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5)

#004화

내가 꺼낸 것은 보라색 스카프였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는데 오래된 물건치고 상태가 좋았다.

사장은 첫 만남서부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채도가 다른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이 보라색 스카프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가져왔는데, 사장의 눈빛이 영 심상치 않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매사 시큰둥해 보이던 사장이 격양된 표정으로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너 이게 지금 뭔지는 알고 주는 거야?”

사장의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평범한 스카프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실로 어마어마한 물건일지도.

“뭔지… 알죠. 그… 아주 특별한 물건이잖아요?”

사장의 격한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쥐고 있는 패가 꽤 좋은 패인 모양이다.

“지금 이거 주고는 나더러 일곱 마을 순회 가이드하면서, 네 뒤치다꺼리를 하라는 거지?”

사장이 스카프를 펼쳐서 어깨를 둘렀다. 오묘한 보랏빛이 아주 잘 어울렸다. 마치 원래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말해! 어디서 났냐니까?”

채근하는 사장의 등쌀에 이실직고했다.

“실은 어머니가 남긴 물건이에요. 어차피 제가 쓸 것도 아니고, 어머니도 서랍에만 있느니 누군가 잘 쓰길 바라실 거예요.”

“흠…. 어머니가 남긴 물건이라는 거지? 이건 회색 마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야. 이걸 네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다는 건, 네 어머니 역시 회색 마녀였다는 뜻이고.”

“저희 어머니가요?”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어머니가 마녀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혼란스러웠다.

“이 일은 어쩐다? 이걸 받아, 말아?”

사장은 고심 중이었다. 지금으로선 사장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난 혼란스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사장을 설득했다.

“부탁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 사장님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 마을들을 다 가 보겠어요.”

사장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손님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새로운 직원인가 보죠?”

사장이 스카프에서 채 눈을 떼지 못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네. 커피값이 없다길래 일을 좀 시키고 있어요.”

“내가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닌데… 괜찮다면 나를 따라오지 않겠나? 내가 1부터 7마을까지 여행을 할 예정이거든. 혼자는 적적해서 말이야. 커피값도 내가 줌세.”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바라봤다. 사장은 야멸찬 시선으로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봤다.

“혹시 사장님이 정 안 되시면, 전 이분이라도 따라가는 게….”

“그래? 과연 그게 나은 선택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리진 않겠어.”

사장이 목에 두른 스카프에 보석 브로치를 다는 것에 집중하며 말했다. 내 제안을 수락한다는 신호였다.

‘사장이 좀 까칠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으니….’

“할아버지, 제안은 감사하지만 전 이분과 먼저 함께하기로 해서요.”

노인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 별수 없군.”

자비로운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섬뜩한 표정에 내 선택이 옳았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근데 저분은 누군가요?”

“악초 할아범이야. 악한 성질을 가진 풀을 키우지. 넌 지금 그곳에 팔려 갈 뻔한 거고.”

나가는 할아범의 뒷모습을 보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와중에 사장이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식기 전에 마셔. 돈은 안 받을 테니.”

“네…. 그럼 저 도와주시는 거죠?”

“뭐, 내가 밑지는 거래는 아닌 거 같네. 안 그래도 다음 주 정도에 1마을에 갈 예정이었거든.”

“1마을이라면….”

“인간과 동물, 두 개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루베로(luveiro)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지.”

“다음 주 주말에 가요. 혹시 모르니까 월요일에 연차를 쓰려고요.”

사장의 협조를 구한 나는 그제야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어제 마셨던 커피보다 혀끝에 쓴맛이 강하게 맴돌았다.

그때 갑자기 울컥하고 가슴에서 뭔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채 인지하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눈물이.

지금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슬픔, 슬픔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평생을 혼자 살아오면서 느낀 외로움. 그리고 그 외로움이 정당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불안감. 억울함.

우리 부모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입고 있던 맨투맨 티셔츠의 소매가 다 젖을 때까지 한참을 흐느꼈다.

“사장님… 눈물이… 안 멈춰요….”

사장은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러길래 누가 눈물을 그렇게 오래 참으래?”

***

커피엔 이제껏 참았던 눈물을 흘려보내는 마법이 녹아 있었다. 내가 삼켰던 눈물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하도 울어서 기진맥진했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사장은 그 소리를 듣더니 짜증을 내며 쟁반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으이그! 가지가지 하네.”

짜증 섞인 말투와는 다르게 사장은 따뜻한 음식을 건넸다.

“얼른 먹어.”

“고맙습니다.”

접시 한가운데에는 밥이 올려져 있고, 그 주변으로 잘게 다진 고기와 야채를 넣은 빨간색 스튜가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언뜻 밥으로 보였던 것은 어지간한 성인 주먹보다도 더 큰 쌀알이었다.

“쌀알이… 엄청 크네요.”

“왜, 그쪽 세상엔 큰 쌀알이 없어? 안 간 지 오래라 기억이 잘 안 나네.”

난 커다란 쌀알을 숟가락으로 푹 퍼서 국물에 묻혀서 한입 가득 넣었다.

촉촉하고 쫀득하면서 입안에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식감이 느껴졌다.

“흘리지 좀 말고 먹어.”

말로는 신경질을 내도 사장은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다 먹을 때쯤 사장이 말했다.

“부모님 유품이 이것뿐이야? 남은 것도 다 가져와 봐.”

나는 입안에 있는 쌀알을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초 몇 개랑 만년필 한 자루가 다예요. 내일 올 때 챙겨 올게요.”

***

카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커피의 마법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눈가가 촉촉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누웠다. 창밖으론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가 들렸다.

‘그날도 비가 왔지.’

억수로 비가 쏟아지던 날, 어머니는 학원으로 나를 데리러 오다가 변을 당했다.

‘그날 내가 우산만 챙겨 갔었더라면….’

뺑소니 사고였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다.

일가친척도, 흔한 보험 하나 없었던지라 그날 이후 내 삶은 냉혹한 현실에 내던져졌다.

엄마가 마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난 궁금한 게 너무 많다.

이토록 많은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능력 있는 마녀였던 엄마가 왜 굳이 인간 세계로 온 걸까?

엄마는 왜 내게 모든 걸 비밀에 부쳤을까?

그래 놓고 편지를 남긴 이유는 뭘까?

엽서에는 ‘할 말은 많지만 시간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란 것을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피하지 못했을까?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와중에도 피곤했는지 잠이 쏟아졌다.

다음 날 아침, 요 며칠 일어난 일들이 부디 해괴한 개꿈이기를 바라면서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안경을 쓰지 않아도 앞이 잘 보였고, 일하다가 손등에 물린 개구리 틀니 자국도 그대로였다.

“우리 엄마가 마녀라고 하더라도, 내가 출근을 해야 되는 사실엔 변함이 없구나.”

기지개를 켜지 않아도 몸이 가뿐했다. 아무래도 커피를 마신 효과인 것 같았다.

‘커피에 뭘 넣으면 그렇게 되는 걸까?’

망상은 접어 두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제도 병가를 냈는데, 오늘 늦기라도 하면…. 부장이 윽박지르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가야지….”

커피의 효능으로 몸이 가뿐해졌다고 한들 회사에 가는 발걸음까지 가볍게 만들지는 못했다.

난 어깨에 엇갈려 메는 검은색 인조 가죽 가방에 유품인 초와 만년필을 담았다.

퇴근 후에 사장에게 가져가 보여 줄 참이었다.

회사 일은 그럭저럭 할 만했다. 출근이 싫은 이유 중에 8할은 일이 아닌 사람이었다.

나진성 부장은 아침 댓바람부터 최선유 대리에게 오늘 점심 먹을 식당을 예약하라고 지시했다.

“최 대리, 저번처럼 맛대가리 없기만 해 봐. 이런 거라도 제대로 해라. 좀!”

인턴인 나나 김주연에게 시켜도 될 일이었지만, 최 대리를 콕 집어 시켰다.

지난주엔 김주연 인턴이 식당 예약을 대신했다가 계 차장에게 호되게 욕을 먹었던지라,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 대리님이 어떤 곳을 예약하든 회사랑 너무 멀다, 너무 가깝다, 맛이 없네, 짜네, 메뉴가 지겹네 등 트집을 잡을 게 분명했다.

‘오늘은 또 뭐라고 갈구려나.’

나 부장은 최 대리가 예약한 식당 위생이 별로라면서 욕지거리를 해 댔다.

“시발, 부엌이 존나 더러워서 입맛 떨어져서 잘 먹지도 못했다.”

분명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걸 내가 봤는데 뭐라는 건지.

군기가 바짝 든 최 대리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야, 누가 보면 우리가 괴롭히는 줄 알겠다. 적당히 해라. 모자란 새끼.”

계 차장은 최 대리를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고는 전자 담배를 물고 나갔다.

난 입에서 박하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최 대리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난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자는 나름의 소신을 잘 지켜 왔다.

초등학교 때 따돌림을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다가 역으로 왕따를 당한 적이 있었다.

우습게도 정작 내가 도와줬던 친구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날 괴롭히는 것에 앞장섰다.

그날 이후로 난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그만뒀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점심시간이 끝나기 15분 전, 답답한 마음에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칼바람이 귓가에 스쳤다. 그때 옥상 끄트머리에 최 대리님이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밑을 내려다봤다. 회사에서 그에게 안식을 주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최 대리님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왔다.

“여기 계셨네요. 최 대리님.”

“네, 저 먼저 내려갈게요.”

우린 판에 박힌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오늘따라 그의 안색이 더욱 시커멓다.

우리가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쯤 갑자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이, 이게 뭐야!”

난 화들짝 놀라 가방을 벗어 던졌다.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초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었다.

초는 불씨도 없이 저절로 빛을 냈다. 사파이어처럼 선명한 푸른색 빛이었다.

난 조심스럽게 가방 안쪽에서 휴대폰과 지갑 사이에 있는 초를 꺼냈다.

뜨거울까 봐 오만상을 다 썼지만 실제론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가방 안에 있던 물건도 멀쩡했다.

‘물건을 태우지 않는 불이라니….’

초는 순식간에 짧아지더니 심지를 모두 태우고 완전히 사라졌다.

***

“초가 갑자기 스스로 타 버렸다고?”

퇴근 후에 카페에 온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사장에게 털어놓았다.

“가방 안에 있던 초에 갑자기 불이 붙더니 한 4~5초 만에 사라졌어요.”

“무슨 색이었는데?”

“초요? 흰색이요.”

“아니, 초가 타면서 무슨 빛을 냈냐고.”

“아, 푸른빛이요. 꺼지기 직전에는 진짜 더 파랗게 빛났어요.”

“음…. 푸른색, 푸른빛이라. 그렇다면 그 사람 곧 불행해지겠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초가 타기 전에 스쳐 지나갔다던 사람 말이야.”

“최 대리님이 불행해진다고요? 글쎄, 그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불행한데.”

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왜 그렇게 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 그 사람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뇨. 제가 뭘 특별히 잘못한 건 없는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한 것으로 죄를 지은 것 아니냐고.”

난 괜히 뜨끔해서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불행해요. 더 불행해질 수 없을 만큼요.”

“솔직히 말해 줘?”

“뭘요?”

“그 푸른빛 말이야. 죽을 징조야.”

“죽다니…. 왜요?”

화들짝 놀라 되묻는 나와 달리, 사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건 모르지. 그 초는 징조를 밝히는 초야. 좋은 징조는 붉은빛을, 나쁜 징조는 푸른빛을 내지. 노란빛은 때에 따라 좋은 일이 될 수도,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고.”

“그럼 최 대리님이 정말 죽는다는 거예요?”

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이제껏 초가 푸른빛을 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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