아요.”

로체가 머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면 여기서 알바 할까요?”

“여기? 이 카페?”

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말했다.

“이 카페 구인 공고 있었나? 난 못 봤는데.”

“저도 못 봤습니다.”

“어?”

뭐지? 뭔데 당당하지?

“저런, 아직도 모르겠어요?”

“……뭘?”

“사람이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가 새초롬한 손짓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저, 로체입니다.”

“응. 어쩌라고?”

“잘생겼죠.”

“……그런데?”

“레아 양, 잘생긴 사람은 항상 수요가 있어요.”

“…….”

미친 소리지만 검증된 사실이라서 당장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또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식객처럼 눌러앉게?”

“그간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좀 서운해지려고 하네.”

야, 네가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사기당한 지 반나절도 안 지났다.

“서운하고 자시고, 생각이란 걸 해 봐. 내가 너한테 빚을 지우는 게 얼굴로 때우려는 네 버릇을 고쳐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로체가 시무룩해졌다.

“레아 양 꼰대 같아요.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면서…….”

“그러니까 한참 어린애한테 충고를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 현실이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오.”

박수가 절로 나왔다.

얜 글렀어. 우리 할머니…… 아니, 레티시아 전생의 할머니 되시는 분이 얘랑 짝짜꿍하지 않은 건 비단 종족의 벽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라.

“그냥 돌아갈래?”

“제가 어떻게 레아 양을 두고.”

“너 진짜 내가 물주로 보이는구나?”

“앗…….”

들켰다는 표정 하지 마! 나도 상처받아!

“농담입니다.”

“늦었어…….”

나는 조금 씁쓸해졌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

돈 얘기에 지쳤는지, 로체가 대놓고 화제를 전환했다.

“…….”

나는 잠시간 그를 노려보다가 품에 끼고 있던 책을 꺼냈다.

“이거 때문이야.”

“아, 그때 제 집에 있던 책.”

어디가 네 집이야? 울컥해서 한마디 얹으려다 꾹 참았다.

“이건 원래 내 게 아니었어. 코렐리아가 놓고 간 책이지.”

“……코렐리아 폴린이 말입니까?”

로체의 표정이 일변했다.

장난기가 싹 가신 얼굴로 그가 물었다.

“그녀가 어째서 이런 걸?”

“이 책에는 우리의 미래가 적혀 있어.”

“미래?”

“아니, 미래는 아니지. 미래였을지도 모를 만약의 상황?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원작의 서술은 내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건 역시 체이트가 코렐리아의 아버지로 묘사된 부분이겠지.’

그러니까 미래로 가정하기에도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여기엔 나와 체이트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어. 나는 이게 내게 주는 단서이자 헬리아스에게 대항하기 위한 그녀의 계획 중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그녀가 두고 간 책이 맞는다면 레아 양이 생각하시는 바대로겠죠.”

로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단서는 좀 잡았나요?”

“…….”

나는 침묵으로 부정했다.

내 머리와 내 눈치로 이걸 알아보라고 던져놓은 코렐리아가 잘못했다. 그냥 쪽지를 적어서 줄 것이지, 십자말풀이도 젬병인 사람한테 수수께끼를 주면 어떻게 풀라고.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응.”

나는 순순히 로체에게 책을 넘겼다. 그가 신중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내 책장을 덮고 말했다.

“외계어가 적혀 있는데요.”

“아, 미안. 봐도 모를 거란 얘길 안 했네.”

“레아 양은 이걸 알아보신 건가요?”

“응.”

“……언어에 재능이 출중한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나이에 비해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사실 문맹률 제로에 가까운 나라의 말이라 당연히 읽을 수 있었을 뿐이지만…… 대놓고 꼽주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어쨌든 여기에 레아 양의 미래와 연관된 내용이 적혀있다는 거죠?”

“그래. 다른 부분도 있지만. 현실과 비교하면서 보면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져와 봤어.”

“흐음. 이런 얘긴 전해 듣지 못했는데…….”

로체가 읽지도 못하는 책을 괜스레 흔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저도 나옵니까?”

“아니.”

원작에서 로체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네 이름은 없었는데…….”

“그래요? 이상하네. 제가 레아 양이랑 엮이지 않는 미래였을까요?”

“…….”

정보 값이 불분명하니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긴 해. 대체 왜 로체는 등장하지 않은 거지?’

로체와 내 전생의 관계성을 생각해보면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원작에 등장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로체의 이름은커녕 엘프라는 표현조차 원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맞아. 이상하지.”

나는 책의 후반부를 넘기며 의문점을 되짚었다.

코렐리아가 아르키드네의 껍데기가 맞는다면 그녀가 로체를 이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로체가 아닌, 다른 인물로 등장했을 가능성은 없나?’

원작에서 나오는 인물 정보는 왜곡되어 있다. 그렇다면 로체 또한 왜곡된 정보 속에서 이름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로체라고 유추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은 남아 있을 거야.

그게 뭘까?

“……정보상.”

문득 그가 떠올랐다. 내가 원작을 읽고 찾아 헤매던 정보상.

그는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며, 갑작스럽게 코렐리아의 앞에 나타가 그녀를 원조했고, 타로점에 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무지 밝혔어!’

로체다.

로체가 분명하다.

나는 그가 나오는 파트를 찾아 읽으며 다시금 그 사실을 확인했다.

정보상은 코렐리아에게 도움을 주고 이따금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당신에게 진 빚은 없어. 그러니 돈은 제대로 받아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