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녀석을 버리지 못해.”
아르키드네가 레오넬을 보며 낮게 신음했다. 과거의 기억이 여전히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과거, 아르키드네는 그녀 스스로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믿었다. 모든 일에 공명정대하고, 그 어떤 속세의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다고.
그렇게 자만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옳다고 믿었던 세계의 계율은 한순간에 어그러졌다.
카히텐이 그녀를 배신함으로써.
레티시아가 육신과 혼백을 모두 잃은 그날, 카히텐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카히텐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와 이안이 사술로서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그것은 아르키드네의 세상을 무참히 짓밟는, 사실상 금지된 사술이었다.
세계를 완전히 백지로 만들어 다시 재구성하는 사술.
그녀가 자비로운 척하며 제 형제들에게 허락했던 유일한 반항이었다.
사술은 둘 이상의 계약자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형제와 그 형제가 가호를 내린 존재.
그리고 사술이 통하여 세상이 재구성되는 순간, 제 형제 쪽은 모든 권능을 잃고 인간과 다름없는 윤회의 고리에 속하게 될 터였다.
카히텐과 헬리아스. 둘 중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카히텐은 사술을 사용할 계기가 없었고, 헬리아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을 다시 세우려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 오판이었다.
카히텐이 본인의 전부를 버리면서까지 되살리고 싶은 존재가 생긴 순간, 영원히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사태가 현실로 도래했다.
아르키드네는 제가 일궈놓은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계율 아래에 재정립되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그녀와 헬리아스를 제외한 모든 존재가 이제 카히텐의 손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머잖아 자신이 벌인 결과조차 잊게 될 한시적인 절대자였다.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 이대로, 제가 가꾼 세상이 멸망하게 두어서는…….
아르키드네는 세상이 재구성되기 직전, 카히텐을 찾아갔다.
“넌 어리석은 선택을 했어. 헬리아스는 여전한데 너는 무력하기 그지없으니까.”
한순간의 감정으로 한 선택이었겠지. 하지만 곧 후회할 것이다.
“알고 있어. 그 녀석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지만…… 내게 그 정도 권한은 없더군.”
그의 반응은 미온했다. 의아해하는 아르키드네에게 그가 말했다.
“하지만 여긴 내가 만들어낸 세계다. 이 세계의 계율 또한 내가 정했지.”
“그래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그가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대부분은 네가 정해둔 것과 비슷해. 단 하나 다른 거라면 이 세계의 근간에 레티시아가 있다는 거지.”
“설마…….”
형제의 불안한 마음에 화답하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혼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몇 번이고 재구성될 거야.”
“……!”
”물론 나는 인간의 몸으로 늙어갈 테니 다음 세상에서는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고 비루한 삶을 반복하겠지.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을 거다.“
레티시아가 지금처럼 헬리아스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면 수백, 수천 번 지금과 같은 시간이 반복될 것이다.
카히텐은 자신이 그녀를 홀로 지켜낼 수 없음을 마침내 인정했다. 하여 아르키드네를 레티시아가 존재하는 시간 선에 가두었다. 제가 없는 세계에서도 그녀의 영혼이 온전할 수 있도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르키드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 이 미친……!”
당장에라도 제 목을 비틀려고 달려드는 아르키드네를 보고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백 년 전을 기억하나? 그때 너는 헬리아스가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모습을 흉내 냈다고 했지만…… 철두철미한 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어.”
매사 무관심했던 과거의 카히텐은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감정을 모두 깨우친 그는 백 년 전보다 훨씬 예리했다.
“너는 내 손으로 직접 코렐리아를 처리하도록 판을 짠 거야. 네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좌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
“내 말이 틀린가?”
카히텐의 생각이 맞았다. 헬리아스의 술수를 눈치채고도 속아주었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제 세계의 평온을 유지할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이후에 카히텐을 도와주면 소기의 책임은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조차도 공짜는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 아르키드네에게 남은 건 방관과 무시의 대가였다. 업보는 자신도 모르게 쌓였고, 이제 긴 시간을 홀로 방랑하며 빚을 청산할 일만이 남아있었다.
“이대로 살아도 나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네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재창조된 세계라고 한들, 자신이 사랑하는 그 세계와 똑 닮아 있을 것이므로.
카히텐이 망연한 그녀를 보며 작게 사과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내게 그러했듯이, 나도 이럴 수밖에 없었어.”
아르키드네는 자신이 일군 세계를 너무 아낀 탓에 카히텐의 고통을 외면했고, 카히텐은 한 여자의 영혼에 미쳐서 모든 걸 내버릴 각오를 했다.
“하지만 고작 인간 하나가 세계 전체와 맞먹는다니, 역시 이해할 수 없네.”
아르키드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새삼스럽게 복수심이나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그 정도에 미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날 때부터 지고 있던 감정은 책임감이었다.
오판을 했으니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은 레티시아 브링스턴을 지키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기억하는 세계를 빙빙 돌면서, 카히텐이 하던 기사 노릇을 대신해야 했다.
“난 너처럼 모든 걸 버릴 정도로 헌신적인 보호자가 되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만에 하나의 경우에 네 몸 하나 정도는 내 마음대로 굴려도 되겠지?”
“성력도 없는 내가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정말 막 굴릴 거다.”
“필요하다면 영혼까지 가져가도 좋아.”
“……질리게 하네.”
아르키드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형제였다.
이윽고 세계가 다시 재구성되었을 때, 아르키드네는 카히텐을 찾아 나섰다.
이제는 인간이 되어 버린 그를 찾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그의 현재 외양이 과거와 다른 탓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와 마주하니 너무나도 익숙한 외관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흑발에 적안.
무심코 고른 외양에는 과거의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분홍 머리가 아닌 건 아마 레티시아와 은연중에라도 핏줄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아르키드네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그에게 자신의 성스러운 언어를 빌려 이름을 지어 주었다.
“폴린.”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체이트 폴린이라고 하자.”
이름이 너무 눈에 띄어 좋을 건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