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05)화 (105/140)

저 섬뜩한 미소와 사람 은근히 열 받게 하는 말투.

내가 아는 그놈이다.

하르온 헬리아스 황제…….

아니, 그에게 인간의 이름은 이제 무의미했다.

나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헬리아스.”

“폐하라고 해야지.”

폐하는 무슨. 당신, 사실은 인간도 아니잖아.

“이, 이거…… 놓아……!”

나는 그로부터 손을 빼내려 성력을 개방시켰다.

하지만 상대는 신의 영혼이 깃든 몸. 처음의 마부처럼 쉽사리 나가떨어지지는 않는다.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렴. 너 찾는다고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놔!”

“그날 이후로 여기 들어오는 게 얼마나 팍팍해졌는지 너 아니? 내 형제들은 하여간 과보호가 심하다니까.”

초입새라 겨우 비집고 끼어들었지. 마부의 탈을 쓴 헬리아스가 혼자 재잘거렸다.

여유작작하게 하소연을 늘어놓는 폼이 기가 막혔다. 남이 보면 저쪽이 내 편인 줄 착각하겠어.

“손 놔.”

“너라면 놓겠니?”

“…….”

성력은 계속해서 개방하고 있다. 체이트가 내게 걸어 둔 신성 또한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통각 자체가 기능하지 않는 존재 같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나로 말하자면…….

난 마치 돌에 깔린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실제로 그 정도에 불과하겠지. 그에게 필요한 건 나 자체가 아니라, 나의 허물 뿐일 테니까.

“보아하니 각성도 무사히 마쳤고. 기억도 꽤 돌아온 듯하고. 이제 정말 그릇이 될 준비를 다 마쳤구나.”

그의 뻔뻔한 발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누구 마음대로? 내 허락도 안 받고 내 몸을 차지하겠다고? 꿈도 꾸지 마.”

헬리아스가 제아무리 강한 절대자라고 해도 현재의 나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는 황제나 헬리아스 황가의 사람이 아닌, 평범한 마부였다.

본래라면 나를 이기지 못했을 상대.

그릇이 작으니 능력의 발현 또한 그 한계가 명확하겠지.

‘사력을 다한다면 맞서 싸울 수 있어. 긴장하지 마.’

지금의 나는 그때의 무력했던 나와는 달라.

“너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헬리아스가 내 속을 읽은 양 비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드미트리의 몸으로 너를 앗아가지 못한 건 네가 아르키드네의 심부에 있기 때문이었어. 그만큼 방어가 철저했으니. 그 나약한 그릇으로 뚫어내기란 쉽지 않았지.”

“……?”

“널 각성시키는 것만이 당시 내 목표였단다.”

“……그러니까, 정말로 나를 상대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해서 도망친 건 아니다?”

“이런 쪽으로 생각이 잘 돌아가는 거 보면 기본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성격이 문제인 거니?”

사람 짜증나게 하네. 내가 신한테까지 성격으로 까이며 살아야 하나. 인생 팍팍하다 진짜.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내 몸은 못 내어줘.”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힘껏 그를 뿌리쳤다.

타앗!

손목을 틀어쥔 손에 일순이지만 힘이 풀렸다. 지금이야!

타다다다닥!

나는 얼른 뒤로 물러서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어차피 여기서는 나도 무리야.”

그는 제 손목을 매만지다가 툭툭 털어내고 나를 돌아보았다.

“수도로 가자.”

가겠냐? 난 냅다 줄행랑부터 칠 생각이었다.

헬리아스가 나를 뒤쫓아 온다. 등 뒤가 뜨겁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가 내 옆으로 바싹 따라붙었다.

“헉!”

“같이 가자니까. 응? 편히 살게 해 줄게.”

웃기고 있네. 편히 죽게 해 주는 거겠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니?”

껍데기가 강해서 뭐 하나. 내 혼이 없는데.

원래도 끌리지 않는 제안이지만 전생의 인과를 어느 정도 깨우친 지금에 와서는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설득이 먹히지 않자 그가 혀를 끌끌 찼다.

“역시 이런 머저리들처럼은 안 되나.”

그가 제 몸을 한번 내려다보고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옷깃이 잡힐 것 같다. 이제 와 도망은 역시 무리였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싸우자.’

처음 결심한 대로.

난 몸을 돌렸다. 곧장 그에게 날카로운 형태의 신성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공격을 피해 버렸다.

“힘은 좋은데 말이야. 자세가 잘못됐어. 운동 싫어하지?”

와중에 훈수까지.

“……윽!”

개미 가지고 노는 어린애처럼 굴던 그가 내 머리채를 쥐었다.

“장난은 이쯤하고.”

나는 머리칼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입으로 들어와 기침이 절로 나왔다.

“콜록…….”

“귀한 그릇이니 온전하게 가지고 싶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가 서늘한 눈빛을 하고 중얼거렸다.

“어디 하나쯤 부러뜨려도 어차피 금방 붙을 테니까.”

“……!”

그의 갈퀴 같은 손이 내 목을 향해 다가왔다. 설마 목을 부러뜨리겠다고?

‘미, 미친, 사람은 그러면 죽어!’

나는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두 손을 가위표로 만들어 방어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라면 분명 금세 내 저항을 뚫고 날 제압해 버리겠지.

‘어, 어, 어쩌지?’

아까부터 성력을 줄줄 흘린 탓에 힘이 고갈된 상태다. 나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끌려가나? 이렇게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해 보고?

‘미안해, 체이트.’

내가…… 내가 너무 생각이 없어서. 눈치도 없고 바보 같아서.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를 믿어 줬기에 날 자유롭게 놓아 둔 걸 텐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어.

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신전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체이트. 언제까지라도 나를 기다릴 그 녀석을…….

‘혼자 둘 수는 없는데.’

나 없으면 그 녀석은 죽는 날까지 나를 찾아다닐 텐데.

……기다릴 텐데.

“흐윽!”

끝끝내 헬리아스가 내 팔을 밀어내고 목을 잡아챈 순간.

파앗!

광휘가 일며, 하얀 빛들이 뭉쳐 허공에 고대의 문자들을 그려냈다.

‘이건…….’

워프진이다.

‘어째서 지금 워프진이?’

내가 그리지도 않은 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망설이거나 의심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워프 진을 향해 남은 성력을 전부 쏟아 넣고 주문을 외웠다.

“이런……!”

헬리아스의 당황이 느껴진다.

“아르키드네? 또……!”

그가 짜증스럽게 사라져가는 나를 붙잡으려다 뭔가 깨달은 듯 실소를 흘렸다.

“아니, 그 녀석이군. 그…….”

싸아아아아-

육신과 혼이 긴 통로를 거쳐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나는 워프 특유의 극심한 어지럼증에 눈을 감았다.

“…….”

발끝이 다시 땅에 닿은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풍경과 덥고 습한 남부의 공기.

남부의 초입새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

“설마.”

그림으로만 봤던 신전이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대신전보다는 작지만 그 어떤 사원보다 크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고대의 흔적.

대륙의 최남단, 안타카스 지부의 신전이었다.

‘돌고 돌아 목적지 도착이라니.’

어이없네.

“하하…….”

나는 흙을 뒤집어쓴 머리를 털어내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어째서 하필 내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워프진이 나타났고, 그 목적지가 안타카스 신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곳에는 내 편이 있다.

꼬장꼬장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주제에 속물적이기까지 한 노인이지만, 안타카스 주교는 그래도 나와 체이트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살았다…….”

어서 가서 안타카스 주교에게 헬리아스 측의 기습 사실을 알리자. 대신전에 연락도 넣고, 체이트에게도…….

“아…….”

체이트.

울컥, 눈물이 났다.

‘진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이 소식을 들으면 체이트는 또 자신을 자책하겠지.

‘차라리 나를 비난했으면 좋겠다.’

내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헐뜯고 손가락질하면 그나마 마음이라도 편해질 텐데. 그는 절대 내게 화살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평생 밖에 나오지 말고 처박혀 있으라고 해도 얌전히 들을 수 있겠어.’

난 진짜 혼자 나다닐 자격이 없다.

“흐읍.”

걸음이 빨라질수록 시야가 흐려졌다. 체이트에게 미안해서. 아니, 그만이 아니라 로체와 신전 사람들에게도…….

날 걱정한 사람들에게 너무 민폐만 끼친 것 같다.

‘자만할 군번도 안 되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멋대로 나다닌 거야.’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더는 약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믿음이 아니라 오만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일 뿐이었다.

“진짜 바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일단 추스르자. 여기서 질질 짜면서 들어가면 그냥 바보에서 멘탈 약한 바보가 될 뿐이야.

눈물을 닦아내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어…….”

안타카스 신전 입구의 사제에게 내 방문을 알리려던 그때.

“……레티시아 브링스턴?”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귀에 잘 익지도 않은 성씨까지 덧붙여서.

“누구…….”

뒤를 돌아보자, 남부에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외양의 미남자.

이안 카히텐.

나의 전 약혼자이자 흑막……이라고 생각했던 남자.

그 또한 나를 보고 ‘왜 지금 여기에……?’ 하며 의구심을 표했다.

자연히 내 쪽으로 다가오던 그의 발걸음이 내 얼굴을 가까이 할수록 점차 느려졌다.

그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진다.

이안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내게 물었다.

“꼴이 왜 그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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