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저자들이야? 너희들한테 거미줄을 치라고 시킨 게?”
양손으로 귀를 막고, 사지를 벌벌 떠는 대장 슈슈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까마귀들이 거미줄에 걸렸다…. 까마귀들이 위험하다….”
사장이 씩씩대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뭘 물어! 쟤네가 시켰겠지!”
사장은 조심스럽게 바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동태를 살폈다.
“저… 저 자식들, 지명 수배 마법사잖아. 저 뚱뚱한 놈이 돈돈이고, 키가 크고 머리를 길게 땋은 놈이 보탱이란 자야.”
“지명 수배 마법사요?”
“그래. 저자들은 그림자 마을인 6마을 소속이야. 거기선 온갖 어둠의 마법들이 모두 허용되거든. 문제는 이들이 다른 마을에서도 불법 마법을 쓰다가 발각됐다는 거야.”
바위 밖에선 까마귀들의 절규가 이어졌고, 바닥에 웅크린 슈슈들의 작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향후 20년간 다른 마을의 방문을 금지당했거든. 근데 최근에 6마을을 벗어난 게 알려지면서 지명 수배 중이야.”
그때 거뭇거뭇한 수염에 떡 진 단발머리를 한 돈돈이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쉿! 누가 이쪽으로 오는 거 같아요.”
바위틈으로 본 그는 땅딸막한 체격에 복부 비만이 심했다.
“거기 누구야!”
사장은 화가 선생이 고정하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며 말했다.
“성가시게 됐네. 너희들은 여기에 계속 숨어 있어. 명심해! 절대 나오면 안 돼.”
사장은 이왕 들킨 김에 기세 좋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이 기사의 망토처럼 휘날렸다.
사장이 놈을 향해 팔을 쭉 뻗자, 손바닥에 있던 화가 선생이 입에서 커다란 거미줄을 뱉었다.
순식간에 돈돈의 하반신이 거미줄에 꽁꽁 묶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아악!”
방심한 사이에 기습을 당한 뚱보는 바닥에서 끙끙거리며 한쪽 손을 간신히 거미줄에서 빼냈다. 그리고 지팡이를 사장에게 겨눴다.
놈의 지팡이 끝에서 나온 채찍이 사장의 손목을 감았고, 매섭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으윽! 너 이씨….”
그때 축 처져 있었던 사장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불길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낄낄대던 돈돈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너 혹시 회색 마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는데….”
사장은 맨손으로 손목에 감긴 채찍을 거칠게 뜯어냈다. 상처가 심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열받네? 이런 기분 간만이야. 그래. 내가 그동안 너무 착하게 살았지? 그지?”
사장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돈돈의 손목이 뒤로 180도 꺾이면서 지팡이가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사장은 한 손으로는 무장 해제된 돈돈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돈돈의 눈을 뽑아 던졌다.
“으아아아악!!! 내 눈!!!”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눈알을 보고 돈돈이 비명을 질렀다.
“너도 어디 한번 눈 없이 살아 봐라. 나쁜 자식아.”
그때 바위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내 눈앞에 순식간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지만 미래를 엿봤던 지난번과 같은 현상이었다.
돈돈의 품 안에 숨어 있던 뱀이 기습적으로 사장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고, 독이 퍼진 사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녹색으로 변하는 장면이었다.
“안 돼! 놈의 품 안에 뱀이 있어!”
난 주저할 것 없이 바위 뒤쪽에서 뛰쳐나와 사장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쓰러진 돈돈을 제압하고 있던 사장의 어깨를 잽싸게 끌어당겼다.
“너 뭐야? 나오지 말라니까!”
“뱀이요! 뱀이 숨어 있어요!”
“뭐?”
그 순간 머릿속에서 봤던 장면 그대로, 놈의 품 안에서 붉은 뱀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내 뒤를 쫓아 나온 대장 슈슈가 큰 손으로 빨간 뱀의 모가지를 잡고 비틀었다.
잔뜩 성이 난 뱀은 슈슈의 주먹을 사정없이 물었다.
“독사예요! 조심하세요!”
슈슈는 뱀이 자신의 손등을 둘둘 감자, 주먹으로 땅을 쾅쾅 내리쳤다.
뱀의 몸뚱이가 바닥에 찢겼고 곧 축 처졌다.
“우리 숲에 빨간 뱀 많아요…. 난 이미 내성이 생겨서 괜… 괜차나. 안 죽어요.”
말을 마친 대장 슈슈가 어지러운지 몸을 휘청이다가 이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안 죽어도… 어지러워…. 많이… 물렸어요….”
“슈슈!”
잠시 대장 슈슈에게 시선이 팔린 사이, 돈돈이 다친 눈을 부여잡으며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보탱! 보고만 있을 거야? 와서 좀 도와줘!”
돈돈이 뭔 일을 당하든 별 신경을 쓰지 않던, 키가 크고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은 보탱이라는 자가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왔다.
“돈돈, 넌 이까짓 녀석들도 처리를 못 해서 쩔쩔매는 거냐? 쓸모없는 놈.”
돈돈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게 아니라…. 봐! 회색 마녀라고!”
“오호! 뭐야? 정말이군! 분명 회색 마녀는 학살의 날에 모두 죽었는데… 넌 어째서 살아 있지?”
보탱은 몹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사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이마에는 가로로 길게 패인 상처가 있었다.
“아주 재밌어. 살아남은 회색 마녀라니…. 그분은 자비를 베풀지 않아. 아마 널 살려 둔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는 그렇게 달콤하지 않을 게 분명하고.”
사장은 아픈 곳을 들킨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애써 감췄다. 사장을 만난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회색 마녀가 학살의 날에 모두 죽었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사장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보탱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해그냥! 넌 대장 슈슈 데리고 바위 뒤로 가 있어!”
“뭐? 해그냥? 그게 네 이름이냐?”
보탱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내 뭔가 떠올랐는지, 반가움과 혐오감이 뒤엉킨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해그냥이구나. 이다의 아들.”
놈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저 사람… 우리 어머니와 나를 알아?’
그 순간, 또 한 번 눈앞에 미래가 보였다. 부메랑이 사장의 어깨를 베고, 이어 슈슈의 목에 꽂히는 장면이었다.
죽은 슈슈의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 사장의 머리카락이 마치 정전기가 인 것처럼 사방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이 곧 날카로운 불꽃의 창이 되어 보탱을 향해 날아갔다.
보탱이 황급히 방어를 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놈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윽!”
다시 한번 사장의 머리카락이 놈에게 날아오자 보탱은 쥐고 있던 부메랑을 던졌다.
난 미리 봤던 대로 부메랑의 동선 안에 서 있는 사장의 등을 세게 밀었다.
원래 같았으면 사장을 베고 대장 슈슈에게 갔을 부메랑이 바닥을 낮게 날아서 보탱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사장과 대장 슈슈는 구했지만, 바닥에 있던 화가 선생의 두 다리가 부메랑의 예리한 칼날에 잘려 나갔다.
“안 돼!!!”
다리가 잘린 채 고꾸라진 화가 선생을 보고 사장이 소리쳤다.
“너 이 새끼…. 감히 화가의 발을 건드려?”
부메랑이 빗나간 보탱은 지팡이를 꺼내 주문을 외웠고, 지팡이 끝에서 불길에 매섭게 치솟았다.
“어때? 불을 보니 타 죽은 가족들이 생각나지 않나?”
불길 속에서 사장은 죽은 뱀의 독을 짜서 손바닥에 발랐다. 그리고 절벽에 단단히 묶여 있는 거미줄을 세게 쥐었다.
사장의 손바닥에 묻은 독이 거미줄을 녹이기 시작했다. 거미줄이 마치 피가 도는 혈관처럼 붉게 변하더니 곧 재만 남은 것처럼 바스라졌다.
거미줄에 걸려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풀려나 떼를 지어 날았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었다.
ㅡ까악, 까악.
까마귀 떼는 목숨을 걸고 돈돈과 보탱을 공격했다.
보탱의 부메랑이 까마귀 떼를 사정없이 베었지만, 맹렬히 달려드는 까마귀 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런 젠장!”
까마귀 떼 소용돌이 속에 갇힌 보탱이 바닥에 가루를 뿌려 이동 거울을 만들었다.
보탱은 순식간에 날아서 바닥에 있는 이동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난리 통에 거미줄을 빠져나온 돈돈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눈을 찾고 있었다.
“아이씨! 어디 있는 거야…! 내 눈….”
“아하, 이거 찾니?”
한참 떨어진 위치에 있던 사장이 돈돈의 눈알을 발로 가볍게 지르밟았다.
돈돈은 남은 한쪽 눈으로 사장을 매섭게 노려보며, 뚱뚱한 몸을 좁아지는 거울 속으로 욱여넣었다.
“저 녀석들 도망간다! 해그냥! 가서 거울 깨!”
4인용 식탁만 한 크기였던 이동 거울은 순식간에 작아져서 손바닥만 해졌다.
거울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자 까마귀들이 양쪽으로 길을 터 주었다.
난 동전만큼 작아진 이동 거울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ㅡ콰직.
거울이 깨지면서 조각들이 흩어졌다. 조각들은 이내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도망간 거예요?”
“응…. 뭐, 그래도 막판에 거울이 깨졌으니 놈들도 원하는 곳으로 가진 못했을 거야. 몸도 다쳤을 거고.”
“하아…!”
놈들을 간발의 차이로 눈앞에서 놓치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잡을 수 있었는데….’
사장은 다친 화가 선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녀는 화가 선생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어서 가자! 빨리 치료해야 돼. 화가 선생도, 대장 슈슈도.”
그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대장 슈슈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저기요…. 한 명이 더 있어요.”
“뭐?”
“바위 뒤에서 봤는데…. 분명 세 명이 있었어요.”
주변엔 이제 절벽에 내려앉은 까마귀들과 나와 사장, 그리고 슈슈들뿐이었다. 사장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두 명은 이동 거울로 도망쳤고,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는데? 보다시피 아무도 없잖아.”
불현듯 뭔가가 떠오른 내가 사장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대장 슈슈 말이 맞아요. 한 명이 더 있어요. 그자는 바로….”
난 확신에 차서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손끝이 까마귀 떼를 가리키는 걸 보고 사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야…?”
“돈돈과 보탱이라는 자가 슈슈들에게 이곳에 거미줄을 치라고 지시했어요. 물론 슈슈들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요.”
“그래. 거기까진 나도 알아.”
“근데 의문인 것은 까마귀 떼가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이 계곡으로 몰려왔냐는 거예요. 마치 누가 데리고 온 것처럼 말이죠.”
사장이 내 말의 요지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
“누군가 까마귀 떼를 데리고 정확히 이곳으로 유인한 거라고요.”
“음…. 그럼 설마?”
난 까마귀 떼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네. 까마귀들 중에 배신자가 있어요!”
그 순간 까마귀 한 마리가 순식간에 하늘 위로 솟구쳤다.
“까아악-!”
까마귀가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사장이 멀어지기 시작한 까마귀를 향해 소리쳤다.
“저 자식이 어딜 도망가!!”
사장의 머리카락이 까마귀를 따라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