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물음. 딱 이안 카히텐다웠다.
‘내 꼴이 말이 아니긴 하지.’
레티시아는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드레스 밑단은 형편없이 찢겨 발목을 훤히 드러내고 있고, 앞쪽으로 엎어진 탓에 가슴팍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쩝.”
그녀는 대답 대신 민망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제대로 답해 주지 않을 걸 알았는지 이안은 금세 얕은 호기심을 접었다.
“여긴 무슨 볼일이야?”
인사를 생략하는 건 여전했지만.
“그러는 전하야말로 왜 여기 계세요?”
“……볼일이 좀 있어서.”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제스의 입가에 흐린 미소가 피었다.
‘차마 볼일이 눈앞에 있다고는 말씀하지 못하시는군.’
역시 빛 좋은 개살구, 무늬만 좋은 숙맥 나르시시스트. 솔직해져야 할 때랑 아닐 때를 구분을 못해.
“남부에요?”
레티시아의 눈에 의문이 잔뜩 서렸다.
“그래.”
“지금 여기 오기 꽤 힘들었을 텐데…….”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이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녀 또한 중부의 길목이 막힌 걸 알고 있다. 그 일련의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하지만 이렇게 해맑게 나오면 취조할 마음도 사라진다.
그래, 이게 레티시아 브링스턴이었지.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리려다, 바닥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가 눈을 한차례 감았다 떴다. 어느새 은근하게 올라간 미소는 써늘한 낯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당신이야.”
“네?”
“내가 남부로 온 가장 큰 이유.”
이안이 레티시아를 보며 말했다.
“당신 때문이라고, 레티시아 브링스턴.”
조금은 마지못해 털어놓는 느낌으로.
“……저를?”
레티시아가 손가락으로 제 턱을 가리켰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왜?”
“그야 당신 사정이 난처하다는 얘길 들었으니까.”
둘을 관망하던 제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 말했다!’
저 숙맥이 웬일이지?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게 내 취미거든.”
이안이 씨익 웃으며 레티시아와 눈을 맞췄다.
“물론 받을 건 다 받고.”
“…….”
불현듯 제스는 제 이마를 세게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잘해 놓고 꼭 저렇게 끝에 가서 초 치지.
레티시아 또한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시큰둥하게 팔짱을 꼈다.
“제 사정은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의외로 뒤끝이 있으시네.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표정을 다 읽어 놓고도 이안은 모른 척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당신의 쓸모없고 쓸데없이 넓은 인맥 중 하나가 말해 주던데.”
이안이 델린 남작 부인의 편지를 떠올리며 실소했다.
“제법 충격적인 소식이어서 말이야.”
“…….”
“당신이 제 발로 성을 떠난 후, 많은 일들이 있었더군. 어느 순간 황실과 신전의 관계가 경색되었고…….”
이안이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집안은 멸문했어.”
“아, 그게.”
레티시아가 조금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걱정하셨다면 이거 참 죄송하게 됐…….”
“누가 당신 걱정을 했대?”
팝콘 씹어먹듯이 둘을 보던 제스가 입매를 꾹 누르며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또, 또! 또 삐딱선 타네!’
할 말은 많지만 참는다. 보좌관의 철칙이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그리고 관객처럼 자리를 지켰다.
레티시아는 다행히 제스의 다채로운 변화를 알아챌 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이안의 말에 대답하는 것만도 벅찬 상태였다.
“아, 실례했어요. 잠시 주제넘게 착각을 조금. 뭐, 실리가 제일 중요한 대공 전하께서 예까지 오신 이유가 고작 저 따위를 걱정해서는 아니시겠죠. 거래할 대상이 멀쩡해서 참 안타깝네요.”
태연하게 건넨 말에 이안이 되려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더 이상 이 논제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무리해가면서까지 남부에 온 이유는 그 자신도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으므로.
“당신이 멀쩡한 건 알겠어. 하지만 확실히 남부행은 가치가 있긴 하더군. ……마침 여기, 이 신전에서 내가 아주 이상한 얘기를 들었거든.”
그가 은근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네? 어떤?”
“당신이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으으으으음.”
레티시아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게 말이죠. 전하 말마따나 정말 많은 사정이 있었거든요.”
“그 사정이 뭐길래?”
“그게…….”
레티시아는 난처해졌다. 죽어도 말 못할 비밀이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망설임을 ‘신전의 기밀’ 내지는 ‘금언령’으로 곡해하고 앞서나갔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당신에게서 성력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어.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지.”
“……아니, 솔직히 그렇게 평범하지는.”
제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안은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토록 평범했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성녀가 되었다? 아르키드네 대주교의 술수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생각했지.”
그 자는 항상 당신 외의 모든 존재를 도구로 보니까. 이안이 차디찬 어조로 덧붙였다.
레티시아는 그런 이안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본인은 아닌 줄 아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욕한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 아닌가.
레티시아의 머릿속에는 아직 꿈속의 이안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자신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은 매정한 사내. 오히려 이쪽이 체이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레티시아가 침묵을 고수하자 이안은 그녀를 주시하다가 턱을 살짝 들었다.
“직접 보니 알겠어. 성력이 있는 건 확실하군.”
그의 관조적인 말에 레티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혼자 조잘거리기 일쑤였던 레티시아가 침묵하자, 이안이 다시 운을 뗐다.
“아, 그렇지.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엘프에 대해서도 조사해 봤는데.”
……로체!
로체는 살아온 날만큼 업보도 층층이 쌓았다. 제가 성녀로 있는 지금도 그는 아르키드네 신전에 마음 놓고 출입하지 못한다.
‘로체의 뒷사정을 캐는 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거야. 기록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레티시아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안은 그녀의 허를 찔렀다는 데 만족하며 보기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글래디안 바이드로체. 보기보단 부침 있는 삶을 살았더군.”
“…….”
레티시아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지? 왜 무게 잡고 말해? 이거 협박인가?’
아니었다.
이안 카히텐이 무려 백 년 전의 과거사를 들먹이며 전 약혼자를 협박할 정도로 졸렬한 사내는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껏 레티시아를 살려 두지도 않았을 테지.
지금 그가 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협박보다는 사실 확인에 가까웠다.
그는 제 말에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레티시아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끝내 결론을 내렸다.
‘모두 진실이었군.’
그렇다면 자연히 새로운 의심이 고개를 들기 마련.
그가 레티시아에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 정체가 뭐지?”
“…….”
레티시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여간, 표정에서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여자다. 평생 암투 같은 데에는 끼지도 못할 타입.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살아남기 용이하려나.
아무튼.
“대답해.”
그가 레티시아를 주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궁싯거리다 도로 닫혔다. 대답하기 싫다기보다는 대답할 여력이 없는 얼굴이었다.
생각하기도 지친다는 표정.
이안이 눈썹을 비죽 들어 올렸다.
‘저 얼굴…….’
그제야 레티시아의 상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아르키드네의 성녀이며, 남부의 추앙을 받는 존재라면 지금 저 꼴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저렇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비렁뱅이의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는…….
“이봐.”
“몰라요. 나중에 고민 좀 하고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머릿속이 좀 많이 복잡해서.”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이안의 시선에 날이 섰다. 그가 레티시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당신 상태 말이야.”
“아, 좀 허름하죠?”
“허름한 정도가 아닌데.”
그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아르키드네 대주교가 당신을 학대하나?”
“네? 그럴 리가.”
뭔가 단단히 잘못 짚었다.
“그게 아니면 뭐지? 당신 옷차림하며…….”
그의 시선이 레티시아의 볼에 박혔다.
“……그 눈물 자국까지.”
“아, 이거.”
레티시아가 옷소매를 잡고 얼굴을 닦으려 하자, 이안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저지했다.
“관둬. 그 더러운 천으로 뭘 하려는 거야.”
맞다. 얘 결벽증이 좀 있었지.
레티시아가 잡힌 팔목을 응시했다.
‘그런 와중에 더러운 천은 잘도 잡고 계시네.’
꿈에서는 제 몸에 닿는 것조차 싫어했으면서.
그녀가 상관하지 말라고 새치름하게 쏘아붙이려던 그때.
“윽…….”
이안이 먼저 그녀의 소매를 놓고 상체를 무너뜨렸다.
“어, 어어?”
레티시아가 제 쪽으로 쓰러지는 그를 받으며 당혹스럽게 제스를 돌아보았다. 제스가 황급히 달려와 이안을 부축했다.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괜찮아.”
괜찮기는. 이렇게 밖에서까지 발작한다는 건 병세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는 증거일 텐데.
가만, 병……?
레티시아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맞다!”
그녀가 이안의 손을 모아 잡고 말했다.
“저 이거 고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