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75)

#016화

난 징조를 밝히는 초가 푸른빛을 내는 것을 보고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내 안색을 보고 진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너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초는 마지막으로 더욱 선명하게 푸른빛을 내더니 꺼졌다.

“진우야, 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네가 있는 거 같은데? 몰골이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진우가 딴청을 피우며 내 시선을 피했다.

“말 돌리지 말고….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없다니까! 너야말로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냐?”

“그냥 불길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괜히 꺼림칙해서 그래. 그니까 솔직히 말 좀 해 봐. 요즘 무슨 일 있었지?”

계속 캐묻자 진우는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우의 표정에 ‘뭘 어디까지 솔직히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별건 아니고…. 이전에 나 괴롭히던 놈들을 만났어. 고등학생 때 말이야.”

“그 일진들? 어디서 만났는데?”

진우는 고등학교 내내 학교 폭력을 당했지만 좀처럼 그때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나와 진우는 같은 중학교에 다니다가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을 시기였다.

그저 진우가 모질고 잔인한 시간을 기어코 버텨 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청담동 고급 술집에서 신고가 들어왔어. 가게 주인이 손님을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다고 해서 출동했지. 내 관할은 아닌데 친한 후배 저녁이나 사 줄까 하고 갔다가 같이 가게 된 거야.”

***

진우의 이야기는 이랬다.

출동한 술집 안에는 사장으로 보이는 몸집이 있는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앞엔 이미 흠씬 맞았는지 손님이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자 사장은 대놓고 성가시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누가 신고했어? 아이고~ 형사님들 마침 잘 왔네. 이 손님이 술 마시고 돈 못 낸다고 배 째라고 하고 있거든? 어떻게 좀 해 보쇼!”

“이 사람 누가 이렇게 때린 거예요? 당신이에요?”

무심코 사장과 눈이 마주친 진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장은 발뺌하며 시답잖은 핑곗거리를 늘어놨지만, 진우의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장은 키가 크지 않았지만 덩치가 좋고 근육질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노란 고무줄로 묶었는데 숱이 많지 않아서 새 꽁지처럼 보였다.

옆으로 찢어진 매서운 눈매에 넓은 콧방울, 두툼하고 기름진 입술에 울퉁불퉁한 얼굴 라인까지…. 진우가 악몽을 꿀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놈이 분명했다.

개두식이었다. 십여 년 만에 보는 것임에도 한눈에 알아봤다. 진우를 가장 주도해서 괴롭히던 놈이었다.

팔꿈치 쪽에 용의 꼬리인지, 뱀의 꼬리인지 모를 문신을 한 개두식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진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혹시… 너 유진우냐? 개눈깔?”

진우는 개눈깔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주춤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과거, 놈들은 진우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개눈깔이라는 별명을 만들어 불렀다.

“맞네! 이 새끼… 개눈깔 맞네! 너 짭새 됐냐?”

개두식은 고개를 뒤로 젖혀 목젖이 보이도록 웃더니 진우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너 설마 나보고 쫄았냐? 긴장 풀어라. 아…. 새끼! 졸라 깜찍하네. 야! 황대찬! 나와 봐. 여기 지금 누가 납셨는지 봐라.”

개두식의 목소리를 듣고 후미진 방에서 딱 떨어지는 명품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어제 본 듯이 익숙했는데 워낙 뉴스 패널로 자주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진 행세하던 과거를 세탁하고 명망 있는 변호사가 되었다.

‘여전히 같이 어울리는구나. 그 잘난 허울을 덮었어도 결국 네 본질은 여기에 있으니 당연한 거겠지.’

황대찬은 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이기죽거렸다.

그때 진우의 후배가 입구에서 마주친 취객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뒤늦게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개두식이 진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건방을 떠는 것을 보고 언성을 높였다.

“이 새끼가 돌았나. 손 안 내려? 어디 깡패가 경찰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어?”

후배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테이저 건을 만지작거리며 소리치자 개두식은 바로 꼬리를 내리며 태세를 전환했다.

“이 자식 내 친구예요. 야! 네가 말해 봐. 우리 친구잖아. 고등학교 동창!”

진우는 여전히 말 한마디를 못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후배가 진우에게 속삭였다.

“선배, 괜찮으십니까?”

진우는 의식이 아득해졌지만 몸의 축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진우의 귓가에 과거 황대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ㅡ“개눈깔, 저 새끼 바지 벗겨!”

진우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큰 보폭으로 피해자가 있던 룸으로 들어갔다.

상 위에 놓인 양주 병을 들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이리저리 병을 살폈다.

“선배, 왜 그러세요?”

뒤따라온 후배가 여태껏 아무 말이 없는 진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우는 양주 한 병을 손에 들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피해자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거 에탄올이랑 색깔 염료 섞어서 만든 가짜 양주예요. 지금 당장 응급실 가서 위 세척하세요. 안 그러면 큰일 날 수가 있어요. 간 질환, 심하게는 눈이 멀 수도 있어요. 아시겠어요?”

손님은 그의 말에 잔뜩 겁에 질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가짜 양주라니…. 어이가 없네.”

“석수(손님이 남긴 술을 한데 섞은 것을 지칭하는 은어)로 장난쳤죠? 양주에 붙어 있는 RFID 코드도 위조된 거네요.”

“개눈깔! 너 이 새끼… 보자 보자 하니까.”

진우는 가급적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존댓말을 써서 말했다.

개두식은 얼굴이 붉어져서 씩씩댔고, 변호사 배지를 달고 있는 황대찬은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식품 위생법, 상표법 위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미란다 원칙 고지하고 데리고 와.”

진우는 후배에게 뒷일을 지시하고 최대한 당당하게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결국 꽁무니를 내빼듯 도망치고 말했다.

***

“십 년이 더 지났는데도 무섭더라. 바지에 오줌 지리는 줄 알았잖아.”

진우는 자기 말에 작게 낄낄대며 웃었지만,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내가 꼭 사고 칠 거 같더라고. 진짜 죽이고 싶더라. 요즘 하도 살인 사건을 많이 보다 보니까 나도 미쳐 버린 건가 싶고.”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진우에게 했던 짓들은 증거도 없을뿐더러 이미 공소 시효가 지난 일이었다.

그저 최 대리의 징조를 바꿨던 것처럼 진우도 지켜 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체 진우에게 일어날 나쁜 일이 뭘까.’

진우는 과거를 떠올리며 이기지도 못할 술을 연거푸 들이켜더니 뻗었다.

바닥에 고부라진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무거워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ㅡ딱딱딱.

그때 창문 쪽에서 유리에 돌같이 단단한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바깥에서 까마귀가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면서 창문을 부리로 쪼고 있었다.

“미고?”

난 한눈에 미고를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미고는 금세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떻게 왔어? 혼자 온 거야?”

“이전에도 온 적이 있었잖아요. 사장님이 형 걱정된다고 한번 가 보라고 하셨어요. 약도 챙겨 주시고요.”

“고마워.”

어쩐지 날 걱정해 주는 이들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늦었으니까 자고 가. 뭐 좀 먹을래?”

먹다 남은 치킨 쪽으로 자꾸 시선을 돌리는 미고를 보며 물었다.

미고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미고는 남은 치킨과 만두, 과자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제야 바닥에서 자고 있는 진우를 보며 물었다.

“형, 이 사람은 누구예요?”

“내 친구.”

진우를 보고 있자니 조금 전 파랗게 타오른 초가 다시 떠올랐다.

“미고야, 혹시 징조를 밝히는 초라고 알아?”

“네. 알죠.”

“방금 저 친구 바로 뒤에서 초가 탔는데 푸른빛이 보였어. 내 친구가 위험에 처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인지,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

“음…. 괜찮다면 제가 친구분 기억을 좀 봐도 될까요? 힌트가 있을지도 몰라요.”

잠든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작정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미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겠어?”

미고는 천천히 진우 옆으로 갔다. 그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진우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았다.

“악몽을 꾸나 봐요.”

미고가 잔뜩 찌푸린 미간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는 진우의 머리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진우의 이마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는데, 그의 눈동자가 흑록색의 까마귀 눈알로 변하면서 빠르게 회전했다.

잠든 진우는 몸을 뒤척이며 신음 소리를 냈다.

난 고통스러워하는 진우의 손을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거친 질감의 낡은 필름 사진 같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진우의 기억이었다.

기억 속에서 진우는 한적한 공사장에서 일진 무리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복부를 걷어차여서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진우에게 그들은 침을 뱉고, 먹다 남은 술을 부었다.

“개눈깔, 저 새끼 바지 벗겨.”

지금은 변호사가 된 황대찬이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실실 웃으면서 말하자 개두식이 진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진우는 두려운 듯 반항조차 못 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다.

“사진 한 장 찍어 봐!”

이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엎드려 있는 진우의 등에 기세 좋게 발을 올렸다.

개두식이 카메라에 타이머를 설정해서 손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개눈깔, 좀 웃어 봐! 사진 찍잖아.”

머릿속에 떠오르던 진우의 기억은 먼저처럼 빠르게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어 최근으로 보이는 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진우는 누군가의 뒤를 몰래 쫓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개두식과 황대찬 변호사가 있었다.

진우는 스님이 염불 외듯이 쉴 새 없이 뭐라 중얼거리며, 주머니 속 총구를 엄지로 슥슥 문대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 속엔 개두식과 황대찬의 일거수일투족이 시간별로 모두 기억되어 있었다.

난 머릿속에서 유리 파편이 튀는 것처럼 날카로운 두통을 느끼면서 정신을 차렸다.

“형도 본 거예요?”

“응. 진우 손을 잡았더니 어떤 기억이 보였어.”

미고가 놀랍다는 듯 내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누군가의 기억을 같이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나저나 내 친구 말이야. 좀 위험해 보이는데… 네가 보기엔 어때?”

미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 친구는 그놈들에게 복수할 작정이에요.”

역시 미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리고 진우에게 보이는 나쁜 징조가 그 복수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어느새 뒤척임을 멈춘 진우의 손을 꼭 쥐었다.

바꿔야 한다. 죽음의 징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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