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나는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허리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새 누가 나를 옮겨 놓았나? 침대의 푹신함이 느껴진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입 돌아갈 뻔했어.
“하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직도 머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러니까…… 코렐리아의 책을 펼쳤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었지?’
그 뒤에 전처럼 꿈을 꾸고.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코렐리아의 시점에서 보던 이전의 꿈과는 달리, 아주 멀리서 모든 서사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신이 인간을 굽어보듯이.
그 덕에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하나둘 들어왔다.
‘책의 내용은 꾸며 낸 게 아니라, 생략된 거였어.’
이안이 왜 원작의 레티시아를 멀리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애당초 그는 레티시아와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다. 기억을 왜곡당한 레티시아가 멋대로 그를 제 아이의 아버지라고 착각했을 뿐.
이안의 병을 고친 것도 헬리아스가 아니라 카히텐. 그러니까 이안은 카히텐의 성력을 받아야 병증이 낫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간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다. 카히텐이 부재한 이번 생에 그가 평생 고통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안이 거래했다는 상대도 헬리아스가 아니라 카히텐이었던 거였어. ……가만, 그렇다면?’
이안은 헬리아스와 계약하지 않았음에도 흑막이 되었다. 어째서?
그가 무엇을 위해 사술을 부렸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병은 이미 다 나았고 그 외의 건 모두 손에 넣은 상태였을 텐데.
그가 세계를 파탄으로 이끌 만큼 대단한 사건이 원작에 있었던가?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꿈을 꾸고 느낀 건데, 원작 속 레티시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눈치가 진짜 탈 일반인급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어떻게 십몇 년을 같은 꿈을 꾸고서야 ‘어머, 내 남편이 사실은 다른 사람?’ 이 지랄을 떨 수가 있단 말인가. 눈이 발바닥에 달리지 않고서야.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그녀의 심각한 정신머리는 차치하고, 결국 죽었다는 걸로 미뤄볼 때 카히텐은 헬리아스에게 패배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래서 지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 테고.
“…….”
꿈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그의 사랑을 회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치 전생의 코렐리아나 레티시아가 된 것처럼.
결국 제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사라진 카히텐. 제 연인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죽어간 레티시아.
최악의 결말이었다.
만일 내가 체이트를 그런 식으로 잃는다면…… 또 그를 완전히 잊게 된다면.
“어우.”
나는 뜨거워진 눈가를 비볐다.
나랑 체이트는 달라. 우린 둘 다 인간이잖아.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모두 카히텐이 존재하고 내가 빙의하지 않았을 경우에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가정에 불과했다.
이만 정신 차리자.
나는 뺨을 짝짝 두드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근데.”
왜 낮에 잠들었는데 계속 낮인 거죠? 길게 잤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쪽잠이었던 건가?
“……그렇다기엔 몸이 너무 개운한데.”
예부터 그런 말이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푹 잔 기분이 들면 그날은 주옥 된 거라고.
지금 내가 딱 그런데? 등골이 쎄한 게 여간 불길한 게 아니다.
나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실내.
조심스레 발을 아래로 내디뎠다. 아래로 하중이 쏠리는 느낌이 어째 낯설다. 역시, 쪽잠 자고 일어난 느낌은 아니야.
그럼 설마 하루를 통으로……?
어쩐지 목이 껄끄럽더라니. 나는 문가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고요하다.
체이트가 나를 여기 두고 앞에 아무도 대기시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바로 대답이 나와야 정상일 텐데.
“저, 저기요?”
조금 더 큰 소리로 물었지만 마른 목구멍만 쑤실 뿐이었다.
“…….”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문고리를 돌렸다. 당연히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열려 있다.
뭐지? 그새 체이트 마음이 변했나? 내게 유독 약한 그라면 미안해서 하루를 못 채우고 문을 열어 두었을 수도 있다.
끼익…….
천천히 문을 열자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사방이 트인 외부 신전과 달리 이쪽 건물은 벽이 막힌 구조였다.
하지만 이렇게 어둡게 놔두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능력 있는 사제들이 차고 넘치는 대신전답게 성력으로 항시 밝기를 유지하는 실내였다.
게다가 이 녹슨 쇳내.
“이상해…….”
불안이 고조된다. 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목 뒤에서 나는 식은땀을 무시하고 신성으로 안을 밝혔다. 곧 어두운 복도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이, 이게 무슨…….”
피칠갑이 된 벽면이 드러났다.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걸음을 옮겼다. 맨발바닥에 축축한 액체가 닿았다. 고인 피였다.
“허억……!”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뭐야……. 대체 뭔데……?”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기습이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잖아.
“체이트…….”
‘체이트는 무사한 건가?’
붉은 피를 보자마자 그를 떠올렸다. ……이안과 함께 전면전을 준비한다고 했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궁싯거릴 수 없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사지의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맨발로 피 웅덩이가 진 복도를 내달렸다.
“체이트…… 체이트…… 콜록!”
그를 부르다 목에서 밭은기침이 나왔다. 정말이지, 얼마나 잤길래 이러는 거야!
“체이트…….”
공황에 가까운 상태로 아래층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그때까지 사람은커녕 시체조차 보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있을 것이다. 체이트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문을 향해 달렸다.
덜컹……!
외부로 향하는 출입구가 열리지 않았다. 그저 잠긴 게 아니라 결계로 막아놓은 느낌.
“제길, 이깟 문짝……!”
나는 성력을 방출해서 억지로 문을 뜯으려고 했다. 문밖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당장에 그리했을 것이다.
“열면 안 됩니다.”
“……! 체이트!”
“열지 마세요, 레티시아. 절대로 열면 안 돼요.”
긴 꿈을 꿨기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아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움과 안도도 잠시. 나는 이내 그의 음성에서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무, 무슨 일이야?”
“깨어났어요? 몸은 괜찮습니까?”
“으응. 그런데 내부가 왜 이래? 밖은…… 너는 괜찮아?”
“…….”
체이트는 긴 침묵 후에 대답했다.
“괜찮아요.”
거짓말이다.
전혀 괜찮지 않아.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체이트였다. 내가 그를 모를 리 없다.
“……문 열어.”
“…….”
그는 한사코 버텼다. 문 너머의 상황이 대체 어떠하길래.
‘기어코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지.’
카히텐이나 체이트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너네는 둘 다 소통 부재야. 제발 대화 좀 하고 일을 벌이란 말이야.
왜 혼자서 다 하려고 하는데……!
“후웁.”
나는 성력을 손바닥에 모았다. 이어서 문가에 대고 강하게 밀어냈다.
석벽에 가까운 문이 쩍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린다. 모래알처럼 부스스 떨어지는 문밖으로 체이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잔뜩 지친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의 잘생긴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순간 식겁했으나, 자세히 보니 그 피는 체이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반대편에 사제들이 몰려 있었다. 체이트 쪽에서 안타카스 주교와 이안을 포함한 사제들이 몇몇 있었으나, 누가 봐도 양측은 대치하는 모양새였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적이 쳐들어온다면 그건 헬리아스 측이리라 생각했는데. 왜 아르키드네의 사제들이 서로 공격하고 있는 거지?
예상가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내분…….’
“나오지 마시라니까.”
체이트가 나를 돌아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당장 달려가 안기고 싶을 정도로 애틋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럴 때가 아니다.
“지금 싸우는 거야? ……왜?”
내 물음에 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반대 측의 사제 하나가 소리쳤다.
“가짜 성녀를 우리에게 넘기시오. 그들이 원하는 건 오로지 저 여자 하나뿐이니.”
가짜 성녀……?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물론 내가 신앙심이 심히 부족한 편이긴 하다. 그렇지만 갓수저를 물려받은 건 사실이었다. 내게는 방대한 양의 성력이 있었고, 이는 신탁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가짜라니?”
앞으로 나아가 묻자, 사제가 나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조소라기보다는 경멸, 내지는 원망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당신만 없으면 남부는 평화로울 거야.”
“뭐?”
“당신이 거짓으로 성녀 행세를 해서 신이 분노한 거니까.”
“아르키드네……님이?”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체이트가 내 팔을 붙들었다. 만류하는 그를 완곡하게 뿌리치고 재차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
반대편 사제들은 나를 노려보고, 체이트는 한숨을 깊이 쉴 뿐이었다.
갑갑한 와중에 안타카스 주교가 입을 열었다.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
“전쟁의 원흉이 성녀님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