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75)

#021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니…. 나 자신이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떠올려 봐. 정말 어머니에 대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가까스로 욱여넣었던 눈물이 소용없이 다시 흘렀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가 내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움과 슬픔을 회피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누군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앗아 갈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 건 없고, 그냥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함께했던 느낌만… 남아 있어요.”

머리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검지로 세게 눌렀다. 미고는 내 뒷목을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추억은요? 이를테면 어머니랑 같이 뭘 먹고, 어딜 갔다든가 하는 기억도 없어요?”

미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을 하려고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의 얼굴초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거 하나만 기억이 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었는데…. 학원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비가 오니까 데리러 오겠다고. 제가 우산을 안 가져갔거든요.”

기억이 나는 건 이게 다였다. 마땅히 추억이라고 불릴 만한 행복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다시금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니 두개골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너 괜찮아?

“으윽! 머리가 좀 아파요.”

미고가 그런 날 말리며 말했다.

“형, 천천히 해요. 그래도 최소한 감옥에 갇힌 기억이 뭔지는 알아냈잖아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미고 말이 맞아. 기억을 찾다 보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도 알 수 있겠지. 일단 좀 쉬어.”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쉴 시간이 없어요. 얼른 이 악초를 황대찬에게 먹여야죠.”

“너 정말 괜찮겠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미고의 말대로 기억은 차근차근 되찾아야 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

“그럼 우리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두통 때문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서 사장에게 물었다.

“개두식이 황대찬을 불렀다며. 그럼 개두식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

서울 남부 교도소는 수감 중인 피의자들을 만나러 온 가족들, 지인들, 변호인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접견 신청을 위해 저마다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대찬은 개두식의 접견을 온 지금 상황이 영 마뜩잖은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머! 황대찬 변호사님 아니신가요? 실물이 더 멋있으시네.”

“아하하! 고맙습니다.”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네. 마~음껏 찍으십시오.”

그는 주변에서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소곤대거나 인사를 건넬 때마다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한지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

피누누의 오줌을 잔뜩 뿌린 우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황대찬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미고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형, 이제 좀 괜찮은 거예요?”

“오늘처럼 하나씩 기억을 찾을 수 있길 바라야지.”

내 말을 들은 미고가 살짝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거 말구요. 아픈 건 좀 괜찮냐는 얘기였어요.”

“아….”

내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고가 말했다.

“제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고마워.”

그때 사장이 ‘쉿!’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대면서 말했다.

“지금이 기회인 거 같아. 저 커피 속에 몰래 타면 되겠다.”

황대찬의 비서로 보이는 남성이 허겁지겁 아이스커피를 사다가 그에게 대령했다.

혹시라도 그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긴장하고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황대찬은 비서에게 언짢은 표정으로 턱을 들어서 나가서 기다리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사장은 재우는 악초를 바싹 말린 후에 곱게 갈아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녀가 공중에서 솔솔솔 가루를 뿌리는 시늉을 내자 황대찬이 들고 있던 커피 안에 녹색 가루가 슬며시 들어갔다.

그는 무료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한 모금을 마시고 맛이 이상한지 커피잔을 들어서 안을 뚫어져라 보는 듯했지만 이내 목이 마른지 나머지도 들이켰다.

그의 욕심만큼이나 도드라진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리자 사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대찬의 정신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가판대에 진열된 죽은 생선처럼 텅 빈 눈동자를 보아하니 악초의 효력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사장이 내게 당부하듯 말했다.

“효력이 길지 않아. 그리고 정신이 깨 버릴 수도 있으니까 너무 큰 움직임도 안 돼. 알겠지?”

“네.”

나는 긴장한 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황대찬과 그의 비서로 위장한 나는 교도소 접견실로 이동했다.

나는 황대찬의 지근거리에 붙어서 그의 정신을 조종했다. 캐릭터를 바로 앞에 두고, 3D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황대찬은 내 생각대로 말을 하고 행동했다. 비록 내 지시보다 한 템포 느리게 반응하긴 했지만.

물론 그의 정신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황대찬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가 아닌 평소의 나처럼 작은 보폭으로 조심스레 걸었다.

그리고 접견실에 놓인 싸구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는지 황대찬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눈을 지나치게 많이 깜빡이다가 또 금세 흰자위만 보이기도 했다.

잠에든 황대찬을 조종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난 개두식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황대찬의 연기를 하기 위해 속으로 끊임없이 ‘나는 개쓰레기다.’라고 되뇌었다.

“어이, 황 변호사!”

개두식은 황대찬을 보더니 느끼하게 웃었고, 뒷짐 지며 다가왔다.

개두식은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여유를 부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친구야! 와 줘서 고맙다! 솔직히 네가 올지 말지 확신이 안 섰거든. 너 요즘 잘나가잖냐. 새끼! 그렇게 정치, 정치 입에 달고 살더니 진짜 하는구나. 개, 돼지 거느리는 게 적성이라더니. 푸하하핫!”

개두식은 목을 뒤로 젖히며 과장되게 웃었다. 그의 버릇이었다.

황대찬 뒤에 멀찌감치 서 있는 나에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황대찬이 아무 말이 없자 조금은 뻘쭘해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네가 친구를 위해 이번 한 번만 구정물을 밟아 준다면 내가 평생 네 뒤를 봐주마. 알지? 정치하는 데 돈 많이 드는 거.”

황대찬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꺼냈다.

아무래도 초점이 사라진 텅 빈 눈동자를 들킬까 싶어 내가 지시한 행동이었다.

긴장한 탓에 황대찬의 손이 떨리면서 안경테 다리가 그의 눈을 쿡 찔렸다.

“흠흠.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 하러 왔어. 앞길이 창창한데 초장부터 너 같은 똥을 묻히고 갈 수는 없다. 내가 앞으로 국회의원에서 끝날 거 같아? 장관도 하고, 대통령도 해야지 않겠냐? 그러니까 앞으로 연락하지 마라.”

황대찬의 말투는 마치 교과서 읽는 것처럼 어색하고, 로봇처럼 딱딱했는데 개두식은 평소와 다른 그런 말투에서 더 불쾌감을 느꼈다.

“와~ 씨발. 이 새끼가 나를 개병신 취급하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나만 죽을 거 같냐고!!!”

황대찬이 내 지시대로 그의 말을 가볍게 비웃었다.

어색하게 벌린 입에서 침이 흘러내려 급하게 양복 소매를 끌어 올려 침을 닦게 했다.

“잠잠히 있으면 몇 년 살고 나올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얼쩡거리지 마라.”

황대찬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발목을 접질렸다.

저릿한 통증 때문에 황대찬의 정신이 돌아올락 말락 하는 게 느껴졌다.

개두식은 분을 못 이겨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그가 윗니와 아랫니를 부싯돌처럼 부딪치자 이가 갈리는 소리가 꽈드득 들렸다.

“그 사진! 나 아직도 그거 가지고 있어.”

“무슨 사진?”

당황한 황대찬의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났다.

“개눈깔 새끼 죽게 팬 다음에 옷 다 벗겨 놓고 찍은 사진 말이야. 기억 안 나? 네가 찍으라고 한 거잖아.”

개두식이 뱀처럼 매끈거리는 얼굴 근육을 써서 이기죽거렸다.

“엥? 그 사진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고?”

난 기억 속에서 발가벗겨진 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황대찬은 아예 내 말투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그 사진을 버리겠냐? 볼 때마다 웃길뿐더러 이제 황대찬 변호사님, 아니, 황 의원님한테 비싸게 쓰일 거 같은데 말이지. 하하하핫!”

개두식이 책상을 세게 내리치면서 얼굴 근육이 찢어져라 웃었다.

접견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내가 그 사진을 세상에 뿌리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천하의 황대찬 변호사의 학폭 의혹! 온몸이 피투성이에 발가벗은 개눈깔 대가리 위에 발을 올리고 있는 황대찬 변호사라… 사람들이 상상이나 하겠냐?”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태연한 그를 보며 개두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못 믿는 모양인데 내일 당장이라도 인터넷에 올릴 수 있어! 새끼야! 내 말 무시했다간 큰코다칠 거다.”

개두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견실을 나갔다.

이어 황대찬은 똥이라도 지린 것처럼 어색한 걸음걸이로 접견실을 나왔다.

내 지시와 달리 그의 행동은 점점 어눌해져 갔는데 곧 정신이 깰 거라는 신호였다.

그때 번쩍 정신이 든 황대찬이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한걸음 뒤에 서 있던 난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서둘러 몸을 피했다.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평소의 비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개두식 새끼 전화 받고 왔었지. 시발. 이 새끼랑도 연을 끊든가 해야지.”

그는 다시 변호인 접견 신청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개두식이 접견을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네. 지가 오라고 해 놓고 뭔 생각인거야? 아무튼 나야 성가신 일이 없으니까 나쁠 건 없지.”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

“개두식의 말대로 정말 사진이 있는 걸까요? 그 사진만 찾으면 황대찬의 실체도 밝힐 수 있을 텐데.”

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금 있었던 일을 사장과 미고에게 속사포 쏘듯이 말했다.

사장은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을 굽혀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말했다.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개두식이 약이 바짝 올랐으니 사진을 찾아서 황대찬을 협박하지 않겠어? 우린 감시만 하면 돼.”

“누굴요?”

“그 팔뚝에 자기가 개두식 오른팔이라고 낙서하고 다니는 녀석 있잖아.”

개두식에겐 그를 양쪽에서 밀착 수행하는 두 명의 부하가 있었다.

그들은 각각 팔뚝에 오른팔과 왼팔이라는 문신을 큼지막하게 했다.

개두식에게 충심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는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였다.

왼팔은 지난번 교통사고 때 크게 다쳐서 여전히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이제 교도소에 몸이 묶여 있는 개두식이 은밀한 지시를 내릴 만한 사람은 오른팔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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