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보탱이 한 손에는 편지를 들고 바삐 걸었다. 5마을에서 온 예언이 담긴 편지였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엔 평소의 오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긴장이 감돌았다.
그 뒤를 검은색 안대를 찬 돈돈이 쫓았다.
그 역시 숨을 죽인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만치에 허름한 오두막이 보였다.
오두막 문 앞에 서서 보탱이 돈돈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푸에르 님 앞에서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 말투, 행동, 눈빛, 숨소리 하나마저도. 절대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 알겠어?”
돈돈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마. 그게 차라리 낫겠다. 괜히 실수하느니.”
보탱은 돈돈에게 몇 번이고 당부를 한 뒤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ㅡ똑똑.
“푸에르 님, 보탱입니다.”
낡은 나무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들어와도 된다는 신호였다.
오두막 안, 마른 장작이 불에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렸다. 온기로 가득 찬 좁은 공간 안에 흔들의자 소리가 들렸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푸에르의 뒷모습을 확인하곤 보탱이 공손히 말했다.
“푸에르 님, 돈돈이란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푸에르 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푸에르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보탱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는데… 이다의 아들이 마법 세계로 왔습니다.”
삐걱거리던 흔들의자가 멈췄다. 보탱은 이를 계속 말을 하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심호흡을 했다.
“이다의 아들인 해그냥을 1마을에서 만났습니다. 아직 마력을 쓰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살아남은 회색 마녀가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다의 아들이 마법 세계는 왜 온 거지?”
푸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못으로 철판을 긁는 것 같은 불쾌한 쇳소리가 났다.
“로첼이라는 독수리 루베로에게서 들었는데,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유언? 무슨 유언을 남겼다는 거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로첼의 동생인 론을 찾아가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리고?”
“케루빔의 깃털이 해그냥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푸에르의 목소리에 일순 흥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케루빔의 깃털이? 재밌네…. 케루빔이 그자에게 날개를 허락했다는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긴장한 보탱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돈돈은 오두막에 들어온 뒤론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푸에르가 보탱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며 물었다.
“예언을 봤나?”
“네. 보았습니다. 푸에르 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에 맞설….”
보탱은 두려워서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나에게 맞설 마법사가 나온다고 했지. 너는 그 마법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모, 모르겠습니다.”
“방금 네가 그 답을 내게 가져왔는데도 모르겠다는 것인가?”
푸에르의 목소리에 약간의 노기가 어렸다.
“아…. 그렇다면 그자가 해그냥이라고 생각하시는…. 아닙니다. 그자는 푸에르 님에게 대적할 만한 자가 못 됩니다!”
보탱이 처음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어째서? 해그냥이 벌써 케루빔의 깃털을 얻었다고 네가 말했지 않은가.”
“그… 그야 그렇지만….”
푸에르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미소가 점점 입가에 크게 번졌다.
“처음에 5마을 예언을 봤을 때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난 세상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푸에르가 벽난로 쪽으로 입김을 불자 타고 있던 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오두막 안은 어두컴컴해졌고, 창밖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이제야 알겠어. 욘 게일의 예언은 틀린 게 아니었다. 단지 뒤바뀌었을 뿐.”
“뒤바뀌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탱의 입에서 한기가 서린 입김이 나왔다. 집 안 곳곳에 서릿발이 섰다.
사실은 이랬다.
푸에르는 오늘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매일 거저 주어지는 지독한 권태를 살해할 작정이었다.
삶의 목표나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할 일도, 할 말도 없었다. 그러니 어떤 힘도 자신에게서 느낄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이다의 아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거짓말보다 더 지독한 것은 어긋날 진실이지. 욘의 예언은 틀렸다.”
푸에르의 복귀를 간절히 바랐던 보탱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언이 틀렸다니…. 그럼 다시 모습을 드러내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인가?’
그런 보탱의 속내를 들여다보듯 푸에르가 다시 말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에게 맞설 마법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다의 아들이 마법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가 날 부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화답하겠다는 것이다.”
푸에르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점점 발작 수준으로 번졌다.
“이다의 아들이 나의 세계로 왔으니…. 내가 친히 그를 맞이하러 가겠다. 그리고 그의 파멸을 보겠다.”
단 5분만 늦었어도, 푸에르의 존재는 사라지고, 이야기는 소리소문없이 끝이 났을 거였다.
욘의 예언은 비록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결국 이루어졌다.
***
드디어 마법사 장터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난 이불 속에서 회사에 가지 말까, 한 백 번쯤 고민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연차는 최대한 아껴 둬야 했다. 급할 때 써야 할 수도 있었으니.
건강을 되찾은 진우는 다행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곧 업무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회사에서 하던 프로젝트도 거의 마무리가 돼서, 이제 마녀국밥 김순자를 만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자 회식하기를 좋아하는 김 부장이 또 한 번 회사 근처 알탕집을 가자고 졸랐다.
난 정중하게 이를 거절하고 서둘러 퇴근했다.
회사 사람들이 내가 예전과 달라졌다며 수군대는 걸 알고 있었다.
그중에 여자친구가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지난번 탕비실 입구에서 직원들이 이전에 비해 내가 많이 밝아지고, 또 인사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저렇게 잘생겼는지 미처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이전엔 사무실에서 인사도 잘 안 하고, 어두웠던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인생이란 지독하리만큼 지루한 패턴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는 게 텅 빈 운동장을 도는 일 같았다.
손발톱이 자라듯, 내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잰걸음으로 회사를 나와 카페로 향했다. 사장과 미고, 다 같이 마법사 장터에서 쇼핑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마녀국밥 김순자를 만나는 일도 중요했지만, 지팡이 수리점에 가서 지팡이도 고쳐야 하고, 사장은 간만에 새 옷을 산다고 들떠 있었다.
미고는 비어 있는 한쪽 눈알을 가려 줄 안대를 사기로 했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사장과 미고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왜 이제 와!”
“왜 이제 와요~~”
그들이 날 애타게 기다렸다는 사실과 채근하며 내는 짜증도 싫지 않아서 웃음을 터뜨렸다.
“저 회사 끝나면 항상 이 시간이잖아요. 새삼스럽게.”
장사는 접었는지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얼른 가자. 할 일이 많아.”
사장이 청록색 문을 열기 전에 ‘아! 맞다.’라고 말하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사장은 가방에서 얇고 넓적한 은색의 판때기를 꺼냈다. 판때기에는 숫자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자, 받아.”
“뭐예요? 혹시 이게 여기 돈이에요?”
“응. 페닌이라고 불러. 7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이 새겨져 있지. 각자 200페닌씩 줄 테니까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도록 해.”
나와 미고는 사장이 준 200페닌을 받아 들고 벅찬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페닌은 그 자체로도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이걸 내고 물건을 사는 게 아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페닌은 화폐 단위별로 7개 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그동안 카페에서 열심히 일한 대가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사장이 청록색 문에 달린 금장의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휴점이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문밖에서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직 그곳은 날이 더 밝았다. 계절은 비슷한데 해가 좀 더 긴 느낌이랄까.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개성이 넘치는 옷차림의 마법사들이 바글거렸다.
카페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가게는 서점이었다. 가게 입구에 놓인 커다란 책 위에 연필 한 자루가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적고 있었다.
서점 옆엔 요란한 풍선 가게가 있었다. 주로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풍선 가게 사장이 풍선을 크게 불고 나서 입구를 조금 열면, 아이들이 풍선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을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보다는 사장의 입 냄새가 더 견디기 힘든지 아이들은 코를 움켜쥐었다.
풍선 속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사장이 풍선을 더욱 크게 불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아이들을 태운 풍선은 하늘 위로 둥둥 떠올라서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우린 대규모의 퍼레이드 한가운데에서 떠밀리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사장이 안경점에 먼저 들르자며, 미고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키가 큰 대머리에. 앙고라 털 장식이 달린 안경을 낀 주인이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세용. 뭘 찾으실까용?”
미고가 사장에게 필요한 물건에 대해 말할 동안 나는 찬찬히 가게 물건을 구경했다.
쓰면 눈이 커 보이는 안경부터, 뒤를 볼 수 있는 뒤통수 전용 안경까지 다양한 안경이 진열돼 있었다.
난 입고 있는 옷 색깔에 따라 안경알 색이 변하는 선글라스에 흥미가 생겨 만지작거렸다. 이거라면 인간 세계에서도 충분히 쓸 만했다.
크기와 색깔별로 진열된 가짜 눈알도 있었지만, 미고는 그저 인조 가죽으로 만든 평범한 황토색 안대를 6페닌에 샀다.
“더 멋진 것도 많은데… 이걸로 사게?”
난 마치 안경점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미고의 선택에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다.
“제 잃어버린 다른 한쪽 눈이 어두운 자루 속에 들어가 있거든요. 안대를 하고 있어야 눈알이 자루에서 나왔을 때 어딘지 파악하기가 수월할 거 같아요.”
“아…. 하긴, 그렇겠다.”
내가 미고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샀으면 이제 옷 사러 가자. 개점 첫날 할인 행사가 있을지도 몰라. 보라색 가죽 바지를 꼭 사야 한다고.”
옷가게에서 나오는데 사장의 시선이 한곳에 꽂혀서 움직이질 않았다.
“사장님, 왜 그래요?”
“어? 저기 김순자잖아. 마녀국밥 주인 말이야. 저 아주머니 장사는 안 하고, 지금 어디 가?”
사장의 말에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이전에 마녀국밥 간판에 있던 김순자의 불그죽죽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난 듯 불안정해 보였는데, 언뜻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김순자 여사! 어딜 그렇게 급히 가셔?”
사장이 김순자의 꽁무니에 대고 크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김순자는 작은 키를 하고 뒤뚱뒤뚱 걷더니,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