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김순자 여사는 순식간에 골목 어귀로 사라져 버렸다.
“사장님, 여기서 마녀국밥 멀지 않죠? 거기 먼저 들러요.”
난 어쩐지 불안해져서 옷가게에 들어가려는 사장의 옷 끄트머리를 잡고 끌었다.
사장을 앞세워 가 보니, 역시나 다른 가게들은 모두 열었는데 오직 마녀국밥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닫았어요.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그때 미고가 문 앞에 붙어 있는 작은 종잇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뭐가 적혀 있는데요?”
[오늘 문 안 연다. 내일은 열 수도 있음.]
대충 갈겨쓴 글씨가 삐뚤빼뚤 어린애 낙서처럼 보였다.
“열면 열고, 닫으면 닫는 거지 열 수도 있음은 또 뭐예요?”
사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옷가게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일은 열겠지. 얼른 가자! 개장 첫날 할인을 놓칠 수 없다고. 또 알아? 쇼핑하다 보면 만날지.”
“일이 또 꼬이는 건 아니겠죠? 이번엔 좀 수월했으면 좋겠는데.”
사장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가서 미고 옷도 사고, 너도 옷을 좀 사는 게 어때? 너는 어째 맨날 내가 만든 정장만 입냐?”
“그야 퇴근하고 바로 왔으니까 그렇죠.”
“누가 만들었는지 기가 막히네. 얼른 가자!”
평소보다 텐션이 올라간 사장이 우리를 끌고 자신의 단골 옷가게로 들어갔다. 안에는 화려하고 독특한 옷들이 가득했다.
그곳엔 입으면 날씬해 보이는 옷, 뚱뚱해 보이는 옷, 근육질처럼 보이는 옷까지 마법으로 착시를 일으키는 옷들도 일렬로 걸려 있었다.
신기한 건 마법 거울이 가게 안의 옷을 착용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실제로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난 거울 속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형광 주황색 바디 슈트를 입은 내 모습이 민망해서 누가 볼세라 행거 뒤로 몸을 피했다.
‘신기하긴 하네.’
호기심에 다시 거울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마동석처럼 몸집이 거대해지고 아랫배가 나와 보이는 뚱보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 사장은 짙은 보라색에,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인조 가죽 바지를 직접 입고 옷가게 복도를 런웨이처럼 오갔다.
“광택이 마음에 들어!”
바지 밑단에 달린 화려한 숄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미고는 사장이 추천하는 옷을 모두 마다하더니 벙거지 모자 하나를 골랐다.
“어때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묻는 미고에게 난 엄지를 추켜세웠다.
“아주 잘 어울려.”
미고가 내 칭찬을 듣더니 자신감을 얻었는지 거울을 보며 여러 각도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얼마예요?”
짙은 화장을 한 옷가게 주인이자 디자이너인 장자르가 완벽히 손질된 손톱을 보이며 말했다.
“24페닌.”
생각보다 비쌌는지 미고가 망설이는 게 보이자 내가 24페닌을 주인에게 주었다.
“형! 제가 살게요!”
“아니야.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
마법 세계에서 무언가를 사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게 미고에게 줄 선물이라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해그냥, 너는 안 사?”
사장은 내가 아까부터 힐끔거렸던 자주색 스웨터를 입어 보라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마다했다.
갈색 지팡이가 수놓아진 자주색 스웨터는 내심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평소에 입는 옷이랑 비교하면 너무… 튀었다.
“예쁜데 왜?”
“그게 색이 너무 튀어서요.”
“어디에, 뭐가 튄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만 예쁘면 되지. 뭔 생각이 그리 많은지.”
사장은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입어 보지도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가게에서 나왔다.
미고의 배에서 먹을 것을 좀 넣으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꼬르륵 소리가 났다.
“뭘 좀 먹을까?”
사장의 말에 미고가 반색을 하며 노점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주로 아이들의 군것질거리가 있는, 우리 식으로 하면 불량 식품 가게였다.
미고는 훈제 거위 맛이 나는 껌을 집었다. 군것질 가게 사장님이 껌을 팔기 전에 당부했다.
“껌으로 풍선을 만들면 안 돼요. 풍선이 터질 때 고약한 트림 냄새가 나거든.”
군것질 가게 사장이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씹고 있는 껌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가 만든 풍선이 점점 커지다가 뽁, 귀여운 소리를 내며 터지자 어마어마한 냄새가 났다.
질색하며 코를 막는 우릴 보며 군것질 가게 사장이 낄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이히히히! 너무 재밌어. 재밌어서 이 기능을 뺄 수가 없다니까.”
미고가 여전히 불량 식품 쇼핑에 빠져 있을 동안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액세서리 가게에 들렀다.
입구에 예쁜 브로치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길에서 파는 이름 모를 꽃들을 말려서 엮은 브로치였다.
“이거 사게? 양복에 달고 다니면 예쁘긴 하겠네.”
“제 거가 아니라, 어머니 거예요. 이번에 김순자 여사님 볼일만 마치면 납골당에 다녀오려고 해요. 언제 갔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그래. 같이 갈까?”
“아뇨. 저 혼자 가도 돼요.”
“괜찮겠어?”
“네.”
사장의 말투는 여간 차가운 게 아닌데 하는 말의 내용을 들어 보면 사려 깊은 말이 많다.
나는 브로치 하나를 17페닌을 주고 사서 재킷 안주머니에 고이 담았다.
슬슬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가게들이 저마다 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내 시계로는 밤 9시인데, 여긴 이제야 날이 지는 걸 보니 시차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문이 닫혔던 마녀국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사장님! 저기 연기 마녀국밥 굴뚝에서 나오는 거 맞죠? 안에 누가 있나 봐요.”
“그러네? 가 보자.”
어느덧 마녀국밥 앞에 도착한 우린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앞을 기웃거리며 노크를 했다.
ㅡ똑똑똑.
“김순자 여사! 안에 없어? 나 이레야. 좀 나와 봐~”
사장은 자기 기분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썼는데, 그 누구도 이를 지적하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사장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건지, 원래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별로 없는 건지 헷갈렸다.
그때 문을 열고 피곤한 기색의 김순자 여사가 나왔다. 그녀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들면서 말했다.
“왜 자꾸 불러! 정신없어 죽겠고만.”
김순자는 사장 옆에 서 있는 미고와 나를 번갈아 봤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린 김순자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됐어도 깔끔한 목재형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메뉴판에 적힌 메뉴는 마녀국밥 딱 한 개였다.
“국밥 세 그릇 줘요.”
사장이 다시 존댓말을 쓰며 말했다.
“오늘은 장사 안 해.”
김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왜 안 하는데요?”
“아~ 몰라. 왜 온 거야? 그냥 국밥 먹으려고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사장이 찾아온 용건은 나더러 말하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해그냥이라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 성함이 이다예요. 혹시 저희 어머니를 아시나요?”
이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를 보는 김순자 여사의 눈빛이 변했다.
“정말 네가 이다의 아들이라고? 그래…. 가만 보니 많이 닮았네.”
김순자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특히나 그 보랏빛 눈동자 말이야. 정말 똑같군!”
“저희 어머니도 눈동자가 보라색이었어요?”
“뭐여? 아들이라면서 그것도 몰라?”
김순자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장이 그럴 만한 사정이 다 있다면서 나를 감싸 주었다.
김순자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낯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이다는 잘 지내지? 설마 혹시….”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김순자가 전과는 달리 침착해지더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의 미안함의 표현인 듯했다.
“어휴…. 그렇게 된 거구먼. 늙은이보다도 먼저 가 버리고 참 야속하네.”
김순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가서 국밥 세 그릇을 들고 나왔다.
“자네는 왼쪽 눈만 보라색이지만 이다는 양쪽 눈이 다 보라색이었어. 보랏빛 호수처럼 참 아름다웠지.”
“저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지금 내 처지가 그랬다. 나의 어머니를 다른 사람에게 배워야 했다. 부끄러웠지만 그렇게라도 알고 싶었다. 나의 어머니에 대해.
“이다는 참 엉뚱한 구석이 있었어.”
“엉뚱한 구석이요?”
“이다는 우리 국밥집에서 시들어서 버리는 풀떼기를 얻어다가 인간 세상으로 나갔어. 할머니로 변장해서 시장에서 그걸 팔았지.”
김순자는 이다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근데 무슨 재주인지는 몰라도 그 시들어 빠진 풀떼기를 매번 다 팔더란 말이야.”
독수리 루베로인 론에게 들은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물었지. 대체 그 쓰레기를 가져다가 어떻게 파는 거냐고. 어떤 남자가 매일 와서 그걸 다 사 간다는 거야.”
“남자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사 가는 게 바보가 틀림없다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너무 착해서 그런 거라나? 할머니로 변신한 이다가 아무도 사지 않을 풀떼기를 팔러 나온 게 안타까웠나 보지.”
나는 순간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혹시 그 남자가….”
내가 혼혈인 것을 알게 된 후 마법사인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을까, 그게 늘 궁금했다. 오늘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 남자가 네 아버지야. 아무튼 이다는 그 남자에게 푹 빠졌어. 어느 날은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그 남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더군. 그 이후로 이다는 날 찾아오지 않았어.”
미고가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는지 갸륵한 눈빛을 하고 내 손을 지그시 잡았다.
부모님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남에게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처지가 서글픈 기분이 들기도 했다.
김순자는 식기 전에 먹으라며 숟가락을 손에 쥐여 줬다. 우린 잠시 말없이 국밥을 먹었다.
후르륵, 뜨거운 국밥 한술을 떴다. 얼큰하고 구수하니, 진한 고깃국물 맛이 났다. 그 와중에 시큼한 감칠맛이 나는 게 일반적인 국밥과 맛에 차이가 있었다.
먹다 보니 어쩐지 맛이 익숙했다. 분명 처음 먹어 보는 맛인데도, 이상하게 먹어 본 느낌이랄까.
“맛이 좀 익숙하네요.”
그때 찌릿하고 전기가 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처럼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 조각 파편처럼 예전 기억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국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미고가 조심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형…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그때 잊고 있던 과거 기억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국밥이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온 것이었다.
‘전에도 먹어 본 적이 있어….’
머릿속에서 김순자의 국밥과 관련된 기억이 연기처럼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기억 속의 나는 어머니가 해 준 국밥을 먹으며 엉엉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