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139)화 (139/140)

어쩐지 요즘 컨디션이 이상했다.

괜히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르내리고. 10시간이나 자고 일어났는데도 햇빛만 보면 꾸벅꾸벅 졸고 있고.

지금까지는 그게 다 날씨 탓인 줄 알았다.

중부와 남부에서 신의 존재가 사실상 사라지면서 대륙은 하나의 계절도 통일되어가고 있었다. 사계절이 뚜렷해진 이곳의 현재 날씨는 춘풍난만.

바야흐로 봄이다.

봄 하면 환절기 감기에 꽃가루 알레르기, 그리고 식곤증이 아닌가.

잠이 많아진 건 식곤증 탓.

변덕이 심해진 건 봄을 타는 탓.

그렇게 믿어 왔건만.

“임신입니다.”

“……오.”

레티시아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의사는 자신에게 임신을 통보받은 여인들 중 레티시아가 가장 반응이 조용하다고 했다.

‘조용해? 내가 지금 조용해보여?’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녀는 지금 머릿속으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드라마에서나 보던 대사를 직접 듣게 되다니!’

꿈에서나 겪은 임신을 직접 겪게 되다니이이이!

물론 엄밀히 말하면 꿈이 아니다. 그녀 자신이 겪은 일이었고, 그저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몸으로는 처음이잖아!’

레티시아는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 쥐었다.

“뭐지? 뭐가 문제였지?”

그녀가 체이트를 획 돌아보았다.

“우리…… 그렇게 철저하지 못했나?”

“……큼.”

체이트는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난처해했다. 이렇게 얼굴이 붉어진 걸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이 와중에 흔치 않은 체이트의 홍조를 보면서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자신의 어떤 부분이 글렀었는지 알 것도 같다.

“내가…… 내가 문제였어…….”

근래 한 번도 이성이 승리한 적이 없었다. 그래, 중요한 날에는 이성도 일을 좀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문제였어…….”

“레티시아.”

“내가, 내가 그때 술만 안 마셨어도…….”

“레티시아?”

“아니, 책 읽다가 눈 마주쳤을 때가 문제였나? ……맞아, 지성인이 되려다가 짐승으로 드리프트를 하는 건 몸도 예상을 못했을 거야.”

“……레티시아!”

체이트가 세 번을 부르고 나서야 그녀는 삐죽 고개를 들었다. 레티시아는 울상이었고, 체이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체이트으…… 괜찮아……?”

“괜찮냐니.”

체이트가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전 지금 당신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걸 참고 있어요. ……혼자 기뻐하는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지만.”

“응……?”

“미안해요, 레티시아.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체이트가 붉어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한숨처럼 웃었다.

“지금 너무 입 맞추고 싶은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

순간 확 치솟았던 레티시아의 감정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비로소 체이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촉촉해진 눈가, 그 밑에서 살짝 떨리는 입술, 그 입술을 자꾸만 깨무는 하얀 치아.

‘사람이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그는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고, 크게 웃지도 않았으며, 주먹을 쥐고 방방 뛰거나 저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제게 먼저 맞추었다. 제 반응을 찬찬히 지켜보며 자신의 벅찬 감정을 억눌렀다.

절제된 환희가 그의 얼굴 곳곳에서 미처 지우지 못한 채 살결을 떨리게 했다. 살랑바람을 맞은 버들잎처럼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고 파들거리는 입술.

레티시아는 체이트의 손을 내리고 그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포개져 오는 온기에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들이 현재를 그렸을 어느 밤처럼 격정적이지는 않았다.

입맞춤은 숨결을 나누듯 조심스러웠고, 마치 처음처럼 풋풋했다.

레티시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을 직시했다.

성전 이후로 단 한 번도 체이트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할 꿈은 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혼을 한다면 그 상대는 체이트일 것이며, 아이를 낳고 함께 기르는 것 또한 체이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았을 뿐, 이미 생각해 둔 바였다. 현실은 그녀의 상상과 그다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체이트는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뻐해 주었고, 자신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의 감정을 기껍게 끌어안으며 앞날을 고대했다.

두려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감격이 밀려온다. 층층이 쌓이는 퇴적암처럼 그간의 기억이 사랑이 되어 자신과 그의 결실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한때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자식을 잃었다. 그러나 이번 생의 그녀는 다를 것이다. 현재 그들은 ‘우리’였으며, 결코 떨어지지 않은 하나였다.

괜찮을 것이다. 이번 생만큼은, 진실로 죽는 날까지 평온하게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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