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75)

#007화

잠시 입을 푼 아주머니가 아나운서만큼이나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저기 나 부장이 최 대리 뺨 때리는 거. 그때 내가 사무실 바닥을 쓸고 있었는데 난 신경도 안 쓰더라고? 바닥에 코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마음 아파서 혼났네.”

연신 억울하다고 울먹이던 나 부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아무튼 최 대리 좀 그만 괴롭혀. 이러다가 사람 잡겠어. 이 못돼 처먹은 인간들아!!!”

아주머니의 사자후가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어디 그뿐인가? 마케팅부에 이승훈 대리는 8개월 만삭 아내를 두고 왜 이렇게 최나리 사원에게 찝쩍대는지, 남형식 본부장 방 쓰레기통에는 VIP 리스트라고, 하반기 공채에 지원한 높으신 분들 아드님, 따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지.”

이후에도 아주머니의 실명 파티는 계속됐다.

타 부서의 왕따 논란, 실적 가로채기부터 하청 업체 갑질, 자잘하게는 법인 카드의 개인적 사용까지. 온갖 회사의 어두운 면이 쏟아졌다.

감사팀장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아래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주머니의 말을 녹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난 나 부장과 계 차장에게 빅 엿을 먹이는 데 성공했음에도, 예상보다 커진 상황 때문인지 간담이 서늘했다.

***

회사 내 분위기는 흉흉했지만, 그럼에도 출근길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적어도 나진성 부장과 계우진 차장의 면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쓰린 속에 흐르는 위장약처럼 속을 편하게 해 주었다.

두 사람은 감사팀에 불려 가서 조사를 받았고, 머지않아 김 사원이 폭로한 내용은 새 발의 피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해고를 피하지 못했다. 간부의 부당한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감사팀에 눈물로 호소한 김인배 사원은 6개월 감봉과 부서 이동을 당했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는 그의 굳은 신념이 잠시 삐끗하는 순간이었다.

뻔하게 흐르는 세상에도 종종 이기다가도 지고, 지다가도 이기는 등락과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탓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떠나는 건 나 부장과 계 차장만이 아니었다.

용대용은 결국 회사와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비위자는 용서해도 내부 고발자는 받아 주지 않는 게 회사의 생리였으니까.

김주연 인턴은 대외 이미지를 생각해 달라는 회사의 종용에 결국 계 차장과의 일을 조용히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절반의 승리도 아니고, 그냥 온전한 패배였다.

난 사무실에 씁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최선유 대리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손으론 가방 안에 든 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최 대리님, 안녕하세요.”

“네. 해그냥 씨 일찍 왔네요.”

잔뜩 긴장한 채 그의 옆을 지나는데 역시나 가방 안에 든 초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치솟는 불길에 놀라 가방을 벗어 던졌다.

“괜찮으세요?”

난 멋쩍게 웃으며 떨어진 가방을 주웠다.

초는 개나리처럼 노란빛을 내더니 순식간에 심지를 모두 태우고 사라졌다.

‘색이 바뀌었어! 노란빛은… 때에 따라 좋은 일이 생길 수도,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랬지.’

푸른빛에서 노란빛으로 바뀐 것만으로 안심이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사장이 그랬다. 사람들은 대부분 노란빛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그때 갑자기 찌릿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양손에 뜨거운 커피잔을 들고 있던 김주연 인턴이 사무실 입구에서 발이 접질리면서 심하게 넘어지는 장면이었다.

분명 기억도, 상상도 아니었다. 연사로 찍은 일련의 사진을 순식간에 본 기분이랄까?

대체 이게 뭐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침 김 인턴이 복도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잠깐, 잠깐만요 주연 씨!”

분명 방금 봤던 장면 속과 같은 모습이었다.

김 인턴이 입고 있는 옷부터 들고 있는 커피, 신고 있는 높은 굽의 부츠까지 똑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김 인턴에게 달려갔고, 넘어지기 직전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꺄악!”

이미 발목이 접질린 후였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고, 커피도 쏟지 않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네. 고마워요. 해그냥 씨.”

내가 방금 머릿속으로 봤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자,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미래가 보인 거 같은데…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최 대리는 인턴을 부축하고 오는 날 보며 ‘그 친구가 넘어질 줄 어떻게 알고 달려갔느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주연 씨가 넘어질 줄 어떻게 알고 달려간 거예요?”

“어째 걸어오는 폼이 위태위태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짐이나 들어 주려고 간 건데….”

난 화제를 돌리자 싶어서 카페에서 챙겨 온 케이크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케이크요. 제가 어렵게 구한 거라 최 대리님이 꼭 드셨으면 좋겠네요.”

최 대리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빙그레 웃으며 케이크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사실 이 케이크는 사장이 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케이크에는 그간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은 덤덤해지고, 미래에 막연한 기대를 걸게 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내가 케이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갈 때쯤 용대용 씨가 들어왔다.

“이거 해그냥 씨가 준 케이크인데 같이 먹을까요?”

“좋아요. 제가 커피 내려 올게요.”

그렇게 세 사람은 사이좋게 삼등분한 케이크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가서 한 조각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케이크에 담긴 마법이 그들에게 온전하게 전달되길 바라며.

***

“머릿속에 빠르게 어떤 이미지가 지나갔는데, 정확히 5~6초 후에 정말 그 일이 일어났다니까요?”

퇴근 후 어김없이 들른 카페에서 난 사장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

“아니요. 처음이에요.”

내 이야기를 들은 사장이 흠, 턱 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 아무래도 너한테 미래시(未來示)가 생긴 것 같은데….”

“미래시…요?”

“그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말이야.”

생각보다 거창한 표현에 나도 모르게 양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미래를 본다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어요. 겨우 5초 남짓했을 뿐인데….”

내 말을 들은 사장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5초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쨌든 미래를 봤다는 게 중요하지. 그게 나중에 5분이 되고, 5년이 될지 누가 알아?”

사장의 말이 허황되고, 현실감 없이 들리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어째서 갑자기 제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네가 직접 마법을 쓴 건 아니지만, 스스로 마법 도구를 사용했잖아. 그게 네 안에 있는 마력을 자극한 게 아닐까 싶은데….”

사장도 그닥 확신이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조금 더 생각을 하던 나는 아차, 사장이 이전에 말했던 것이 떠올라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모님 유품 가져오라고 하셨죠? 이제는 이 만년필이 다예요.”

사장이 엄마의 이름이 각인된 낡은 만년필을 이리저리 살폈다.

“음…. 지팡이네.”

“네? 이게 지팡이라고요? 그 마법 쓸 때 휘두르는 그 지팡이요?”

“근데 너무 오래 안 써서 고장 났어. 3마을에 지팡이 수리점에 가서 고쳐야겠는데.”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본 나는 이내 이전에 사장이 해 준 설명을 떠올렸다.

“아, 3마을은 지금 휴점 중이라고 하셨죠.”

“응. 이거 완전 맛이 갔네. 고치려면 애 좀 먹겠어.”

사장의 말을 듣고 나니 평범한 만년필이 달리 보였다.

‘정말 이게 지팡이라고? 그것도 어머니가 쓰던 것이라니….’

“그나저나 내가 오늘은 빵을 많이 구워서 피곤해. 지금 문 닫을 거야. 너도 가.”

집에 가 봐야 할 일도 없고, 괜히 잡생각만 많아지는지라 이젠 되레 카페에 있는 게 편했다.

“왜요. 쉬고 계시면 일은 제가….”

누군가 등을 부드럽게 미는 촉감이 느껴지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문밖에 서 있었다.

“사람을 내쫓고… 너무하네.”

허탈한 마음에 문고리를 돌려 봤지만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풀이 죽어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머니에 저번에도 집에 왔었던 까마귀 눈알이 들어 있었다.

“어? 너 그때 그 녀석이지. 너 내가 마음에 드는구나? 같이 가자.”

우린 방 두 개짜리 허름한 빌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까마귀 눈알은 통통 튀어서 식은 녹차가 담긴 머그 컵 안으로 뛰어들었다.

난 물놀이 중인 녀석에게 푸념처럼 말을 걸었다.

“휴…. 넌 몸은 어디다 두고 눈알만 굴러다니니.”

그러자 마치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하는 듯이 까마귀 눈알이 머그 컵에서 나와 거실에서 통통 튀기 시작했다.

“뭐야, 너 내 말 이해하는 거야?”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모지 한 장에 ‘O’를, 다른 한 장엔 ‘X’ 표시를 그리고 식탁 위에 두었다.

“내 말을 이해하면 O 쪽으로 가봐.”

까마귀 눈알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O’라고 적힌 메모지 쪽으로 굴러갔다.

“진짜 알아듣나 보네?”

이건 또 생각도 못 한 특이한 경험이었다.

나는 조금 전 가졌던 의문을 까마귀 눈알에게 물었다.

“네 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녀석은 ‘X’라고 적힌 메모지 쪽으로 미끄러지듯 굴러갔다.

“대화가 예, 아니오로만 되니까 제약이 너무 많은데.”

그때 까마귀 눈알이 통통 튀어서 책장에 있는 만년필 잉크를 떨어뜨렸다.

“이건 왜? 이걸 부어 보라고?”

난 까마귀 눈알이 이끄는 대로 잉크를 작은 접시에 부었다.

까마귀 눈알이 거침없이 접시 위로 뛰어들자 검은 잉크가 얼굴과 옷에 튀었다.

“아! 맞다. 종이!”

노트를 꺼내 오자 까마귀 눈알은 종이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마구 회전했다.

그러다가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면서 어떤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글씨를 확인하자마자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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