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땅에 심긴 사람들.
두 다리는 땅에 뿌리를 내려 굳건히 박혀 있었고, 양쪽으로 벌린 팔에는 잔가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흠…. 흠!”
그때 인간 나무들 사이에서 악초 할아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내게 빚을 진 자들이지. 빚을 지고도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이렇게 된 거야. 내 사전엔 그냥은 없어. 호의도 없지. 무조건 대가만이 존재해.”
악초 할아범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너희들도 무언가 원해서 왔든 간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악초 할아범은 이미 우리가 무언가 원해서 이곳에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를 찾는 모두가 늘 그러했듯이.
“내가 자네 커피값을 대신 내줬다면 자네도 헐값에 이곳에 심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이지 아쉽군.”
할아범은 그 말을 하면서 동시에 사장에게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나무 인간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면에 일렁이는 증오와 분노가 느껴졌다.
“사람에게서만 나는 열매가 있어. 인간의 모순, 위선, 나태함, 충동 같은 것들을 먹고 자라지. 이 열매를 얻기 위해선 나무 인간이 꼭 필요해.”
할아범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지가 오래됐는지 계속해서 조잘댔다.
“우리는 사람을 재우는 악초를 구하러 왔어요.”
사장의 말에 할아범은 예상보다 용건이 사사롭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풀이야 널리고 널렸지.”
할아범은 내가 먹잇감이라도 되는지 군침이 흘리며 말했다.
“그 대가로 뭘 줄 텐가? 자네가 나한테 줄 만한 게 있을 것도 같은데.”
“그게 뭔데요?”
난 할아범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애써 피하며 물었다.
“인간의 피를 줘야 하는 나무가 있는데 저들의 피를 줬더니 더 시들해지더라고. 워낙 썩어 빠진 피라서 그런가 봐. 근데 너는 뭐랄까. 신선하달까?”
“제 피를요? 아, 헌혈 말씀하시는 거구나? 한 400ml 정도면 괜찮을까요?”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평소에도 헌혈은 종종 하거든요. 가끔 그러고 받은 상품권으로 영화도 보고…. 그런데 할아버지, 자격증은 있으세요?”
긴장한 나는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난 네 몸에 도는 피 전부를 원해.”
“네? 지금 제 목숨을 달라는 거… 사장님, 이건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장에게 눈빛으로 구조 요청을 보냈다.
“저기 나랑 둘이서 이야기 좀 하죠.”
사장이 할아범을 5미터가량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피 전부를 원하신다니 장난이 지나치네요. 이 컵으로 딱 열 컵을 드리겠어요. 어때요?”
“흠…. 좋아. 그렇게 하지.”
사장이 보라색 도자기로 만든 컵을 들고서 다가왔다.
“이 컵으로 딱 열 컵의 피만 주는 거야.”
컵의 크기를 살피며 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사장님, 저 컵이면 200ml 정도가 들어가는데 열 컵이면 2,000ml예요. 평소 헌혈하던 양에 비해 다섯 배나 되는 양인데… 괜찮을까요?”
사장이 겁에 질린 날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가 널 죽게 두겠니?”
그렇게 거래는 성사됐다.
가급적 가장 신선한 피를 나무에 주길 원했던 할아범은 내 손바닥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 칼을 들고 다가왔다.
사장이 얼굴이 퍼렇게 질린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해그냥 손에 상처는 제가 냅니다. 할아범은 물러서 계세요.”
“흥. 그러든가. 아무튼 명심해. 내 나무를 직접 봐선 안 돼. 아주 예민한 녀석이거든. 헝겊 사이로 손만 집어넣어서 피만 주고 나오는 거야.”
“네.”
할아범이 아끼는 그 예민한 나무는 독방이라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갔을 땐 나무는 헝겊에 가려서 볼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작은 나무 묘목인 것 같았다.
누렇게 바랜 헝겊에 뚫린 구멍으로 팔뚝을 집어넣었다.
손바닥에서 진득하고 따듯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사장의 마법 덕분인지 아프진 않았다.
난 사장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했던 말을 곱씹었다.
“10컵의 피를 흘리고 나면 이 보라색 컵이 깨질 거야. 그럼 바로 일어서서 방을 나와야 해. 알겠지?”
새하얀 벽면을 보고 있자니 마치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손에는 보라색 컵을 쥐고 있었다.
그때 헝겊 사이로 나뭇가지가 슬며시 들어왔다.
나뭇가지는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는데 마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악하다더니. 하긴… 나무가 악해 봤자 사람만 하겠어?”
이파리가 팔에 간지럽게 쓸리자 하품이 나왔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난 고개를 푹 숙이고 졸기 시작했고, 내 손엔 진즉에 깨진 컵 조각이 들려 있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간신히 의식은 차렸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밖에선 사장과 할아범이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이렇게 안 나와?”
내가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자 사장은 문고리를 잡았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할아범이 그런 사장을 경계하면서 말했다.
“내가 말했지. 누구도 저 나무를 봐선 안 된다고.”
“그런 넌! 딱 열 컵이라고 해 놓고 지금 시간 지난 거 보면 스무 컵은 족히 나왔겠어.”
사장은 할아범에게 반말로 쏘아붙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장이 도저히 못 기다리겠는지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사장의 머리카락이 공중에 일렁일 때마다 부는 바람이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사장이 방문을 열었을 때 난 의자에 반쯤 걸쳐져서 쓰러져 있었다.
“야, 정신 차려!”
바닥에는 산산조각이 난 도자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장이 여전히 헝겊 속에 들어가 있는 팔을 빼려고 하자, 나뭇가지가 내 팔을 뱅뱅 돌려 감았다.
“허! 네 짓이구나.”
나무가 팔을 터질 듯이 조이자 내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변해 갔다.
“오늘 한번 죽어 볼래?”
사장이 나뭇가지를 자르려고 하자 할아범이 재빨리 막아서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 그 녀석을 놓아주렴. 피는 아빠가 또 구해 볼게.”
“아가 좋아하네. 당장 힘 빼! 다 불태워 버리기 전에.”
사장은 웃기지도 않는지 나무와 할아범을 번갈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할아범은 행여나 나무가 상할까 겁이 났는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아가, 착하지. 착하지.”
할아범의 말을 듣고 내 팔을 휘감고 있던 나뭇가지가 스르르 풀렸다.
“저 망할 나무, 내가 가만 안 둬.”
분이 안 풀리는지 사장이 이를 갈았다. 할아범은 재우는 풀이 든 작은 주머니를 사장에게 던졌다.
“이번에는 당신이 나에게 빚진 거야. 알아들어?”
사장이 축 처진 내 몸을 어깨에 이고 말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누가 자래?”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마. 당신은 알고 있었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정말 몰랐어.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그나저나 피가 진짜 맛있었나 봐.”
“닥쳐.”
사장이 공중에 이동 거울을 만들고 나가려고 하자 할아범이 주저하며 품 안에 있던 주머니를 하나 더 던졌다.
“이걸 우려먹으면 피가 좀 돌 거야.”
급히 카페로 돌아온 사장은 의식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나를 바닥에 눕혔다.
미고는 쓰러진 날 보고 놀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사장은 대답할 여유도 없이 서둘러 할아범이 준 풀을 우렸다.
반쯤 열린 입속으로 따듯하게 우러난 물이 천천히 흘러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돌아왔다.
안색은 조금 나아졌지만 난 몸을 가누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어쩌지? 의식은 있는 거 같은데….”
“피가 너무 많아 빠져나간 거 같아요. 정신도 잠든 거 같고…. 제가 깨워 볼게요.”
미고는 내 이마에 온기로 가득한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미고가 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그사이 정신을 잃은 나는 깜깜한 어둠 속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미고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길을 잃어서 그래요. 저랑 같이 길을 찾아서 나가요.”
미고와 걷던 길의 끝엔 익숙한 느낌을 주는 텅 빈 교실이 나왔다.
교실 구석엔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한 성인 여자가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추며 바닥에 앉았다.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반에서 나만 아빠가 없어.”
“그냥아, 이 세상에 아빠가 없는 사람은 없어. 다만 잠시 아빠와 떨어져 있는 것일 뿐이야.”
엄마의 말에도 위로가 되지 않는지 아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럼 오늘 아빠한테 가까이 가 볼까?”
그녀의 말에 아이는 천천히 엄마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어서 보이는 장면은 어린 내가 엄마의 품에 안겨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커다란 동물의 등에 타고 있었는데 꼬리에 난 녹색과 분홍색의 털이 길게 늘어져서 구름 사이로 휘날렸다.
어린 나와 엄마를 태운 정체 모를 동물은 거대한 파란색 날개를 펼쳐서 공중에서 크게 커브를 돌았다.
갑옷처럼 단단한 가죽 위로 하얗고 푹신한 털이 머리서부터 등을 따라 나 있었다.
동물이 고개를 돌려 등에 타고 있는 나와 엄마를 보려고 할 때쯤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 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반쯤 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사장이 안도의 숨을 쉬는 게 보였다.
“피누누예요!”
“뭐?”
내 기억을 본 미고가 탄복하며 말했다.
“형이랑 엄마가 피누누 용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피누누는 결코 인간을 태우지 않아.”
“형, 방금 꾼 꿈 기억나요?”
내가 몽롱한 표정으로 머릿속을 더듬었다.
“응. 하늘을 날고 있었어. 어머니랑 같이.”
“저는 그게 꿈이 아니라 형의 어릴 적 기억 같거든요.”
미고의 말을 듣는데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졌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사장이 그런 날 보고 놀라며 물었다.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스르며 침묵을 지키던 내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어요.”
“뭘?”
핏발이 선 두 눈에 눈물이 그득히 고였다.
“누군가 제게서 감옥에 가뒀다는 기억 말이에요.”
“그게 뭔데?”
“어머니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