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31)화 (131/140)

남부의 숲은 북부와 달리 울창했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처연한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싱그러운 녹색의 풀과 벌레 울음만이 가득한 이곳 숲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지만.

챙, 챙! 칼날이 맞붙는 소리가 섬뜩하다.

우리는 대치 중이었다.

헬리아스의 군대와 신전에서 정예로 파견된 성력을 보유한 사제들의 전투였다.

군사들은 전술에 능란하고 신체적으로 뛰어났으나 신성을 다루지 못했고, 사제들은 신성이라는 치트키를 갖고 있었으나 육탄전에는 미흡한 구석이 있었다.

쌍방의 전세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있는 후방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최전방에서는 이안과 아르키드네가 직접 싸우고 있었다. 코렐리아의 외관을 가진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지만, 예상외의 전력 보강에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보좌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체이트는 전방으로 나서지 않았다. 수적으로 열세인 만큼 한 명이라도 전방에 나서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에도 그는 굳건히 내 곁을 지켰다.

“제가 저 노인네를 어떻게 믿고 당신 곁을 떠날 수 있겠어요?”

그가 한 말에 로체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라 그랬냐? 너 나 못 믿어?”

“말이라고 하나? 당신을 믿을 바엔 지나가는 돌멩이를 믿지.”

“뭐? 레아 양, 저게 방금 저한테 뭐라 했는지 들으셨어요?”

“응. 들었어. 그리고 둘 다 닥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

어쩌자고 이 둘을 내게 붙여두었을까. 나는 빠개질 듯 아려오는 오른쪽 머리를 부여잡고 아까 일을 회상했다.

신전에서 직접 전투에 나서기로 결심한 직후, 아르키드네가 홀연히 사라졌다. 워낙에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양반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로체의 목덜미를 끌고서 다시 나타나신 거다.

로체는 당연히 신전에 안 들어가려고 버텼다. 그럴 만도 했다. 로체가 신전에 지은 죄는 꽤 중대했으니까.

‘아니, 나 대신전은 좀 그렇다니까? 사형당할 수도 있다니까?’

그렇게 난리를 치던 로체는 힘없이 신전 바닥에 내던져졌다. 정예 중의 정예인 사제들이 출병을 준비하는 와중에, 그 한복판에 던져진 거다.

로체가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체이트와 이안이 방관하는 가운데, 나라도 나서서 로체를 변호해 주려고 했다.

‘저기, 이쪽은 그러니까…….

‘뉘신지?’

‘예?’

‘귀를 보아하니 이종족인 것 같은데…… 혹시 성녀님께서 아시는 분이십니까?’

‘……안타카스 주교님, 얘 누군지 모르세요?’

‘제가 이종족과는 연이 없어서, 허허허허…….’

‘아, 그, 그러시구나? 아하하하…….’

‘…….’

놀랍게도, 아무도 로체를 못 알아봤다.

그래, 백 년 전 고서에 생김새가 제대로 실린 것도 아니고, 신전에 고서가 몇천 권인데 그 와중에 쟤 외관을 다 기억해.

그것도 모르고 혼자 눈치 보며 남부 휴양지를 즐기지도 못한 세월만 무려 백 년이었다.

‘섀도복싱 오졌다 진짜…….’

나는 로체는 한심스럽게 일별하고는 아르키드네에게 물었다.

이 화상 왜 데려오셨습니까. 혹시 짐이 모자라셨는지?

아르키드네는 이번에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으응, 짐이 모자라셨구나…….

멍하니 쭈그려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로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사실 따뜻한 곳이 더 좋았는데…….’

우리는 로체를 짐칸에 싣고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나름 엘프고 마력도 쓸 줄 아니까 병력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지만.

“좀 돕지?”

후열로 날아오는 화살을 성력으로 쳐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엘프는 평화주의자입니다.”

체이트 말이 백번 옳다. 얘는 영 믿음이 안 가.

“애초에 저는 제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로체의 목소리는 바싹 졸아붙어 있었다.

“나도 그게 궁금한데.”

어떤 사제의 가슴에 적중하려는 화살을 반대 방향으로 휘게 만들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나 봐?”

“그렇죠, 뭐. 쓰다 버릴 패 취급받는 처지였으니까요.”

“저런…….”

“신경도 안 쓰시면서 그렇게 안쓰러운 척만 하실 거면 그냥 아무 말 안 하셔도 됩니다.”

“…….”

“상처 주시네.”

나는 전투에 집중했다. 점점 기세가 밀려 후방으로 날아드는 화살의 수가 늘어났다. 옆으로 치고 들어오는 부대도 늘었고.

지형적으로 장거리 공격은 힘들 텐데도 이렇게 후방을 꾸준히 노리는 건 아마 나 때문이겠지.

“체이트, 앞쪽 상황은 어때?”

체이트는 통신구를 통해 안타카스 주교로부터 전방의 상황을 꾸준히 보고받고 있었다.

“아직은 저희 쪽 상황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황제가 보이지 않는다는군요.”

“……헬리아스가?”

“네, 레오넬 황자 또한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레오넬이 보이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 애는 아직 너무 어리니까. 하지만 헬리아스가 자리에 없는 건 이상하다.

전시에 깃발을 꽂고 선두를 달려야 할 사내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지?

일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식은땀이 머리카락 틈에서 송골송골 배어 나오고 땅을 딛고 서 있던 두 다리가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은 느낌.

괴리감이 들었다.

헬리아스는, 우리의 적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레티시아.”

그때, 체이트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찾았습니다.”

그리 말하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초조해졌다.

“어디에 있대?”

“선두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군요.”

여기엔 없다. 아직 나를 덮치러 오지는 않았어.

깊은 안도와 함께 자괴감이 내면에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그와 맞서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나는 여전히 그를 마주 볼 용기를 갖지 못했다. 외면하고 살 수 있다면 차라리 영원히 외면하고 싶었다.

“체이트, 앞쪽으로 가서 어서 놈을 포박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게…… 좀 힘듭니다.”

“응?”

체이트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레오넬 황자를 인질로 삼고 있습니다.”

“……!”

그릇으로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서 인질로 써먹기까지!

상상 이상으로 쓰레기다.

“대공 측이 인질을 무시하고 공격할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한 명이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계속 대치 중입니다.”

“그 한 명이 혹시…….”

“네, 그 미친 여자.”

체이트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올라왔다.

“코렐리아가 저희를 막고 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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