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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27)화 (127/140)

내가 전쟁의 원흉?

……예리한데?

내 의사는 코딱지만큼도 안 들어간 결과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헬리아스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건 나를 그릇 삼아 현신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가짜 성녀라니, 말도 안 된다.

애당초 시켜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역할을 떠맡기고는 이제 와 수틀리니 뒈지라고 하네. 신실함 1티어라는 놈들 양심 상태가 어찌 이 모양인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일주일.”

이안이 대답했다. 우리 쪽에 있긴 했지만, 그는 이상할 만치 깔끔했다. 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체이트와는 천양지차의 모습이다. 옆에 있던 제스도 눈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제외하고는 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눈치가 백단인 그는 내 의문을 알아채고 뱁새처럼 조잘거렸다.

“아, 저흰 구경꾼입니다. 이기는 편 우리 편 하기로 했습니다.”

“어쩐지…….”

“몇 명은 내가 상대했는데.”

생색내는 이안은 무시하기로 했다.

“체이트, 상황은?”

나는 성력을 가다듬으며 그에게 물었다.

피로한 기색의 체이트가 대답했다.

“이틀 전부터 대치 중입니다. 레티시아 당신이 쓰러지고 난 후…….”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폈다. 끔찍한 기억을 회상하는 듯했다.

제 손으로 가둔 직후에 내가 그러고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혹여라도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찮아. 얘기해.”

“……헬리아스가 당신을 얻기 위해 악의적인 소문을 낸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가둔 진짜 이유는 이런 거였나. 피웅덩이의 정체도, 시체는 하나도 없었던 이유도 알 것 같다.

내분 초기에 서로 죽고 죽이는 단계까지 갈 이유는 없지. 대치 중 무력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체이트가 그들을 압제하고, 혈투가 벌어진 게 분명하다.

실제로 반대 측에 있는 사제들 대다수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여긴 아르키드네를 모시는 신전이에요. 그런 곳에서 다른 신의 분노가 두려워서 제물을 바치려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

내 물음에 사제들이 주춤거렸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한 명만 빼고.

“한 명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비입니다.”

공리주의를 찬양하는 사제인가. 꿈 속에서 보았던 아르키드네가 실제로 이 소리를 들었다면 혀를 찼겠다. 저러라고 준 성력이 아니었을 텐데.

그새 아르키드네와도 어느 정도 내적 친밀감이 쌓인 나는 사제를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낯이 익다. 저 남자, 나를 납치했던 그 광신도 아닌가?

“당신 나 좋아했잖아……?”

“그건 당신이 아르키드네 님의 가호를 받은 진짜 성녀일 때의 얘기지!”

사제가 배신감에 전 목소리로 외쳤다.

“아르키드네 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짜 성녀라고. 거짓된 신탁을 퍼뜨린 대주교를 처단하고 가짜 성녀를 제단에 바쳐야 평화가 올 거라고!”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녀가 나를 정말로 희생양 삼으려고 했다면 지금껏 나를 물밑에서 도왔을 리도 없지.

‘그것도 저런 머저리에게 얼굴을 보이면서까지 말이야.’

아르키드네일 리가 없다.

저 사제가 옥에 갇혀서 환상을 보았거나, 다른 신을 보고 착각한 게 분명하다.

다른 신…… 그러니까, 헬리아스 말이다.

‘꿈에서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카히텐을 속였지.’

아르키드네를 사칭하는 버릇은 여전히 버리지 못한 건가. 긴 세월 살아온 절대자치고 창의력이 부족한 놈이다.

‘하지만 아르키드네는 그 이후에 외관을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는 계율을 추가했어. 이 계율대로라면 헬리아스는 더 이상 아르키드네를 사칭할 수 없었을 텐데?’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심하지 말라. 내가 너의 정신에 깃들었다는 것이 바로 내 존재의 증거다.”

“아, 꿈?”

그래, 꿈에서 뭔들 못 하겠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꿈 많이 꿨는데.

헬리아스가 그와 접촉하는 순간에 무슨 수를 쓴 게 확실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렇게 그가 지하를 나올 수도 없었겠지.

그래서 제게 탈출의 방도를 일러준 꿈속의 신을 아르키드네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것일 테고.

왜 하필 저렇게 물정 모르고 독실하기만 한 사제를 골랐을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헬리아스는 단지 나를 납치하기 위해서만 그를 꿰어낸 게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에 사제의 신앙심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거다.

마을 하나를 전멸시키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것은 우물에 독약을 푸는 거니까.

‘쓸데없이 치밀한 새끼…….’

골치가 아파졌다. 남부가 전쟁에서 패배하여 헬리아스와 맞붙는 사태는 예상했지만, 남부의 사제들이 나를 손수 그 앞에 끌고 가는 상황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헬리아스가 인간적이라는 아르키드네의 말을 일견 인정한다. 그는 인간의 악하고 나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쪽으로 귀재였다.

“가짜 성녀를 내놔!”

개꿈에 눈이 돌아간 사제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성력을 방출하기도 전에 체이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더 다가오면 죽을 거다.”

“윽…….”

호기로운 태도는 다 어디로 갔는지,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뒷걸음질 친다. 꼴에 죽는 건 무서운 모양이지.

‘체이트는 나름 봐주고 있는 거군.’

사제를 일소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그러면 남부의 전력이 깎일 뿐더러, 내분이 공론화되어 불씨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뿐이었다.

살생을 최대한 피하고 대화로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 체이트도 그 사실을 알아서 애써 힘을 억누르고 버티고 있지만…….

“체이트, 그거 날리면 쟤 죽어.”

“…….”

내가 깨어난 현재.

그의 이성은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누구든 내게 해를 끼치면 앞뒤 안 가리고 죽여 버리겠지. 그건 헬리아스가 안배한 또 다른 결과일 테고.

‘그놈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는 없지.’

나는 며칠 밤을 새워 눈이 거뭇거뭇해진 체이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도 극심한 피로와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다들 많이 두려운 건 알아요. 제가 진작 나와서 당신들을 돌아봤어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불안이 많이 커졌을 거예요.”

“…….”

몇몇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이로 고집스럽게 웃기지 말라며 악을 쓰는 한 명은 배제하기로 했다. 저쪽은 이미 헬리아스의 개나 다름없다.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나는 정중하게 그들에게 사과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내 손에서 빛이 반짝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그들의 눈도 같이 반짝거렸다.

신의 가호를 증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모습을 보이자, 사제들은 자연히 내게 집중했다.

“알다시피 이건 성력이죠. 신의 가호를 받지 않은 자가 어떻게 성력을 쓸 수 있겠어요?”

“…….”

“제가 가짜라는 건 다 헛소리예요. 전쟁이 두려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끼리 싸워 봤자 남 좋은 일만 하게 될 뿐이에요.”

몇몇 사제들의 움직임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나, 직접 성력을 마주하자 갈등하게 되는 모습이 딱 신전의 하급 사제들다웠다.

저 중 실제로 성력이 있는 자는 드물 테니까. 성력을 눈으로 보게 해 주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을 여지가 있는 거지.

“저로 인해 이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헬리아스의 목적을 모르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 편이 더 잘 먹힐 테니.

“하지만 저는 신탁을 받아 성녀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아르키드네 님을 노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제들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신앙심이 고취된 그들을 향해 마지막 직격타를 날렸다.

“전쟁이 두려워 우리의 신을 저버릴 생각인가요?”

“……!”

몇몇이 무릎을 털썩 굽혔다. 너무 감동한 나머지……가 아니라 졸려서 못 견딘 거였지만, 아무튼 나머지는 나름 심경의 변화가 있어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미소 지었다. 일주일을 쓰러져 있다 나온 꼴이라 초췌하겠지만…… 성력이 나를 어느 정도 봐 줄 만하게 만들어 주겠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함께 싸워 주세요. 아르키드네 님이 아끼는 모든 존재를 위해서.”

아, 그러니까 저도 포함입니다.

……라는 말은 멋없으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나름 잘 먹힌 눈치다.

체이트에게 짐만 된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런 식으로 사태를 무마할 수 있다니. 조금은 성장했다고 봐도 될까?

체이트를 돌아보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그에게 나는 언제나 지켜야 할 존재였고, 어리숙하고 사고만 치는 연인이었으니.

어쩌면 기나긴 꿈이 나를 조금쯤 바꿔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아르키드네가 심어 놓았을 그 꿈이…….

“웃기지 마!”

고집스러운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헬리아스의 개가 된 사제가 형형한 눈으로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물러서세요.”

체이트가 신성을 펼쳤다.

“안 돼, 죽이지 마!”

지금 살생이 일어나면 모든 게 도루묵이다! 나는 그를 잠재우는 방식으로 성력을 방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

나와 체이트보다 앞서, 누군가가 성력을 개방했다. 사제는 경추를 가격당한 사람처럼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누구지? 혹시 이안이…….

아니, 저쪽은 아니다.

그렇다면?

바람이 살랑 불었다. 머리가 휘날리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높다랗고 푸른 남부의 우듬지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위로 나부꼈고, 붉은 눈동자가 심상하게 나를 향했다.

코렐리아의 거죽을 뒤집어쓴 남부의 상징이 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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