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34)화 (134/140)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헬리아스와 아르키드네가 동시에 내 각성을 원했는가.’

헬리아스는 나의 적이었고, 아르키드네는 그녀의 내심이 어떠하든 간에 내 조력자임이 명백했다.

둘이 같은 결과를 바란다면, 어느 한쪽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도박을 걸기로 했다.

헬리아스가 틀렸고, 아르키드네가 옳았다는 쪽으로-

나는 두 손을 움직여 보았다. 내 통제를 벗어난 신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나를 그릇으로 삼은 헬리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난처한 감정이 직접적으로 전해졌다. 분명 계획대로 현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지.

그래, 아직 이 몸은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내 정신도 온전하다.

‘지금보다 맑을 수가 없지.’

기억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코렐리아의 기억, 레티시아의 기억, 그리고 아르키드네가 기억까지…….

그녀의 기억 속에는 카히텐이 있었고, 또한 체이트가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세계 속에서 몇 번이고 나를 사랑했던 그가 있었다.

깨달은 이상,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바싹 들고, 발을 구르고, 눈을 깜박이려고 했다. 사지 전반에 힘을 주며 모든 동작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실 끊긴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던 팔이 번쩍 들린 건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이어서 눈을 떠 보았다. 눈꺼풀이 말리며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주먹을 쥐려 했다. 손가락이 하나씩 곱아들며 당차게 오므라들었다.

발을 움직이려 했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내 앞에서 로체가 고전 중이었다. 그 옆에 심장께를 움켜쥔 이안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체이트!”

쓰러진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나를 지키려고 방패를 자처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의 이마에 성력을 흘렸다. 환한 빛의 색채는 전과 비슷했으나 혈관을 휘도는 기운은 엄연히 달랐다.

지금 느끼는 이 힘은 아르키드네의 성력이 아니다.

수백, 수천 번 나를 되살리기 위해 세계를 파괴해 온 남자. 우리의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조차 나를 사랑하고, 줄곧 내게 헌신한 남자.

카히텐이었으며, 이제는 체이트 폴린이 된 그의 힘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나는 쓰러진 체이트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달려가 평평한 돌 위에 그를 눕혔다. 뒤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거세졌다. 개중 누군가가 황제를 발견했다고 소리쳤다.

내가 이 몸으로 깨어났으니 헬리아스가 이전의 육신으로 돌아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는 체이트를 일별하고 돌아섰다. 그가 줄곧 나를 지켜 왔으니 이제는 내가 그를 지켜 낼 차례였다.

그가 준 힘을 모두 소모해서라도.

“로체.”

그에게 다가가자 로체가 울상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레아 양! 나 좀 구해 줘요!”

“잘 막고 있으면서 엄살은.”

나는 혀를 차면서도 그의 멱살을 잡아 위로 띄웠다. 시체 더미에 파묻히기 직전이었던 로체의 몸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어푸, 어푸푸!”

쟤는 이 와중에도 여전히 경박하구나. 꼭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네. 너무 좋고.

“이쪽으로 와 봐.”

로체를 데리고 후방으로 갔다. 방금까지 있던 돌 위로 데려가자 로체의 시선이 자연히 기절한 체이트에게 꽂혔다.

“얘는 이 중요한 순간에 왜 이러는 거래요?”

“너 진짜 급했구나.”

그는 체이트가 나를 구하려고 몸을 날리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 듯했다.

“로체, 손을 줘.”

강제성 다분한 부탁에 로체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사태가 사태인 만큼, 되물으며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여기요.”

“고마워.”

나는 로체의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요란한 전투의 함성과 증오의 비명 사이로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그의 마력이 느껴졌다.

정령의 존재와 엘프의 마력은 카히텐으로부터 기원했다. 그 사실은 본인조차도 바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당시엔 워낙 주변에 무심했으니.

시전자가 따로 의도친 않았으나 엘프에게는 카히텐의 힘이 일부 깃들어 있었다. 그 말은 즉, 그가 카히텐의 힘을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라는 뜻일 터.

나는 비로소 아르키드네가 로체를 조력자로 선택한 수많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 힘의 근원을 깨닫도록 돕는 길라잡이인 동시에, 카히텐의 힘을 100% 실현하게끔 할 마지막 퍼즐이었다.

“레아 양?”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이게 그 여자가 말했던 ‘마지막 순간’인 거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각성을 제대로 마치려면 네 마력이 필요해.”

“들었습니다. 저는 이때 죽을 수도 있다고.”

아르키드네는 필시 로체에게 이 상황에 협조할 만한 단서를 쥐여 주었으리라. 설명에 재능이 없다는 그녀 말마따나 방식이 그리 친절하지는 않았겠지만.

“널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마력만 끌어갈게.”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늘 철없고 어리게만 보이던 얼굴이 처음으로 제 나이로 보였다.

그는 손녀를 다독이듯이 내 손등을 두드렸다.

“레아 양과는 돈과 사랑으로 묶인 사이니까요. 돈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죠.”

“헛소리 마.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 없어.”

나는 로체는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괜찮겠어?”

“네, 실수로 죽여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무덤에 조화 대신 돈다발만 놓아주신다면.”

꾸준하게 돈에 미쳐 있는 로체의 유언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오늘 죽지 않을 테니까.

“시작할게.”

“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실수로라도 그의 생명을 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로부터 마력을 이어받았다.

그가 휘청거렸다. 나는 얼른 로체를 붙들었다.

“괜찮아?”

“레아 양은…… 아, 성공적이네요.”

그가 내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페리도트가 오팔이 되었군요.”

카히텐의 푸른 기운이 나와 하나로 융화된 게 외관으로도 드러나나 보다.

“고마워. 넌 여기 있어.”

“안 그래도 기운이 싹 빠져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이 싹수 노란 살쾡이는 제가 모시고 있죠.”

로체가 체이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정이 실린 손길이었다. 나는 둘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갈게.”

고개를 돌리고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전열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멀쩡해.”

개뿔 헛소리한다. 방금 심장 움켜쥐고 있는 거 다 봤는데.

그는 발작의 고통을 억누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용케도 표정은 냉연했다.

저게 바로 왕관의 무게인가 뭔가 하는 건가. 내 눈엔 그저 객기로만 보였다.

“뒤로 가세요.”

“너는?”

“저는 강하잖아요.”

그가 피식거렸다. ‘허세는…….’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지는.

“꼭두각시들이 끝도 없군.”

헬리아스가 부리는 껍데기들이 비척비척 다가왔다. 몇 번을 쓰러뜨려도 도로 일어나는 그들의 끈질긴 움직임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저들은 이미 이지를 잃었어요. 헬리아스가 소멸하지 않는 이상 끝도 없이 밀려들 거예요.”

“그 괴물 같은 황제를 처리해야 끝난다?”

“제게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할 셈인데?”

난 씁쓰레하게 웃었다.

“카히텐 신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잖아요. 그런 원리죠.”

모두가 그의 소멸에 대해 논했다. 하지만 그는 소멸한 게 아니라 권능을 잃었을 뿐이었다.

카히텐은 절대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기 위하여.

그 과정에서조차 헬리아스를 없애지는 못했다. 그러니 미쳐버린 신을 타도할 방법은 오로지 하나다.

“인간으로 만들면 돼요.”

“뭐?”

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설명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주시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전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뒤에 계세요.”

“내가 왜…….”

“아프시잖아요.”

손목을 풀면서 말했다.

“환자는 쉬어야죠.”

“허어…….”

자존심이 퍽 상한 듯했으나 모른 척했다. 딱히 알아 주길 바란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럴 땐 내 둔감한 이미지가 참 편리하다.

이안을 억지로 보내고 앞서 나갔다. 인간의 탈을 쓴 마물들을 해치우며 조금씩 나아가자 상대 역시 그들을 옆으로 치우며 코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 뭐야.”

이내 가까워진 헬리아스의 얼굴은 흡사 야차 같았다.

“내가 너 따위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리 없는데.”

말투도 거칠어졌다. 평소의 능글맞음과 여유로움 따위는 완전히 내려놓은 모습.

‘진작 좀 이럴 것이지.’

나는 그를 신랄하게 비웃어 주었다.

“주도권을 빼앗겨요? 웃기지 마. 이건 원래 내 몸이었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 어느 순간조차 헬리아스의 것이었던 적 없는 몸이다. 남의 소중한 몸뚱이를 함부로 강탈하려는 날강도 주제에 뻔뻔하기도 하지.

“신이 돼서는 현신도 제대로 못 하고, 한심하네요.”

조롱이 익숙지 않은지, 그는 쉽게 흥분했다.

“이 하찮은 버러지가…….”

마침내 잔학하고 무정한 본모습을 드러낸 그가 손톱을 세웠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징그럽고 거대한 반인반수의 외양으로 변모해가는 그는 마치 마물 같았다.

인간도, 신도 아니다.

저건 괴물이다.

내버려 두면 해악만 끼칠 괴물.

그러니 성녀로서 응당 처리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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