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36)화 (136/140)

외전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큼지막한 손이었다.

“으음…….”

레티시아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제 앞에서 흔들리는 손바닥의 손금을 만지작거렸다.

“웬일로 벌써 일어났어요?”

손바닥의 주인, 체이트가 예의 그 커다란 손으로 레티시아를 확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에게 폭 안긴 레티시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난 원래 일찍 일어나. 누가 들으면 되게 되게 잠 많은 사람인 줄 알겠네!”

“되게 되게 잠 많은 거 맞잖아요. 툭하면 며칠씩 잠들면서.”

“야, 너……!”

레티시아가 벌떡 일어나서는 체이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두 팔로 제 얼굴을 가리면서도 그는 레티시아의 솜방망이 주먹을 열심히 맞아 주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레티시아가 아랫입술을 꾹 물고 손을 멈췄다.

‘저게……!’

“너 지금 즐기지?”

“아닙니다.”

체이트가 바로 정색했다.

“어깨가…… 으음, 탈골된 것 같은데.”

“놀리기까지……!”

발끈한 그녀의 외침에 체이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걸 눈치 채셨습니까?”

“…….”

레티시아가 삐쳐서 홱 돌아앉자 등 뒤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전혀 당황한 것 같지 않다.

‘쟤는 왜 날이 갈수록 능숙해지지?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어쩌면 그가 빠르게 어른이 된 게 아니라 이쪽이 나이를 헛먹고 있는 걸지도.

“……휴.”

짧은 한숨에 체이트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한숨 쉬면 복 날아간다면서요.”

레티시아가 가르친 말이었다. 얘는 참 학습능력도 좋지. 그새 그걸 이렇게 써먹어.

“그럼 한숨 쉬게 만들지 마. 나 그 얘기 더 하기 싫단 말이야.”

……헬리아스와의 전투가 끝난 후.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 심지어 체이트에게 제 마음을 직접 고백한 그 직후에 쓰러져서는 며칠간 일어나지도 못했다.

‘천당과 지옥을 한날한시에 오간 기분이네요.’

레티시아가 꿀잠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 기지개를 켜던 중, 체이트가 퀭한 눈으로 했던 말이었다.

당시 레티시아는 자신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성력의 무리한 사용은 종종 이렇게 신체적 방전 상태를 야기했다. 이제는 꿈도 꾸지 않았기에 그리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에도 내가 잠들어서 체이트를 곤란하게 했지.’

이제는 그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를 걱정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그 얘기가 나오면 더 예민해지는 것이다. 사실 자신 때문에 힘들었던 건 체이트 쪽인데.

“……미안. 사실 안 삐졌어.”

요즘 들어 감정이 멋대로 널을 뛴다. 이렇듯 감정 기복이 심하니 체이트도 자신을 맞춰 주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체이트는 도리어 미소 지었다. 그가 레티시아의 뒤에서 팔을 두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손이 서로 겹치며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놀려서 미안해요.”

“……그런 걸로 왜 사과해.”

“당신이야말로.”

“…….”

레티시아는 체이트의 손 안에 폭 파묻힌 제 양손가락으로 손장난을 치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 둘 다 안 미안한 걸로 할까?”

“……?”

그녀를 바라보던 체이트의 두 눈이 한 차례 깜박였다. 이어서 시원스럽게 터지는 웃음에 그가 손등으로 입을 막고 턱을 들었다.

“푸핫!”

“웃지 마!”

“귀엽게 굴어 놓고 웃지 말라니, 힘든 명령을 내리시네.”

레티시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작 이런 일로 내가? 이 내가? 말빨과 뻔뻔함으로는 어디 가서 쉽게 지지 않는…… 내가……?’

요즘 들어 쉽게 부끄러워진다. 예전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칠 개수작에도 말문이 턱턱 막히고, 사고가 정지한다.

단순했던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다. 전에 기계가 감정을 배우면 인간처럼 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딱 그런 상태다.

둔치가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고장이 났다.

……어째 성능이 기계보다 못하구나.

“오늘 몇 달 째지?”

“석 달입니다.”

“아, 석 달.”

레티시아는 체이트의 손을 끌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발이 저벅저벅 창가로 걸어가 창문 앞에 섰다.

멋들어진 석조 기둥들이 우뚝 서서 신전의 지붕을 받치고 서 있다. 음, 역시 오래된 건축물은 달라. 제법 연륜이 돋보이는군.

다른 한 편에서는 야자수가 반짝이고, 중앙에서는 새로운 대리석 흉상을 세운다고 사제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

그렇다. 이곳은 남부의 아르키드네 대신전. 성전이 있고부터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아직 북부로 돌아가지 못했다.

바로 저, 흉상으로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사제 놈들 때문에……!

“……아직도 저래?”

“예, 아직도 저럽니다.”

“반대파가 우세하다고 말해 줘, 제발.”

“레티시아, 안됐지만 반대파는 없어요. 흉상을 중앙에 놓을지, 입구에 놓을지 고민하고 있을 뿐일 겁니다.”

“……안 놓는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죠. 아시면서.”

레티시아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골이 지끈거리는 것도 차라리 다른 이유가 있다면 좋을 텐데.

사제들이 논하는 흉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레티시아였다.

전쟁 이후. 레티시아는 그냥 성녀에서 전설적인 성녀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영웅이다.

후방에 있던 사제들 중 몇몇이 그녀가 헬리아스와 맞붙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헬리아스가 완전히 소멸했으니, 레티시아를 찬양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열 받지. 죽이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영웅 취급이야? 온도 차가 너무 커서 심장마비 오겠어.’

레티시아가 입술을 비죽이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계를 재창조할 때 이 전쟁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건데.’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비상한 재주는 없었다. 세계선의 아주 작은 부분만 바꿔도 나비효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는 그대로의 현실을 원한다면 그녀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변한 건 없다. 변한 게 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녀의 일상이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

“지압해 드릴까요?”

마사지 마스터의 손길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레티시아는 망설임 없이 체이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뉘었다.

“으으음~”

기분 좋은 신음이 마치 고양이의 골골거리는 소리 같다. 체이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레티시아의 머리칼을 슬쩍 쓸어내리고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아, 하지 마.”

레티시아가 간지럼에 몸을 뒤챘다. 체이트는 얼굴을 살짝 들고,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귓바퀴에 머무른 채, 손끝으로 귓불을 살살 매만졌다.

귀를 만져 주는 것도 혈액순환에 좋습니다. 그런 반박하기 어려운 소리로 수작질을 덮어 가면서.

“그런데 꼭 북부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많지.”

체이트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답했다.

“내 친구들은 다 거기 있잖아. 델린 남작 부인이랑 한스 아저씨도 보고 싶고, 요안나 양도…… 아, 맞아. 로체가 어디서 객사 안 하고 잘 사는지도 확인해야 해.”

로체는 얼마 전에 북부로 돌아갔다. 자신은 더 이상 여기서 할 일이 없다며, 정령이 있는 숲에서 도를 닦고 싶다나 뭐라나.

‘장담하는데 한 달도 못 돼서 마을로 내려왔을 거다.’

그 녀석은 도 닦고 살기엔 너무 세속적이다. 이미 돈의 노예나 다름없다고.

“그리고 또…… 케이트 양이랑 제스 경도 보고 싶고.”

레티시아의 귀를 만지작대던 체이트의 손이 멈칫거렸다.

“그 말씀은, 카히텐 성에서…… 살고 싶으시다는 뜻……?”

“응? 아니,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잠깐 들르는 거지.”

“……그렇죠. 당연히 그렇겠죠.”

귀를 만지던 손이 조금 내려가서 목 뒤를 지압했다. 아, 시원해. 레티시아가 눈을 감고 기분 좋음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가 덩달아 풀어졌다.

“으음, 가면 겸사겸사 대공 전하를 만나서 그것도 하고.”

“……그거?”

다시 손이 멈췄다.

“응, 그거.”

“그게…… 뭘까요? 하하.”

일순 주변 온도가 살짝 낮아진 걸 느낀 레티시아가 몸을 떨었다. 남부에서 소름이라니, 이게 뭔 일이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대공 전하께 꼭 전해야 할 게 있거든. ……나만 전해줄 수 있는 거야.”

카히텐의 성력.

‘바로 네 힘이다, 체이트.’

그러나 현재로서 그 힘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건 레티시아뿐이었다. 그러니 이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 또한 그녀뿐이다.

이곳에서는 꽤 오래 쓰러져 있어서 이안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잠든 사이에 이안은 제스를 데리고 북부로 훌쩍 떠나 버렸으니까.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전생을 돌이켜보면 그에게도 빚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의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어, 체이트, 나 좀 아파. 살살.”

“아, 저도 모르게 그만.”

체이트가 무심코 힘이 들어간 손끝을 부드럽게 풀었다.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질투할 가치도 없어.’

지금 레티시아 곁에 있는 건 자신이다. 레티시아가 선택한 것도 자신, 줄곧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경계할 필요 없다. 가뜩이나 이 몸으로는 나이도 어린데, 섣부른 질투로 애처럼 보일 필요는 없잖아?

최근 체이트는 능수능란하게 보이는 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연하라는 게 귀여워서 좋다고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조금 어리숙한 느낌이 있지 않은가. 쉽게 달아오른다고 치기 어린 아이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그는 레티시아에게 어려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언제든 성숙하고 자연스러운 대처를 보여야 한다.

“아, 그리고.”

레티시아가 막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말했다.

“마카롱도 데리고 와야 해.”

“마카롱? 배고프십니까?”

“아하하,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데려온 고양이야.”

“고양, 이……?”

“응. 사고뭉치긴 해도 엄청 귀엽다고?”

“…….”

손이 완전히 멈췄다. 이상함을 느낀 레티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체이트……?”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 체이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그렇게…… 아무 고양이나 막 주워 오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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