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75)

#013화

“저희가 가져올게요. 그건 지금 어디에 있죠?”

내가 흔쾌히 부탁을 승낙하자 지쳐 보였던 론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작은 상자에 담아 두었어요. 그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 사람들이 알 거예요.”

론은 우리가 만났으면 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정보를 쪽지에 적어 주었다.

“휴우! 넌 지금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그곳 생각뿐이구나….”

“미안해. 누나….”

론은 서운해하는 누나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오늘은 늦었으니 짐은 내일 찾아서 갖고 올게요.”

론이 돌아서는 우리를 붙잡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부탁드려요.”

그 옆에 서 있던 로첼이 말을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저도. 저도 꼭 좀 부탁드려요. 론을 위해서라도….”

1마을에서 카페로 돌아오니 벌써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종일 돌아다녔던 탓에 지친 우리들은 따듯한 차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근데 저 내일은 출근해야 하는데 어쩌죠? 퇴근 후에 움직이면 너무 늦을 텐데.”

“그러게. 론의 상태를 보아하니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아무래도 내일은 두 분이서 일을 봐야 할 거 같은데요.”

멋쩍은 표정으로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 미고랑 나한테 일을 떠넘기겠다는 거지? 그지?”

“죄송해요. 저도 내일 같이 가고 싶지만….”

“출근인가 뭔가 그거 꼭 해야 돼?”

“네…. 월요일에 연차도 썼으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제가 카드를 드릴 테니까 내일 필요할 때 쓰세요.”

미고가 카드를 받아 들어 요리조리 살피더니 입에 덥석 물었다.

“그거 입에 넣는 거 아니야. 더러우니까 얼른 빼. 이건 사장님이 보관해 주세요. 택시 타고, 식당에서 밥 먹고 할 때 필요할 거예요.”

“휴…. 알겠어. 넌 언제 오는데?”

“전 퇴근하자마자 합류할게요. 6시쯤 택시를 타고 저희 회사로 가 달라고 하세요. 그럼 기사님이 알아서 데려다줄 거예요. 이동 거울 같은 거니까.”

불만스러워 보이는 사장과 달리 미고는 영문도 모른 채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잠깐, 택시 타는 법은 아시는 거죠?”

“알아. 이전에 타 본 적 있거든!”

미고와 사장님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미고는 내일 아침부터 사장님이랑 움직여야 하니까 여기서 자는 게 낫겠죠? 그럼 전 이만 갈게요.”

미고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페를 나서는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유치원생에게 논문 준비를 시킨 기분이었다.

이들이 쪽지에 적힌 이들을 만나 론의 짐을 찾을 수 있을까? 영 미덥지 않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불안해…. 내일 종일 연락도 안 될 텐데…. 여기 와서 뭔 사고라도 치면 어쩌지?’

그렇게 난 심란한 마음에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

[Web 발신] 삼동카드 420 승인

18,900원 일시불, 2.09 09:37, 까까오 택시

회사에 출근해서도 영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있던 찰나에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제 사장에게 준 카드 결제 메시지였다.

‘오! 이동했나 보네? 론의 전 부인을 먼저 만나러 간다고 했었지?’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반차를 쓸까 고민도 했지만 오늘따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검증부서에서 온 테이스페일 메일을 확인하는데 또 문자 메시지가 왔다.

[Web 발신] 삼동카드 424 승인

87,500원 일시불, 2.09 11:30, 엄마의 손맛 춘천닭갈비

문자 메시지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점심 먹었나 보네? 8만 7천 원? 둘이서 대체 몇 인분을 먹은 거야?’

그래도 어쩐지 잘 먹고, 계산도 잘하고 돌아다니는 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심지어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5분 뒤, 또 문자 메시지가 왔다.

[Web 발신] 삼동카드 426 승인

91,000원 일시불, 2.09 11:37, 별다방

‘둘이서 커피도 마시는 거야? 여기선 또 뭘 먹었길래 9만 원이나 쓴 거냐고. 나 참! 카드를 빨리 반납하라고 해야지. 거덜 나겠네. 거덜 나겠어.’

그때 불현듯 지금 별다방 매장에 전화를 하면 사장과 통화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사무실을 나와 조금 전 문자가 왔던 매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죄송해요. 그게 방금 9만 원어치 계산한 성인 여자 한 명이랑 남자아이가 있을 텐데…. 혹시 좀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잠시만요.”

잠시 후 휴대 전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야?”

“사장님! 저 해그냥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대뜸 소리를 질렀다.

“뭐? 너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방금 거기서 카드를 긁었으니까…. 아무튼!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론이 놔두고 간 물건을 찾았어요?”

“아직… 방금 전에 론의 전 부인을 만났는데, 자기한테 론의 물건은 없다고 하더라고.”

“아…. 아쉽네요. 있을 만한 곳도 모르고요?”

“응. 두 사람이 결혼해서 잘살다가 아이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급성 폐렴으로 죽었나 봐. 그때 우울증에 걸려서 론을 많이 괴롭혔다고 자책하더라. 아무튼 론이 쪽지에 적은 대로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만 전해 주고 나왔어.”

“그랬군요. 이제 그럼 어디로 가요?”

“이제 론의 친구에게 가 봐야지.”

그때 멀리서 미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여기 너무 맛있어요!”

“너… 내가 만든 빵보다 여기 게 더 맛있다는 말이야?”

“아뇨. 그럴 리가요! 그건 아니고요.”

실랑이를 들으니, 마치 눈앞에서 둘의 모습이 보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튼 수고해요. 이따가 6시쯤 회사 앞으로 오는 거 잊지 말고요.”

예상보다 미고와 사장은 인간 세계에서 적응을 잘한 것 같았다.

이후에도 광장 시장에서 빈대떡, 붕어빵, GSS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등 카드 결제 메시지는 쉴 틈 없이 울렸다.

그렇게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 드디어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다섯 시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려 의자에 앉아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한동안 문자 메시지도 안 왔던 탓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뭐라도 좀 사 먹었으면 싶은 심정일 때쯤 문자가 왔다.

[Web 발신] 삼동카드 429 승인

37,000원 일시불, 2.09 17:48, 모범택시

회사 앞에 도착한 게 분명했다. 나는 결국 퇴근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컴퓨터를 켜 놓고 퇴근을 시도했다.

“어이, 해 인턴! 오늘 야근해야 할 거 같은데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알탕 어때?”

이번에 새로 온 김 부장이 눈치도 없이 저녁을 먹자며 팀원들을 부추겼다.

“전 오늘 시골에서 가족이 올라와서… 저녁을 먹고 와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지금 회사 근처에 다 왔다고 해서요. 저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오늘따라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장과 미고가 어떤 모습으로 회사 앞에 서 있을지 몰라서 더욱 불안했다. 가급적 회사 사람들이랑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결국 엘리베이터가 22층에서 한참 동안 서 있는 바람에 나는 계단으로 17층을 단숨에 내려갔다.

퇴근 시간 무렵 인파 사이에서 사장과 미고가 보였다.

사장은 나름 최대한 눈에 덜 띄게끔 노력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보라색 깔 맞춤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미고는 이전에 내가 사다 준 회색 추리닝 차림이었는데 워낙 귀엽게 생겼다뿐이지 평범한 학생처럼 보였다.

인간 세상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라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둘에게 달려갔다.

“잘 찾아왔네요! 오늘 수고했어요.”

“형!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피곤해 보이는 사장과는 다르게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미고가 방방 뛰며 말했다.

“근데 사장님 옷이 좀 튀는 거 같은데요.”

“내 옷이 어때서? 아주 지루하리만큼 평범하게 입은 건데.”

“이쪽 사람들의 패션은 사장님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지루하거든요.”

“입는 거 가지고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은 처음 들어 보네. 아주 엉뚱하고 무례한 지적이군.”

“그나저나 론의 물건은 찾았어요?”

미고가 약간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친구도 만나 봤는데 론의 물건이 어딨는지 모른대요. 그래서 그냥 이야기만 하다 왔어요.”

“뭐???”

미고는 붕어빵이 든 종이 봉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 친구분이 처음엔 우리가 론에게 빌려준 돈 받으러 온 사람인 줄 알고 막 피하더라고요 나중에 오해를 풀고 이야기를 좀 했는데….”

미고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머뭇거리기에 나도 모르게 채근하듯 되물었다.

“미고야, 그래서 결국 론의 물건은 못 찾았다는 거지?”

“네….”

“그럼 지금 남은 곳이 어디지?”

“납골당이요. 여기 가려다가 형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돼서 일단 이곳으로 왔어요.”

“그래. 그럼 택시 타고 빨리 가 보자.”

택시를 타고 서울 외곽에 있는 납골당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미고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친구분이 전 재산을 사기를 당했다나 봐요. 사람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서 바보같이 속은 거라고 비난할 때 유일하게 론만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면서 위로를 해 줬대요. 큰돈도 빌려주고요.”

조용히 있던 사장이 미고의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론이 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결국 론을 피했다나 봐. 멍청하긴. 론은 받을 생각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그래서 그냥 쪽지에 적힌 대로 건강하라는 론의 말만 전해 주고 왔어.”

택시는 어느덧 납골당 앞에 도착했다.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리는데 사장이 말했다.

“어쩌면 론은 우리가 그들에게 대신 마지막 안부 인사를 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어.”

납골당 안으로 들어가니 층층이 빼곡하게 들어선 칸막이가 보였다.

[A-3 구역, 위에서 5열]

우린 론이 쪽지에 적어 놓은 대로 아이의 유골이 안치된 곳을 찾았다.

그때 미고가 무언가 발견하고 우리를 불렀다.

“여긴 거 같아요. 론의 가족사진이 있어요!”

론의 아이의 이름은 리아였다. 최리아. 유골함에 적힌 날짜를 보니 2월 9일, 오늘이 아이의 기일이었다.

“하아…. 오늘이 딸 기일이었나 봐요.”

칸에는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사장이 만지작거리자 금방 자물쇠가 열렸다.

“여기 있네. 론이 두고 왔다는 물건 말이야. 옷이랑 사진.”

유골함 옆에는 생전에 찍었을 가족사진과 아이의 배냇저고리가 들어 있었다.

나와 사장, 미고는 유골함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우리에게 이 일을 부탁했을 론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물건 다 챙겼으면 이만 가자….”

사장이 자물쇠를 다시 잠그려던 그때 유골함 뒤편에서 뭔가 보였다.

“어? 잠시만요. 저 뒤에 뭐가 있는 거 같은데요.”

손을 깊숙이 넣어서 유골함 아래 깔개 밑에 숨겨진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깃, 깃털이잖아?”

하피 독수리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보물이라던 케루빔의 깃털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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