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잠시만요! 성녀님께 사죄를 드려야 하는데……!”
사제가 꽉 잡힌 머리 대신 몸을 흔들며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처절하게 애원해도 이미 내게 호의란 없다. 신뢰를 저버렸으면 그 대가도 치러야지.
나는 오열하는 사제에게 차갑게 말했다.
“저기, 일단 좀 진정하시고.”
“…….”
마법처럼 조용해졌다.
“비키세요.”
“…….”
빛보다 빠르게 비켜난다. 그럼 혹시 이런 것도……?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아래로 내려가요.”
“…….”
뚜벅뚜벅. 그가 제 발로 걷기 시작했다. 알아서 호송되는 사제를 보며 몹쓸 호기심이 동했다.
“……기왕 걷는 거 탭댄스 한번?”
“그만해요, 레티시아.”
사제의 발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걸 보며, 체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악의는 없을 거라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으응. 오히려 너무 신실해서 부담스러워질 지경인데.”
“혹여 불편하시다면 제 뒤에…….”
체이트가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왜 따라오지?”
어느새 자연스럽게 사제의 취조실로 함께 가던 이안이 태평스럽게 물었다.
“동행하면 안 되나?”
“신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하엔 아무나 들일 수 없어.”
“지하……. 그렇군.”
어라? 의외로 납득이 빠르다. 안하무인이신 대공 전하께서 웬일로 저리 순순하시지?
내 의문은 제스가 대신 해소해 주었다.
“습한 곳은 안 좋아하십니다.”
“아.”
그렇구나. 장소가 취향이 아니셨어.
나는 이안을 두고 체이트의 뒤를 따라갔다. 대공 전하도 일단 귀빈은 귀빈이니 잘 대우해 드리라고 사제들에게 당부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내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제를 예의주시했다. 연기 같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사제는 상상 그 이상으로 어리숙하고 잘 속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본인이 정확히 누구에게 속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사제에게 내가 죽을 뻔했다고 얘기하자 그는 대뜸 아르키드네 신을 찾았다.
기도를 올리는 데 여념이 없는 사제를 보며 체이트가 말했다.
“레티시아, 잠시 밖에 있을래요?”
“아니, 하지 마.”
고문해도 나올 만한 건 없을 거다. 저 맑은 눈과 그보다 맑은 정신머리를 보라. 신앙이 뇌를 지배하여 사고 불능 수준이잖아.
나는 손사래를 치고는 밖을 나왔다.
저 사제가 한 줄기 희망이었건만. 헬리아스에 대한 단서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나는 최대한 몸을 숨기고 있는 수밖에 없나?
‘내가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알고 있으니까.’
체이트와 이안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이안이 우리 쪽으로 와 줬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안의 병증을 고칠 수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안 카히텐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치료제는 아르키드네와 무관했다. 그러므로 코렐리아 역시 이안의 병명을 알면서 그를 돕지 못한 것이다.
‘이안에게 무심했던 게 아니라 아르키드네의 소관 밖의 일이었던 거야.’
하지만 그간 코렐리아의 모든 행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힌트가 되곤 했다. 그녀는 왜 이안을 찾아갔을까. 제 능력으로는 이안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이안이 헬리아스와 접촉해서 그의 편에 서지 못하도록 미리 방파제를 깔아 둔 건가?’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타당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다른 방향으로 사고가 흘렀다.
‘자신은 고칠 수 없지만, 훗날 병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도가 있었을지도 몰라.’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지금까지 봐온 느낌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꿈에서 이안이 헬리아스와 거래했을지도 모를 정황을 보았음에도 이상하게 그 둘이 한편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 이안이 초반부터 흑막으로 보이지 않았듯이 말이다.
‘실제로 원작 속의 그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단편적인 시각으로 지레짐작할 수는 없다. 이안이 현재 우리 편이 되었다는 건 명명백백한 사실이기도 하고.
양반은 못 되는지, 내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랑에 있는 이안을 발견했다. 그는 제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조만간 일을 치러도 크게 치를…….”
내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그가 말을 멈추었다. 내 앞에서 내지 못할 얘기를 했다기보다는 그저 대화의 흐름에 내가 참여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저도 알아요. 성전 말이죠?”
나는 그의 배려에 맞춰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내 납치 계획이 실패로 끝난 지금, 헬리아스는 나를 남부 밖으로 끄집어낼 만한 나름의 방도를 생각 중이겠지. 아니면 황제의 몸으로 직접 남부로 걸음을 옮길 계획을 짜고 있든가.
공식적인 침략에 어울리는 가장 그럴듯한 수단은 전쟁이다.
“조만간 헬리아스 황제의 이름으로 남부에 선전포고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자못 심각해진 분위기 속에서 제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황제의 진짜 정체를 모른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만 보아도 아슬아슬한 형국이라는 게 보이겠지.
전쟁이 목전으로 다가온 건 사실이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걱정에 동참하다가 문득 새로운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전쟁. 확실히 황제로서 헬리아스가 저지를 법한 짓이긴 해.’
전쟁의 참혹함은 인간의 몫이다. 그는 소기의 목적만 이루면 되니까 더더욱 부담이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명분은?”
이안과 제스가 동시에 내 쪽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명분이 부족해요. 전쟁을 여는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다수를 움직일 명분이 필요한데…….”
전쟁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입장이고, 지도자는 항상 나름의 이유를 찾아왔다.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폭군도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지.
“대륙 내의 관계가 경색되어서……?”
나는 스스로 던진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로는 부족하다.
그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는 어찌 되었건 대륙의 중앙을 통치하는 황제다. 우리가 성전이라고 부르지만, 국가적으로는 내전이야.”
“아, 명분이 문제가 아니군요?”
“그래. 그는 이미 우리를 소외시켜놓음으로서 전쟁의 발판을 다졌어.”
이안이 한숨을 쉬고 얘기했다.
“머잖아 우리는 반역자가 되겠지.”
반역의 기준은 제왕이 정한다. 황제가 우리에게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면 그게 곧 반역이며, 이런 식의 국가 봉쇄는 전쟁을 피하려는 일종의 방어적 신호로 비칠 수 있을 터였다.
“의외로 굉장히 치밀했네요.”
“당신이 마차에서 했던 얘기가 사실이라면 실제로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았을 거야. 결과가 이리 나온 것뿐.”
신으로서의 헬리아스는 애당초 인간의 희생에 무심했을 거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이안은 이런 쪽으로 나와 의견이 같았다.
“하지만 중부에도 아르키드네의 신자가 있어요. 신전을 정리해도 하나의 종교집단을 반역 단체로 몰 수는 없을 텐데요.”
역사적으로 그러한 시도가 성공했던 적이 있었던가? 황제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게 종교 아닌가. 그래서 그간 세력 균형을 유지해 온 것이고.
“확실히 그건 의문이지. 그가 성전을 유도하고 있다면, 과연 신전 전체를 적으로 돌릴 심산인가. 아니면.”
이안이 특유의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노리는 일부만을 노릴 것인가.”
“……?”
“사람을 도구처럼 다루는 자는 목적성이 다른 집단을 무조건 적군으로 간주하지 않아.”
이안이 말했다.
“차선으로 쓸 수 있는 또 다른 도구로 치부하지.”
내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 어린 사제가 다가왔다. 우리의 대화는 일시에 뚝 끊겼다.
“성녀님, 아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책을 주웠는데요. 이거 혹시 성녀님께서 소지하고 계셨던 물건인가요?”
“아, 맞아. 고마워.”
코렐리아로부터 받았던 책이었다. 이안이 의구심 어린 눈으로 내 손에 들린 책을 흘끔거렸다.
“책 읽을 여유도 있었나? 역시 당신은 낙천적이군.”
내가 낙천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나는 이안을 노려보며 책을 품에 숨겼다. 그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마나 이상한 내용이길래 그리 숨겨?”
“제 사적 취향이에요. 안 알려 드릴 겁니다.”
“허.”
봐도 모르겠지만 역시 보여 줄 수는 없다.
너랑 내가 결혼해서 그렇고 그런 짓까지 다 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내가 어떻게 말하겠어? 체이트를 봐서라도 그런 말은 절대 못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