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75)

#011화

이쯤 되자 내게 놀랄 일이 더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지경이었다.

“누군가 내 기억을 감옥에 가뒀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 기억을 지웠다는 거야?”

두통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미고에게 물었다.

“기억은 그 사람 자체이니까 지울 수는 없어요. 다만 기억을 감옥에 가두면, 그 기억은 더 이상 떠올릴 수 없게 되죠.”

“결과적으로 기억을 지운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네…. 아주 강한 마법사의 짓인 거 같아요. 누군가의 기억을 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미고의 말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마법사와 인간의 혼혈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도, 엄마의 편지를 봤을 때도 충격이 컸지만 이번엔 좀 느낌이 달랐다.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 나는 내가 뭘 잊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황당하고 어이없는 것을 넘어서 분하기까지 했다.

사장이 혼란스러워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겠지만 네가 봐선 안 될 것을 봤다든가…. 하는 이유가 아닐까?”

봐선 안 될 것이라니. 내가 무슨 범죄 현장의 목격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미고야, 감옥에 갇힌 기억은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어?”

“열쇠는 형의 다른 기억들 사이에 숨겨 뒀을 거예요. 그걸 찾아야 되는데….”

“열쇠가 내 기억들 속에 있다고?”

미고가 썩 자신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근데 숱하게 많은 기억 중에 놈이 어느 기억에 열쇠를 숨겼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마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거예요.”

“하아…. 참….”

미고의 말을 듣고 나니 막막한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일단 형이 뭘 잊었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해요. 그걸 알고 나면 실마리가 풀릴 거예요.”

미고는 낙담한 내 옆에서 따듯한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형이 절 도와준 것처럼요.”

***

다음 날 아침, 카페 구석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잔 미고와 나는 부스스 일어났다.

“얼른 일어나서 아침 먹어! 내가 늦잠이나 자라고 카페를 내어 준 줄 아니? 아침 일찍 1마을에 가려고 그런 거라고!”

사장이 따듯한 차 한 잔과 기름에 튀긴 무지개색 콩 한 줌, 그리고 계피 향이 나는 넓적한 빵을 주었다.

“미고야, 너는 몸이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난 1마을에 기어이 따라가겠다는 미고를 말리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1마을은 제 고향이라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게 우리 셋은 카페 한가운데에 만든 이동 거울을 통해 1마을로 향했다.

미고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편지에 적힌 하피 독수리, 론의 위치를 알아 오겠다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1마을은 거대한 농장 같은 느낌을 풍겼다.

곰이나 타조, 검은 영양, 멧돼지 등 평소엔 볼 수 없는 야생 동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를 오갔다.

마치 울타리가 없는 동물원 안을 스스럼없이 다니는 기분이랄까.

이곳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다. 다만 인간처럼 가축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동물이 되어 스스로 할 일을 척척 해냈다.

“어? 저거 저번에 먹었던 거대한 쌀알 맞죠?”

2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벼에 커다란 쌀알이 사과처럼 달려 있었다.

“1마을에서 대부분의 먹을거리가 나온다고 보면 돼. 여기서 최상급의 곡식과 과일이 나거든.”

또 집과 농장의 구분이 없었는데 마구간에 침대와 협탁이 있고, 집 안에 지푸라기 더미가 가득한 식이었다.

자세히 보니 농장마다 같은 모양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사람과 짐승이 합쳐진 형태의 날개 달린 생물이었다.

얼굴의 각 네 면에 사자, 소, 독수리 그리고 사람의 얼굴이 있었고, 여섯 개의 날개가 몸통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집집마다 저 그림이 걸려 있네요. 저건 뭐예요?”

“케루빔이야. 성경에 나오는 생명나무를 지키는 천사지. 루베로들이 조상신으로 섬기고 있어서 걸어 놓은 거야.”

“저 뱀은요?”

“뱀은 다른 루베로와는 달리 오직 동물의 몸만 가지고 태어나거든. 인간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몸을 훔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케루빔이 뱀을 죽인 거야.”

사장은 멀리서 날아오는 미고를 가리켰다.

“미고가 뭘 알아낸 거 같은데? 아무튼 그래서 뱀 루베로는 인간으로 변하는 게 엄격히 금지돼. 금지한다고 안 할 놈들이 아니지만.”

미고는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땅에 닿음과 동시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찾았어요! 이 길 끝에 낡은 성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산대요. 근데….”

미고가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근데?”

“많이 위독하대요. 그리고 가족들에게 버림받아서 홀로 성에 있다나 봐요.”

“뭐라고? 위독하다니 얼마나? 일단 가 보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미고의 설명을 들어 보니, 오랜 시간 고향을 떠나 살았던 론은 5년 전쯤 1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정체불명의 병을 앓았는데 가족들은 그런 그를 보살펴 주기는커녕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론이 살고 있는 성은 패잔병의 거처같이 낡고 허름했다. 우린 열려 있는 성문으로 들어가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만약에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면 그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그때 복도 끝 가장 안쪽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냉랭한 복도와는 다르게 그 방 근처에서만 온기가 느껴졌다.

“여긴 거 같아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중년의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짙었다. 긴 회색 머리카락 끝은 모두 타들어 간 것처럼 푸석했고, 입술 색이 샛노랬다.

“많이 편찮으신 거 같은데….”

그의 모습을 본 미고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어? 이 모습…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거 같은데….”

론에게 다가간 미고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 가까이 코를 가져가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느릅나무 껍질 냄새가 나요. 이건 혹시….”

미고가 론의 증세를 확인하는 중에 방 안으로 커다란 하피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금세 중년의 여자로 변한 그녀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누구지? 누군데 함부로 남의 침실에 들어온 거야?”

나는 공격적인 그녀의 태세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허락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 문이 열려 있기에…. 저흰 론을 만나러 왔어요. 실례지만 누구신지.”

“론의 누나야. 내 동생에게 무슨 용건이지?”

가족들이 모두 론을 두고 떠났다고들 했지만, 다행히도 누나만큼은 병든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희 어머니가 유언을 남기셨는데 저더러 론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찾아온 건데….”

론의 누나가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혹시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

“이다예요.”

“뭐? 정말 네가 이다의 아들이라고?”

“네….”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눈앞에 철천지원수라도 있는 듯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나가… 나가!!!”

여자는 내 목덜미를 잡아서 막무가내로 끌었다. 이어 미고와 사장도 떠밀리듯 방에서 쫓겨났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말은 해 줘야 알 거 아니에요.”

사장이 무례한 여자의 태도에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불쌍한 내 동생…. 이게 다 이다 때문이야. 너희 엄마 때문에 내 동생이 죽어 간다고…! 그러니까 당장 꺼져.”

그때 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미고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생각났어요. 저 증상… 머리카락 끝이 모두 타고, 입술이 노래지고, 느릅나무 껍질 냄새가 은은히 났어요. 론은 심살이 풀에 중독된 거예요.”

미고의 말을 듣자마자 론의 누나가 가문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정색하며 물었다.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이전에 본 적이 있거든요. 심살이 풀에 중독돼서 죽을 뻔한 루베로를요.”

“내 동생 말고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루베로가 또 있었군.”

그녀가 계속해서 밀어내는 통에 미고가 다급하게 외쳤다.

“해독제가 있어요! 죽을 뻔했던 루베로도 그 약을 먹고 살았어요!”

미고의 말을 들은 여자가 멈칫 놀라며 우리를 밀어내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럴 리가 없어. 나라고 찾아보지 않은 게 아니라고. 어둠의 마법사들을 통해 구한 해독제조차 소용이 없었는데….”

여자가 미고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기 까마귀, 그 말 진짜야?”

미고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희가 구해다 드릴게요. 대신 그땐 론 아저씨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론의 누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희들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해독제를 구해 온다면 그렇게 해 주지. 그 전까지는 론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마.”

***

성을 빠져나오면서 사장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해그냥, 분명 론이 너희 어머니한테 빚을 졌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반응이 영… 그 반대 같은데?”

“그러게요.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저희 어머니 때문에 론이 아프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직접 론과 이야기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러려면 해독제가 꼭 필요할 거 같군. 근데 미고야, 대체 심살이 풀이 뭐야? 난 처음 들어 봐.”

사장이 모를 정도면 심살이 풀은 마법 세계에서도 희귀한 것임이 분명했다.

방금 전 론의 누나도 미고가 심살이 풀에 대해 아는 것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사장님은 아시겠지만 루베로는 하루 24시간의 절반은 인간으로, 절반은 동물의 몸으로 살아야 돼요. 근데 이 풀을 먹으면 인간의 모습으로 좀 더 오래 있을 수가 있거든요.”

사장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해 루베로가 인간이 되려고 심살이 풀을 먹는다는 거군. 그래서 그 해독제는 어떻게 구할 생각이야?”

“제가 아는 까마귀 루베로 중에 심살이 풀 해독제를 만드는 법을 아는 자가 있어요.”

“아까 네가 말한 심살이 풀 때문에 죽을 뻔했다던 그 루베로 말이야?”

“네. 근데… 여러분들도 이미 만난 적이 있어요.”

“우리가 만났었다고? 언제?”

“그… 슈슈들을 속여서 거미줄을 치게 만든 다음에 동족들을 배신했던 그 까마귀 루베로예요.”

“뭐야? 너랑 아는 사이였어?”

사장이 내가 까마귀 떼 사이에서 단번에 배신자를 찾아낸 비결을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입술을 씰룩였다.

“네…. 그는 이전부터 심살이 풀을 먹고 어둠의 마법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어요. 까마귀 모습으론 그들과 어울릴 수 없다면서 말이죠.”

“그 녀석 지금 어디 있어? 당장 가 보자.”

“지금 무리들을 배신한 벌로 감옥에 있을 거예요.”

우린 미고의 안내를 따라 서둘러 이동했다. 놈이 갇힌 감옥은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미고 덕분에 감옥을 지키는 황소 루베로의 양해를 얻어 잠깐 동안 놈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고가 창살을 사이에 두고 놈과 마주 보며 말했다.

“제노 형, 왜 그랬어요? 어떻게 동족을 팔아넘길 수가 있냐고요!”

어두운 감옥 속에서 미고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 너 미고구나. 반갑다! 나 여기서 좀 꺼내 줘. 제발!”

“하! 정말 뻔뻔하네요.”

비굴하게 읍소하던 제노가 냉랭한 미고의 반응에 창살 사이로 침을 뱉었다.

“날 꺼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온 거야?”

“이전에 심살이 풀 먹고 죽을 뻔한 적 있죠? 그때 해독제를 먹고 살았잖아요. 지금 그 해독제가 필요해요.”

“웃기고 있네. 내가 왜 그걸 너한테 알려 줘야 하지? 말해 주면… 여기서 날 빼 주는 거야?”

그때 사장이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제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랑 같이 다니던 돈돈이랑 녀석도 나한테 눈알이 뽑혔거든. 너도 하나 뽑혀야 공평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사장이 손톱을 세워서 제노의 눈을 파내려고 하자 제노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알, 알려 줄게! 해, 해독제 어떻게 만드는지!!! 그러니까 이것 좀 놔줘!”

제노는 전형적이게도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자였다.

“난 시시하게 까마귀들이랑은 어울리지 않아. 늘 어둠의 마법사들과 일을 하지. 근데 그러려면 인간의 모습으로 오래 있어야 돼. 까마귀는 무시당하니까….”

“네 사정엔 관심 없으니까 본론만 말해.”

“제 방에…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다 있어요. 이전에 검은 마녀에게 배웠거든요. 알려 드릴 테니까 저 좀 여기서 나가게….”

“어떻게 만드는지나 말해. 눈알이 뽑히기 싫으면.”

사장의 눈빛이 돌변하자 제노는 살짝 겁을 먹었는지 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되게 긴데 어디 적을 데 있어요?”

“내가 마녀야. 그깟 것도 못 외울 거 같아?”

“알겠어요…. 일단 말린 장수풍뎅이의 뿔을 곱게 갈아서 늙은 호박 물과 잘 섞어 반죽한 후에 광대 버섯과 썩은 양배추를….”

제조법은 아주 길었다. 제노가 마구잡이로 지어내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장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아무래도 불안해진 나는 엄마의 만년필로 손바닥에 급히 메모를 했다.

“마지막으로 라벤더 잎 두 장이랑 고양이의 발톱, 그리고 나비의 왼쪽 날개를 넣으면 끝이에요.”

“너… 이거 거짓말이기만 해 봐.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겠어.”

사장이 뾰족한 손톱을 내보이며 제노에게 겁을 줬다.

“가자. 해독제 만들러.”

위협을 마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