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나는 북부의 권위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지.”
이안의 입매가 서서히 비틀렸다.
“아르키드네의 성녀를 통해서 말이야.”
성녀. 내가 알기로 아르키드네의 성녀는 카히텐과 달리 여럿 존재했다. 하지만 개중에 나처럼 신탁을 받고 성녀가 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신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성녀와 그런 그녀를 통해 나온 이안 카히텐.
‘이게 그를 그토록 냉정하게 만든 진실인 건가.’
무거운 이야기였다.
나는 위로의 말조차 쉽사리 건네지 못했다.
이안 또한 내게서 그런 허울뿐인 위로를 바라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는 조금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힘은 내게 있어 저주다. 결코 풀 수 없는 저주.”
“…….”
이안이 아르키드네의 성력을 타고났고, 그로 말미암아 성력의 부작용을 앓고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건…….’
카히텐 신이나 헬리아스 신의 성력.
하나 카히텐 신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카히텐의 환생, 내지는 현신이라고 불렸던 이안 또한 그의 힘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백 년 전의 그날 이후로 카히텐 신은 그 흔적마저 모조리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지.
헬리아스는 지금 나를 쫓기 위해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니까 이안의 병증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테고.
‘……풀 수 없는 저주가 맞네.’
원작의 이안이 병증을 고쳤던 것으로 미뤄볼 때 그가 받아야 할 성력은 높은 확률로 헬리아스의 것일 터였다.
카히텐의 성씨를 달고 북부를 호령해 온 그가 헬리아스의 성력을 필요로 한다는 건 어쩐지 이상하지만…….
‘정황상 그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
아르키드네라는 선택지가 사라지고 카히텐이 소멸한 현재. 이안의 병증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헬리아스뿐이니까.
‘황제는 헬리아스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레오넬 황자는 너무 어려. 그렇다면 헬리아스 본인이 나서지 않는 이상 이안의 병을 고쳐줄 이는 세상에 없다는 뜻이네.’
만약 헬리아스가 이안을 외면한다면…….
‘이번 생에서 그는 이렇게 계속 아파하다가 죽어야 하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짜증스러운 와중에도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래, 당신도 어쩔 수 없었을 테지.
꿈속에서 날 두고 신과 거래를 했던 그의 절실함이 일견 이해되면서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데 이안이 성녀의 자식이라서 아르키드네의 성력을 타고났다는 건…… 내가 신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와 앞뒤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나는 이안을 향해 물었다.
“아르키드네의 성력은 유전적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 텐데요?”
“유전이라고 보긴 애매하지. 그보다는…… 이런.”
이안은 버릇처럼 궐련을 손에 쥐었다가 나를 한번 보고는 꺾어냈다.
요즘 금연 시도 중인가? 신년 다 지나서 저러기도 하는구나.
“그보다는?”
나는 조급한 마음에 대답을 채근했다. 이안이 손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신의 애정에 따른 분배라더군.”
“애정?”
“그래. 성녀만큼 신에게 총애받는 존재도 드무니까. 그 자식에게도 성력을 전해주는 경우가 많다던데. 내 부친은 그런 쪽으로 모험을 한 거지.”
문득 전생의 꿈에서 본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신이 내어주는 애정의 크기에 따라 대상의 힘과 그릇의 질이 달라진다.
아르키드네도 꿈에서 카히텐에게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신이 자신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경우엔 신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최상의 그릇이 된다.
‘그 그릇이 바로 나…….’
헬리아스와 드미트리, 마부의 얼굴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아……!”
“레티시아!”
이안이 드물게 놀란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아 지탱했다. 이안이 아니었다.
“……체이트.”
땀에 전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으허엉, 체이트!”
나도 모르는 새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레티시아.”
체이트가 내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응?”
“으허, 미아안, 으허어엉…….”
“무사하면 됐어요.”
내 날개뼈 부근에 머물러있던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무사하면…… 그러면 됐어요.”
그는 내 어리석은 판단을 힐난하지도, 내 끔찍한 일들을 캐묻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보다 더 파리한 안색을 하고서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나를 안아 주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더 미안했고, 더…….
“사랑해…… 어어어헝!”
“응.”
체이트가 내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레티시아.”
그의 잔뜩 쉰 목소리가 내 귀에서 흩어진다.
“당신이 내 전부니까. 처음부터, 줄곧…….”
나는 울음을 멈추고 일순 멈칫거렸다. 어깨에서 뜨겁고 축축한 게 느껴졌다.
“체이트……?”
그는 고개를 떼지 않고 버텼다. 내 쪽으로 기울인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미안해요.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아냐, 그건 내가……!”
“내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
나와 눈조차 맞추지 못하는 체이트는 마치 멍에를 쓴 죄인 같았다. 이럴 순 없었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건 나여야 마땅했다.
“너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이렇게 날 데리러 와 줬잖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워프진의 정체. 이제는 알겠다.
“체이트, 네가 나를 지켜준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체이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래전 열다섯의 그를 어르고 달랠 때처럼. 그의 까만 뒤통수를 몇 번이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미안해. 앞으로는 네 곁에 꼭 붙어 있을게.”
네가 불안해하지 않게. 내 어리석음을 자신의 죄로 느끼지 않게.
나는 체이트를 사랑한다.
체이트 역시 마찬가지.
사랑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도 때로는 스스로 얽매이길 주저하지 않으며, 서로의 운명이 사슬처럼 단단하게 엉켜 있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모든 감정에는 무게가 있고, 체이트로부터 전해지는 감정은 거대한 산과 같다. 십 년이 지나도, 백 년이 지나도 깎이지 않을 산.
‘내가 어리석었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내면까지도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일인데.
체이트는 이미 알고 있는 걸 그보다 어른인 내가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의 변화에 취해서 내 손목에 체이트의 삶이 엮여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어.
“평생 붙 어있을게. 아무 데도 안 갈게.”
나는 한참 동안 체이트를 안고 달랬다. 그토록 신경 쓰던 주변의 시선과 우리의 입장 같은 것도 모두 내려놓고.
체이트 외에 다른 건 무의미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작은 고양이, 체이트 폴린이었으니까.
“…….”
그래서 그만 잊고 있었다.
이안 카히텐이, 돌처럼 굳은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