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75)

#008화

도와 달라고 적힌 종이를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널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누구야?”

[몰라요. 거미줄. 걸렸어요. 눈. 가져갔어요.]

까마귀 눈알은 검은색 잉크로 뒤범벅이 된 채 힘없이 축 처졌다.

“어? 너 왜 그래?”

급히 눈알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다.

‘잉크가 너무 독했나. 잘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까마귀 눈알이 쉴 수 있도록 작은 둥지를 만들었다.

세숫대야에 폭신한 방석을 깔고, 미지근한 물이 담긴 작은 접시를 둔 게 다였지만.

“이름이 뭔지 못 물어봤네. 잉크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눈알에 닿으니까 안 좋은 거 같더라.”

까마귀 눈알은 방석도 마다하고 내 손바닥 위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내일 사장님한테 같이 가 보자. 네 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

난 전날 밤 까마귀 눈알과 있었던 일을 사장에게 털어놓았다.

“쟤가 말해 준 거야?”

사장이 손가락으로 손님이 남기고 간 사마귀 녹차에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는 까마귀 눈알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근데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눈을 빼앗긴 까마귀들이 모여서 지내는 작은 섬이 있어. 나는 커피 값으로 받은 까마귀 눈알을 모아서 까마귀들에게 돌려주러 가.”

“아, 그랬구나. 그럼 이 녀석의 몸도 그곳에 있을까요?”

“가 봐야 알겠지. 너랑 대화가 통하는 것을 보니 루베로인 게 분명해.”

루베로는 인간과 동물, 두 개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눈을 빼앗긴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눈을 빼앗긴 까마귀들이 있는 곳은 어디예요?”

“내가 1마을에 갈 일이 있다고 했었지? 그게 바로 이 일이야. 우선 까마귀 눈알을 돌려주고 나서, 너희 어머니 편지에 적힌 루베로를 찾을 생각이야.”

난 커피잔에 비스듬히 놓인 티스푼을 미끄럼틀 삼아 노는 까마귀 눈알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까마귀 눈알은 이동 거울과 안경알의 재료로 값비싸게 거래돼. 추적도 되지 않으니 불법 마법의 자금을 모으는 데 유용하지.”

마법 세계라고 꿈과 희망만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돈이면 끔찍이도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 세계와 어쩜 이리 닮아 있는지.

“내가 누군지 찾아내서 산 채로 눈이 파이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줄 생각이야.”

사장의 눈빛을 보아하니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이들을 어떻게 잡죠? 듣기론 커다란 거미줄에 걸렸다고 했는데….”

“거미줄? 음…. 거미줄이라…. 저기! 화가 선생! 이제까지 우리 이야기 다 들었지?”

빈티지한 고동색 베레모를 쓴 거미가 사장의 어깨에서 우아한 발동작으로 내려왔다.

“까마귀 떼가 잡힐 정도로 크고, 견고하게 만들려면 아무래도 거미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화가 선생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어떤 미션을 받은 것처럼 서둘러 주방 안쪽에 있는 청록색 문을 열고 나갔다.

“뭐 짚이는 게 있나 봐. 기다려 보자. 촉이 좋은 친구니까.”

“저 거미가 화…가인가 보죠?”

사장은 인간 외 생물에 대해 무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은 대답 대신 벽면에 걸려 있는 200호는 족히 돼 보이는 커다란 그림을 가리켰다.

그림에 조예가 있을 리가 없는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작품인 것이 분명했다.

보색의 잔상과 병치 혼합의 기술을 활용한 점묘화였는데, 오묘한 색감으로 표현한 해 질 녘 바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럼 화가 선생이 저 그림을…?”

“그래. 훌륭한 화가지. 지금은 다리를 다쳐서 내 머리 위에서 쉬면서 재활 중이야.”

거미를 머리카락을 고정해 주는 장식 정도로 여겼던 내 편협한 생각을 반성했다.

거미가 사라지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사장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떨어졌다.

사장이 공중에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자 머리카락이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말려 들어갔다.

“내가 이쪽으론 영 솜씨가 없어.”

실제로 머리 위에 똥을 얹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난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둘러댔다.

한가로운 오후, 커피값으로 오징어 먹물을 가져온 손님 덕분에 난 까마귀 눈알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자, 종합하면 네 이름은 미고, 남자고, 나이는 15살이랬지? 부모님은 어디 계셔?”

탁자 위에 펼쳐 놓은 도화지는 미고가 쓴 글씨로 가득했다.

[돌아가셨어요.]

까마귀 눈알 밑으로 종이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나도야. 나도 부모님이 안 계셔.”

미고는 도화지의 반가량을 축축하게 적시고 나서야 힘없이 창문 쪽으로 굴러갔다.

그때 열댓 명의 키가 크고, 우락부락한 도깨비들이 바닥에 진흙을 떨어트리며 들어왔다.

코, 귀, 눈썹 등에 피어싱을 잔뜩 해서 걸을 때마다 작은 쇳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난 2미터가량의 커다란 몸집과 위협적인 외모에 압도돼 다소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어서 오세요.”

사장은 그들을 ‘슈슈’라고 부르며 반가워했다.

“너희가 사는 굴이 무너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괜찮은 거야?”

그중 제일 체구가 큰 대장 슈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 그냥 줄게. 근래 고생 많았을 텐데….”

슈슈는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커다란 짐승의 넓적다리를 꺼냈다.

“램보리 사냥했어? 에휴! 안 받는다니까 그러네.”

슈슈는 램보리라고 불리는 짐승의 넓적다리로 기어코 커피값을 치르고, 카페 구석에 얌전히 앉았다.

“네가 왜 그렇게 겁먹은 얼굴인지는 알겠는데, 순하고 착한 녀석이야. 5마을 숲속 동굴에 사는데 최근에 무너졌다고 하더라고.”

그때 바깥일을 마친 화가 선생이 청록색 문을 통해 돌아왔다.

쓰고 있던 베레모 위엔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마저도 비뚤게 쓰고 있었다. 뭔가를 열심히 알아보고 온 모양새였다.

화가 선생은 피곤하다는 듯이 느릿느릿 사장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다가, 잠시 귓가에 멈춰서 소곤거렸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화가 선생! 정말 확실한 거야?”

사장이 카페 구석에서 조용히 커피 한 잔으로 피로를 풀고 있는 슈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요? 뭔가 알아낸 거예요?”

사장은 채근하는 날 주방 안쪽으로 데려갔다.

“화가 선생이 거미줄을 취급하는 털실 가게 주인들을 모조리 만나고 왔는데, 슈슈들이 최근 몇 달 동안 꾸준히 대용량으로 거미줄을 사 갔대. 특히나 보이지 않는 실로 말이야.”

사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따라가 보면 어떨까요? 오해일 수도 있고,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까요.”

“그래. 좋아.”

사장은 순식간에 보라색 선글라스에 보라색 판초를 걸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어느샌가 티타임을 마친 슈슈들이 청록색 문을 열고 나갔고, 우린 그들의 뒤를 쫓았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3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인 청록색 문고리를 돌렸다.

마법 세계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되면서도 설렘이 교차했다.

문을 열자 주황색 석양빛이 카펫처럼 깔린 거리가 보였다. 양쪽으로는 가게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는데 아쉽게도 모두 닫혀 있었다.

거리를 걷는 몇 안 되는 마법사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대개 상의와 하의가 어울리지 않았고, 자신의 사이즈보다 크거나, 아주 작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의류 수거함에서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것 같기도, 동시에 F/W 패션 컬렉션에 선 모델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슈슈들이 너무 빨리 걷는 바람에 고개를 돌릴 여유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녀의 국밥집]이 눈에 띄었다.

‘저기다.’

국밥집 입구엔 양 볼이 불그스름하고, 키가 작은 마녀가 커다란 솥단지 옆에서 미소를 짓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슈슈들을 쫓아가기를 수 분, 그들은 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결국 나름 필사적으로 쫓았음에도 불구, 어느새 슈슈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안 보여요. 놓친 건가?”

사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녀는 붉은 실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 그럴 줄 알고 아까 카페서부터 다리 한쪽에 몰래 묶어 놨지.”

“진즉에 말 좀 해 주지.”

얼마나 걸었을까,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두 시간을 꼬박 걸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사이 마법사 거리는 끝이 나고, 커다란 바위와 절벽이 보였다.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사장이 말했다.

“마을간 경계까지 왔네. 힘들어 죽겠고만 왜 미련하게 걸어 다니는 거야? 짜증 나! 이동 거울로 다니지는…!”

그때 저만치서 슈슈 무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쉿! 사장님, 저기서 모여서 뭔가를 하는 거 같은데요.”

슈슈들은 계곡 밑으로 자못 거대한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컸던지 6층 높이의 아파트를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것들이 딱 걸렸어. 그간 귀엽게 봐줬더니….”

현장을 포착한 사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슈슈들 무리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사장은 대장 슈슈의 멱살을 잡고 공중으로 번쩍 올렸다.

“이거 놔… 놔주세요….”

사장보다 몸집이 두 배는 큰 슈슈가 속수무책으로 바둥거리며 말했다. 슈슈의 목소리는 느리고 어눌했다.

“일단 그거 놓고 이야기를 좀 해요.”

난 옆에서 흥분한 사장을 말렸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2시간 내내 쫓았던 슈슈의 뒷모습엔 고단함과 피로가 묻어 있었다.

슈슈들이 정말 이동 거울의 재료가 되는 까마귀 눈알을 훔쳤다면, 이렇게 걸어 다닐 이유가 없었다.

뭐랄까, 굳이 비유를 하자면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니는 학생 같달까.

“현장을 딱 잡았는데 발뺌해 봤자 소용없어!”

“아무래도 이상하다니까요.”

“너도 봤잖아. 슈슈들이 거미줄을 치는 걸!”

“그야 그렇지만… 어쩌면 슈슈들은 거미줄만 치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슈슈들은 초조한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대장 슈슈는 사장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사장을 때리거나 위협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멱살을 잡힌 슈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희 빠, 빨리 가야 하는데….”

“어딜 가야 하는데!”

“거미줄을 치고 빨리 자리를 피하라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 해야 돈을, 돈을 받을 수 있어요.”

슈슈의 말을 들은 사장의 이마에 핏대가 콰직- 하고 올라왔다.

“뭐? 정말 누가 너희들에게 이딴 짓을 하라고 시킨 거야?”

그때 하늘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많은 까마귀 떼가 저 멀리서 계곡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빨리 말해! 누가 시켰냐니깐!”

“몰, 몰라요. 저희 살던 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이들이 지낼 곳이 필요해서.”

까마귀 떼는 슈슈들이 거미줄을 쳐 놓은 곳으로 급강하했고, 수백 마리나 되는 까마귀들이 동시에 거미줄에 걸리면서 반동으로 줄이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까마귀들은 저마다 다리, 날개, 부리 등이 거미줄에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 했다.

슈슈들은 자신들이 쳐 놓은 거미줄에 까마귀 떼가 걸리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던 대장 슈슈는 주머니에서 꺼낸 단도로 필사적으로 거미줄을 뜯었다.

“어째서 까마귀들이 거미줄에 걸린 거지? 안,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고통스러운 까마귀의 신음을 들으며 슈슈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어디선가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울려 퍼졌다.

“누군가 이동 거울을 사용했군. 제길, 일단 숨어!”

사장은 나와 슈슈들을 끌고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정체 모를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거울 속에서 나타난 이들 중 한 명이 유리 조각을 들어 까마귀의 눈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의 비명 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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