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29)화 (129/140)

깜박-

눈을 감았다 뜨자 새로운 풍경이 비쳤다.

‘또 꿈인가?’

……아니. 꿈이라기엔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하다. 환각? 환영? 아니면…….

-기억을 전송하는 거야.

어딘가에서 아르키드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운 적 없니?

……공부에 뜻이 없어서 그만.

성력 사용법을 대각선으로 익힌 탓에 아르키드네가 쓴 신성의 전송 방식을 유추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 이거 기억난다. 통신구에 적용하는 그거네.’

근거리 연락 수단인 통신구는 마력과 성력을 기반으로 했다. 둘은 은근히 통하는 게 많아서 대체가 잘 되곤 했지. 그 덕에 북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거고.

기본적으로 머릿속의 정보를 전송한다는 점에서 통신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이쪽은 실제 상황이라고 믿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과거를 한순간도 빠짐없이 기억하기 때문인 건가. 신도 참 해 먹기 힘든 역할이다.

- 집중해.

그녀의 말에 나는 앞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를 눈에 담았다.

카히텐과 헬리아스. 신들의 전쟁이었다.

성력이 맞부딪치고, 화려한 조명이 둘을 감쌌다. 대단한 장관이었다.

내가 아는 형제싸움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신들은 머리채 따위 잡지 않는구나.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던 싸움은 점차 피 튀기는 혈전으로 변모해 갔다. 용호상박의 전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 아니고, 카히텐이 이겨야 한다. 헬리아스는 적잖이 글러 먹은 인사니까.

내 바람이 통했는지, 카히텐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는 게 보였다. 헬리아스가 점점 뒤로 밀려나면서 난처하게 웃었다.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

구차하다.

“구차하게 구는군.”

오, 우리 통했다.

카히텐은 신성으로 뽑아낸 검을 자비 없이 휘둘렀다. 헬리아스가 그 검을 간신히 막아내며 고전하고 있던 그때.

“도, 돌아왔습니다, 헬리아스 님!”

한때 내 악몽과도 같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헬리아스의 충복, 드미트리였다.

헉헉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워프를 쓴 모양. 현실과는 달리 카히텐이 있던 세계의 드미트리는 성력이 제법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쟤 뒤에 있는 저거…… 관 맞지?

관이 왜…….

……설마.

‘안 돼. 열지 마.’

내 한마디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간절해졌다.

제발 열지 마.

제발, 지금은 아니야…….

검을 휘두르는 카히텐의 시선이 드미트리를 향했다. 그 눈을 가려주고 싶었다.

헬리아스는 비열하게 웃으며 카히텐을 보고 있었다. 관이 열리며 분홍색 머리카락이 선연히 비치는 순간, 그의 모든 동작이 멈추고 검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모습을 악신의 시선이 빠짐없이 훑었다.

“아, 이미 죽어 버렸네.”

헬리아스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떡하지? 우리가 싸울 이유가 사라져 버렸어.”

카히텐은 망연하게 관을 응시했다. 빈틈을 잔뜩 남긴 그를 보며 헬리아스가 역공을 시작했다. 카히텐의 피부가 갈기갈기 찢기고 가슴에서 울컥 피가 흘렀다.

단숨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카히텐이 뒤늦게 성력으로 제 몸을 치유하려 했지만, 헬리아스의 신성에 당한 몸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의 한쪽 무릎이 무너지고 옆으로 쓰러지는 사이, 헬리아스는 관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너는 이 영혼에게 정말 한없이 약하구나.”

그는 동정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 같은 건 사랑하지 말았어야지. 결국 인간처럼 나약해졌잖니.”

관 속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몸에 손을 댔다. 뒤늦게 일어선 카히텐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관 속에서 마른 여체가 서서히 일어났다.

“……!”

녹안이 느리게 깜박였다. 그녀를 아득하게 바라보던 카히텐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렇군. 살아 있었어.”

도로 올라오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래, 카히텐은 일전에도 이런 경험을 했었다. 코렐리아에게 헬리아스가 현신을 시도했을 때, 그는 헬리아스가 코렐리아의 육신에 자리 잡기 직전에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육신을 죽이고 영혼을 살렸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리하면 될 것이다.

레티시아의 육신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고, 영혼을 구해서 인내를 씹으면 그만일 터.

앞선 꿈에서 코렐리아를 죽인 그를 보았기에 나는 뒷일을 염려하지 않았다. 단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번엔 영혼의 환생을 기다리지 않고 이안과 사술을 부렸다는 거잖아. 왜 그랬지?’

의문은 곧 최악의 방식으로 해소되었다.

“죽여.”

레티시아…… 아니, 헬리아스가 던진 말이었다. 그토록 잔인한 말을 내뱉는 존재는 레티시아일 수도 없었고, 나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하얀 원피스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카히텐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성력을 쥔 채로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망설이는 거야?

그냥 죽이라고!

전처럼…… 그냥 죽이면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카히텐.”

내 목소리로 달큼하게 그를 부르는 헬리아스가 얄미웠다. 그에 눈가가 떨리는 카히텐은 갑갑하기만 했고.

“날 죽여, 카히텐.”

“…….”

카히텐의 지척까지 다가온 그녀는 이미 다른 존재였다. 카히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저건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아니라고, 머릿속에서 몇 번을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가 눈을 부릅떴다. 손아귀가 전처럼 심장을 향해 다가왔다. 결심을 굳힌 손마디가 유독 단단해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손목에 휘감겼다. 카히텐이 멈칫거리자 녹안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흔들렸다.

“아냐, 그러지 마요.”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를 두 번이나 죽일 셈이에요?”

“…….”

카히텐의 손은 그 하찮은 저항에 쉽사리 무너져내렸다.

그녀가 레티시아의 육신을 빼앗은 헬리아스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끝내 제 손으로 녹색 눈동자를 영영 감게 하지 못했다.

어째서.

왜 죽이지 않는 거야?

안쓰러운 감정과 심장을 꽉 죄는 통각이 내 안에서 뒤섞였다. 그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레티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카히텐의 시선이 낯설지 않았다.

온갖 번뇌와 갈등으로 얼룩진 눈. 후회할 것을 알고도 끝내 아무것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무력한 시선.

어쩐지 익숙했다.

저런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는 비단 카히텐 하나만이 아니었다.

강한 힘을 타고났으면서 내 앞에서는 끝없이 약해지는 사내. 눈이 먼 채로 죽는 한이 있어도 내게 티끌만큼의 상처도 내지 못할…….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금세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감각만이 선명할 뿐, 내 손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으로서 전송되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 다 됐구나, 카히텐.”

내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는 서늘한 음성이 그를 꿰뚫었다. 그가 떨어뜨린 검이 그의 목을 겨누었고, 곧이어 빠르게 하강했다.

‘안 돼!’

고개를 내저으며 악 소리를 냈지만 가닿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가 새카맣게 변했다. 그 순간 외면하지 말라는 아르키드네의 목소리가 나를 지배했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었다. 예상했던 최악의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히텐은 살아 있었고, 둘 사이에서 코렐리아가 검을 막고 서 있었다.

……아니, 코렐리아가 아니다.

코렐리아의 육신을 빌린 아르키드네, 그녀였다.

이건 그녀의 기억이다. 그러니 모든 걸 보고 마지못해서 급히 뛰어든 것이었겠지. 그 와중에도 계율을 어기지 못하고 코렐리아의 몸을 빌렸다. 참, 고지식하기도 하지.

“그만둬.”

“아르키드네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말투는 어느새 헬리아스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가 내 얼굴을 하고서 웃었다. 나 저렇게 야비하게 웃을 수도 있었구나. 뺏어갔으면 얼굴 좀 잘 쓰지, 정말…….

“여기까지만 하고 이만 사라져. 우리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붙어 봤자 손해만 볼 뿐이야.”

“내 누이는 여전히 이성적이구나. 누구와 다르게.”

“……지금의 내겐 네 심장을 뜯어낼 힘이 없으니까. ……누구처럼 말이지.”

헬리아스는 깔깔 웃다가 눈물을 훔쳤다. 그가 가볍게 손을 털고는 드미트리를 응시했다.

“그래, 형제끼리 싸우는 것도 보기에 좋진 않지.”

그러고는 그가 드미트리에게로 걸어갔다. 드미트리가 황홀한 표정으로 헬리아스를 올려다보았다.

“헬리아스 님! 드디어 원하시는 바를 이루셨으니 저는 죽어도 여한이…….”

서걱-

순식간에 종복의 목을 벤 그는 피 묻을 손을 털어내고는 카히텐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무력한 신을 보며 그가 말했다.

“죽을 수 있는 몸이 된 걸 축하해.”

이어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를 보며, 카히텐이 손을 뻗었다. 레티시아의 허상이라도 잡아 보려는 듯이.

아르키드네가 그를 말렸다.

“정신 차려. 일이 벌어졌으니 막아야 할 거 아니야. ……알지? 너 나랑 약속했어. 계율에 묶인 나 대신 헬리아스를 통제하겠다고.”

“…….”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적어도 돕기라도 해. 나 혼자서 저걸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를 설득하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던 카히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영혼은?”

“……이번엔 구하지 못할 거야. 헬리아스의 정신이 안착할 기회를 줘버렸으니까.”

“그렇군.”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없는 거야.”

“…….”

“이해가 안 돼.”

그가 실소했다.

“왜 죽이지 못했지? ……왜?”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곧이어 미치광이처럼 배를 잡고 구르던 그가 간헐적으로 숨을 헐떡였다.

“하, 하하…….”

그가 제 뺨을 쓸어내리자 소금기 가득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시선이 아르키드네를 향했다. 그녀 역시 퍼렇게 질린 표정이었다.

“너…….”

왜 저러는 거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아르키드네가 내게 말했다.

-신이 죽음에 지쳐서 우는 거 봤어?

사랑도 하는데 못 울 건 뭐람.

내 퉁명스러운 마음의 소리는 일전의 꿈을 떠올리면서 점차 수그러들었다.

인세의 감정을 모두 깨우친 존재는 영생을 잃는다고 하였다.

……저 신은, 마침내 모든 감정을 배우고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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