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우리 셋이 이렇게 모여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아주 신기하게 느껴졌다.
‘진짜 공통점 하나도 없는 조합인데…….’
나는 몰라도 체이트랑 이안은 일평생 의견 합치될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이게 되네. 딱히 오래 살진 않았지만, 길게 살고 볼 일이긴 해.
돌이켜보면 우리를 안타카스 신전 한편에 모이게 만든 주범은 결국 헬리아스였다. 그 자식이 나를 꾀어내지만 않았어도……!
……아니지. 내가 그 꾐에 바보처럼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지금 같은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건 따지고 보면 내 탓이지.’
잊으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바로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잠시만 틈이 생기면 금세 불안과 공포가 안을 비집고 들어온다.
순식간에 오한이 들고 어깨가 절로 떨렸다. 체이트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고, 이안이 우리 둘을 보며 못마땅하게 눈썹을 들썩였다.
내 시선이 자연히 이안을 피해 창가에 달라붙었다. 다그닥다그닥.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에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그렇게 대신전에 가까워지며 점차 해가 저물었다. 한층 어두워진 내부에 등이 켜졌다. 동시에 이안이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
그의 뜬금없는 목소리에 창가에 붙어있던 눈을 돌렸다. 혹시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체이트를 향해 있었다.
“저 여자가 저 꼴로 앉아 있는데, 넌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도 않아.”
잘못을 추궁하거나 비난한다기보다는 행동 자체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내 꼴이 뭐가 어때서.’
……좀 추레하긴 하지. 안타카스 신전에서 환복을 마쳤지만 초췌한 안색까지 숨기진 못했다.
“신전으로 바로 찾아온 걸 보면 퍽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는데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체이트가 날카롭게 질문을 되받아쳤다. 이안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한정된 정보에 멋대로 끌려다닐 마음은 없거든.”
“…….”
“나와 동맹을 맺을 의지가 있다면, 먼저 그 성의를 보여.”
이안이 말을 이었다.
“저 여자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신전과 황실이 척을 지게 된 진짜 이유가 뭔지. 전부 설명해.”
체이트의 염려스러운 시선이 나를 스쳤다. 혹시 내 불안이 그를 망설이게 하고 있었나? 그렇다면 무의미한 걱정이다. 나도 우선순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니까.
“좋아요.”
나와 맞잡고 있던 체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은 고개를 바싹 들고 확고하게 대답했다.
“제가 다 얘기할게요.”
체이트가 이안과 손잡을 마음이 없는데 구태여 동행을 자처했을 리 없다. 우리에게 이안이 필요한 패라면, 그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리는 건 필수불가결하다.
내 강경한 태도에 체이트가 손에 힘을 풀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당신 뜻대로.”
체이트는 한 손을 들어 남은 성력을 흘렸다. 그나마 짧은 거리의 워프만 사용했기에 그의 상태는 우리 셋 중 가장 나은 축에 속했다.
그의 능력으로 마차 내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나는 이안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내가 오늘 노려지게 된 경위부터 헬리아스 황제의 진짜 정체와 그가 원하는 진짜 목표가 현신이라는 것까지.
이안은 물론, 체이트도 쉬이 납득하기 어려울 만한 전생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투명하게 이야기했다.
이안은 헬리아스의 정체에 대해 논하는 대목에서 자신을 놀리냐며 비웃다가 점차 웃음기를 지웠다.
“……진심인 건가.”
그가 나와 체이트를 보고 피곤한 낯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신도 별거 없군.”
이안의 말에 십분 동의한다. 비단 헬리아스만이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세속적인 건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세 명의 신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가치관이 달랐고, 욕망이 달랐으며, 그들 자신의 운명 또한 달랐다.
아르키드네는 헬리아스를 온전히 막아내지 못했고, 헬리아스는 아직도 소기의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으며, 카히텐은…….
‘소멸했지.’
인간이 단순히 약하고 어리석기에 세속적이진 않았겠지. 신의 영향력 아래에서 있었기에 결국 그들과 유사한 가치를 추구하게 된 것뿐.
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적이었다. 내가 헬리아스를 본 순간의 느낌이 그러했다.
‘가장 선연한 욕망의 결정체를 보는 듯했어.’
내가 상념에 잠긴 사이 홀로 판단을 마친 이안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
내가 사제를 따라 마차에 오른 건에 대해 힐난하는 것이다.
“…….”
화나긴 하는데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걸.
딱히 원조를 요청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체이트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체이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레티시아의 그런 점까지 제가 모두 염두에 두었으니까.”
“……고마워.”
아니, 사실 안 고맙…… 아니, 고맙긴 한데 내 기분이 뭔가 좀 그렇다.
내가 떨떠름하게 있자 체이트가 말을 얹었다.
“물론 저는 가짜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쯤, 바로 알아보았지만요.”
얘 조금 빡친 것 같은데.
“아, 맞아. 그 가짜는 어떻게 가둬뒀다고 했지?”
난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로 물었다. 체이트가 대답했다.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지하에 가둬뒀습니다.”
“……그 여자, 셀레나라고 했지.”
셀레나 브링스턴. 레티시아 브링스턴으로서는 단 하나뿐인 혈육이다.
딱히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니, 사실 남보다 못한 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그냥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살 수 없었던 걸까.
“내가 셀레나를 구해 줬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 말아요. 당신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한 여자예요.”
“그건…… 응, 그랬지.”
이전까지 셀레나에 대해 고민한 적은 많지 않았다.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위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셀레나는 이용당했을 뿐일 거야.”
“레티시아.”
“이봐.”
이안과 체이트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혈연이라고 봐줄 생각 말라는 거겠지. 안다. 애당초 그런 뜻으로 던진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니까 결국 셀레나가 아는 바는 많지 않을 거라고.”
이게 요점이었다. 헬리아스 같은 자가 셀레나에게 많은 정보를 쥐여 줬을 리가 없다. 그저 허황한 말로 꼬여내 한 번 쓰고 버릴 생각이었겠지.
“내 생각에 셀레나보다 더 자세히 추궁해야 할 상대는…… 내게 접근했던 그 사제야.”
그는 자신을 안타카스 신전의 사제라고 했다. 다른 사제의 반응으로 미뤄볼 때 그가 진짜 신전에 적을 둔 사제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역시 그 사제의 소재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말에는 다들 공감하는 눈치였다. 체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자는 수색 후 발견하는 즉시 대신전으로 잡아 오도록 명령을 내려둔 상태입니다.”
“역시.”
나는 체이트는 믿음직스럽게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불안해졌다.
“그런데 순순히 잡혀 줄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도망을 시도하지는 않았을까? 아니, 그 계획에 가담하기로 한 순간부터 일찍이 남부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을 것 같은데.”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라서 도주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이트가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배신의 근거가 없는 자라서…….”
“응?”
“아르키드네의 사제에게 성녀라는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신앙을 가진 자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일련의 과정이 납득이 가질 않아서요. 차라리 안타카스 주교 같은 속물이라면 설명이 좀 되겠지만.”
안타카스 주교가 들으면 되게 서운해할 만한 소리를 하네.
하지만 나도 의문이긴 하다. 체이트가 걸어둔 신앙이 반응하지 않았다는 건 내게 악의가 있던 게 아니라는 건데.
“혹시 그 사제도 이용당한 걸까?”
“그럴지도 모르죠.”
“흐음…….”
체이트도 너무 급하게 내게 온 터라 자세한 내막을 따질 수는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일단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겠군.
내가 손톱으로 입술을 툭툭 건드리며 고민에 빠진 사이, 체이트가 성력을 거뒀다. 혹시 힘이 다 떨어졌나 싶었는데 이미 대신전 앞이었다.
“도착했군.”
이안이 지지부진한 대화에 조금 지루해진 얼굴로 빠르게 마차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