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소중한 아들, 해그냥에게]
네가 이 편지를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언젠가 이 편지를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글을 쓴다.
할 말은 많지만 내게 남겨진 시간이 별로 없다.
여기에 적은 마법사들은 모두 내게 이전에 큰 빚을 진 자들이다.
이들을 찾아가면 너를 도울 것이다.
너는 나의 인생이었고, 세상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찰나도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너를 지키고자 했지만, 먼저 떠나게 되었다.
사랑한다.
제1마을: 하피 독수리, 론
제2마을: 검은 마녀, 라키
제3마을: 마녀국밥 주인, 김순자
제4마을: 대예언자, 욘 게일
제5마을: 약방 할매, 탱다리 보니
제6마을: 그림자 마법사, 말룸
제7마을: 소울스위퍼, 리도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숨이 차올라 헐떡이면서도 눈으로는 맹렬히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는 오직 까마귀 눈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그냥 봤을 땐 분명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엽서였다.
‘어째서 까마귀 눈을 통해서만 보이는 거지? 혹시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이 편지 내용을 통해 유추하자면 엄마는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엄마에게 빚을 진 마법사들이 저리 많다고?
엄마는 마법사였고, 내가 혼혈이라는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었지만 믿기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들에게 찾아가 도움을 받으라고?
이 편지에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쏙 빠져 있다. 대체 무슨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까?
그리고 어머니는 왜 내게 정체를 숨긴 걸까?
그때였다. 마치 그 답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까마귀 눈알 속에 비친 아버지의 옷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까마귀 눈알을 떨어트렸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진정하자.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잖아.’
떨리는 손으로 옷을 더듬었다. 역시나 그냥 봤을 때는 옷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까마귀 눈알을 통해 옷을 비추어 봤다.
옷에서는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옷을 집었던 손가락 사이로 미적지근한 피가 흘렀다.
“으아악!!!”
난 옷과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장롱에 뒤통수를 세게 박았다.
그리고 곧장 세면대로 가서 맨눈으론 보이지도 않는 핏물을 씻고 또 씻었다.
까마귀 눈알은 그런 내가 걱정됐는지 통통 튀어서 화장실로 쫓아왔다.
“말도 안 돼. 어째서 아버지 옷에 피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옷이 이렇게나 처참하게 피로 얼룩져 있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설마….”
차마 이 말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피 묻은 옷은 어쩌면 아버지가 지병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누군가 아버지를 죽였다면? 그리고 마법을 걸어서 아무도 볼 수 없게끔 한 것이라면?
‘피 묻은 옷을 눈앞에 두고도 이제껏 난 아무것도 몰랐다니….’
난 중학교 동창이자 경찰인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를 도와줄 유일한 친구였다.
고교 시절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진우는 어엿한 경찰이 되었다.
유도가 4단인 그는 강력팀 내에서도 뛰어난 검거 실적으로 체포왕으로 불렸다.
아버지의 옷에서 피가 나온 지금, 당장 내 주변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진우야, 좀 급해서 그런데 당장 와 줄 수 있어?”
“나 이틀 밤새고, 이제 집에 들어왔어. 야식 먹자는 거면 나중에.”
“그런 거 아니야. 그… 설명하자면 길어. 바로 좀 와 줘.”
내가 자못 심각한 말투로 이야기하자 진우도 곧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감이 좋은 친구다.
“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10분, 아니 5분이면 간다.”
ㅡ띠띠띠띠.
집 앞에 도착한 진우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마, 너 어디 아파? 왜 그러고 있어?”
난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진우야, 저기 옷 보여? 낡은 스웨터.”
“바닥에 있는 거? 보이지. 근데 왜?”
“이제 이거 들고 봐.”
까마귀 눈알을 건네자 진우가 이를 무심코 받았다.
“이, 이거 뭐야? 좀 미끌거리는데?”
“까마귀 눈알인데.”
“너 장난이지? 이씨, 너무 징그럽잖아.”
내 말을 들은 진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까마귀 눈알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휴…. 그럼 내가 들고 있을게. 이걸 통해서 한번 봐 줘.”
“나 참! 뭘 보라는 거야? 그리고 이거 설마 진짜 까마귀 눈알은 아니지? 농담이지?”
“잔말 말고 어서!”
“알았다. 인마. 하여튼 오늘 이상하네. 자식이….”
진우는 까마귀 눈알이 끔찍한지 진저리치면서도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까마귀 눈알을 통해 이곳저곳을 살폈다.
“대체 뭘 보라는 거야?”
“스웨터에 묻은 피, 넌 안 보여?”
“옷에 피가 묻었다고? 어디에?”
진우가 성큼성큼 걸어가 바닥에 놓인 스웨터를 들고 핏자국을 찾았다.
“핏자국 같은 건 없는데?”
“하아…. 진짜 미치겠네.”
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야! 좀 이해할 수 있게끔 말을 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할게. 이 엽서 좀 읽어 봐.”
나는 긴장한 채 엽서를 진우에게 건넸다.
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안 보인다는 것을.
“아무것도 없는데 뭘 읽으라는 거야? 너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알지? 뭔 일 있어?”
“아…. 아냐. 내가 뭘 좀 잘못 봤나 봐. 얼른 가 봐. 피곤한데 불러내서 미안해.”
현 상황을 진우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안 가겠다고 버티는 진우를 겨우 돌려보냈다.
‘다신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어쩔 수가 없네. 무조건 가야만 해. 그 카페 사장이란 자는 뭘 알지도 몰라.’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난 아침 일찍부터 카페로 향했다.
회사는 부장에게 병가를 쓰겠다고 말해 두었다.
부장에게 뭔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건강 잘 챙기라며 평소와는 딴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회사 앞에서부터 찬찬히 기억을 되짚으며 발걸음을 뗐다. 다행히도 카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장은 날 보더니 의외라는 듯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웬일이래? 다신 안 올 줄 알았더니.”
“사장님,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난 머뭇거릴 여유 없이 바로 종이 봉투에서 옷가지와 엽서를 꺼냈다.
사장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니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흠…. 어디 보자.”
사장이 테이블 위를 돌아다니는 까마귀 눈알 하나를 집어서 눈에 가져다 댔다.
“옷에 마법이 걸려 있네. 그나저나 이 끔찍한 건 뭐야?”
“저희 아버지 유품이에요. 이전엔 몰랐는데 어제 우연히 까마귀 눈알을 통해서 진짜 모습을 봤어요.”
“까마귀 눈알은 마법 주문을 꿰뚫어 보거든. 아주 상위 마법만 아니면 어지간한 것들은 볼 수 있어.”
역시나 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챙겨 온 다른 물건들도 꺼내서 사장에게 보였다.
“옷 말고 엽서도 있어요. 어머니가 제게 남긴 편지예요.”
사장은 엽서를 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뭐랬어. 너 혼혈 맞댔잖아. 궁금한 게 많은가 본데…. 편지에 적힌 자들을 한 명씩 만나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어?”
“여기 이 일곱 마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
“마법사 세계는 인간의 지도 속에선 찾을 수 없어. 굳이 위치를 찾자면 태평양 가운데쯤 되겠다.”
“태평양 가운데요? 바닷속에서 산다는 말이에요?”
사장이 나의 빈약한 상상력에 눈을 흘기며 말했다.
“생각하는 수준하곤…. 구부러진 큰 섬 하나랑 작은 섬 하나, 총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야. 꼭 물음표처럼 생겼지.”
사장은 주방에서 얇은 가죽으로 만든 지도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오래된 보물 지도 같은 모습이었다.
지도를 보니 사장의 말대로 태평양 한가운데 물음표 모양의 큰 섬이 있었고, 면적은 대충 한반도와 유사했다.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마법사 세계가 들키지 않고 유지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근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를 수 있죠?”
“장막으로 가려 놔서 인간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어갈 수도 없어. 인간세계에서 마법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브릿지를 통해야 돼.”
“브, 브릿지요?
“그래, 여기 이 카페도 브릿지 중 하나지. 저기 주방 안쪽에 있는 청록색 문을 열면 마법 세계로 갈 수 있어.”
내 시선이 순간 문을 향했다가, 다급하게 다시 사장을 향했다.
“그럼 저 문을 열면 엽서에 적힌 마을이 나오는 건가요?”
“들어 봐. 마법 세계는 총 7마을로 나뉘어 있어. 마을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마법사들이 살고 있지.”
사장은 검지로 제일 위에 있는 마을을 짚었다.
“우선 1마을은 인간과 동물, 두 개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루베로(luveiro)들이 모여 사는 곳이야. 바로 밑 2마을은 원래는 대대로 회색 마녀 가문이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사장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며 작아졌다.
“회색 마녀가 사라진 후로 지금은 각 마을에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 마법사들의 안식처가 됐지. 3마을은 마법사 장터가 열리는 곳이야. 저 청록색 문은 이 3마을과 연결돼 있어.”
“그럼 지금 당장 갈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난 엽서에 적힌 ‘3마을 마녀국밥 김순자’를 보며 물었다.
“아쉽게도 마법사 거리는 한 달간 휴점 중이야.”
“휴점이요? 왜요?”
“왜긴, 상인들도 쉬어야 되니까 그렇지.”
사장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4마을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마법사들이 살아. 주로 마법의 연구, 교육을 맡고 있고, 예지력을 최고의 능력이라고 평가하지.”
나는 사장과 편지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4마을에선 대예언자를 만나라고 한 거구나.’
“4마을 마법사들은 정말 딱 질색이야.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마법사들의 능력을 하대하고, 혼혈을 혐오하거든.”
사장이 으, 하는 표정을 지으며 싫어 죽겠다는 듯 말했다.
“5마을은 자연 보존 지역이야. 전설의 용 피누누도 이곳에서 볼 수 있어. 6마을은 그림자 마을이야. 어둠의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모여 이룬 동네야. 주로 조종, 흑화, 저주 등 금지된 마법을 쓰고, 죽음을 신봉하지.”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내가 맨 아래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섬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어제 말한 해그냥 섬.”
“휴양지라고 했죠?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마력의 원천이 되는 신성한 섬이자 마법사들의 휴양지지. 다만 이곳은 오직 섬이 스스로 선택한 자들만이 살 수 있어.”
“그래서 말인데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제가 아는 마법사는 사장님뿐이라….”
“하! 맨입으로? 내가 왜?”
사장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순순히 도와줄 리가 없지.
나는 종이 봉투 맨 아래쪽에서 사장에게 줄 물건을 꺼냈다.
이걸로 사장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