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75)

#027화

이제 기억이 좀 난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자존심 때문인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던 거 같다.

과거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국밥을 먹다가 꾹꾹 참던 설움이 터져 버렸고, 그간 있었던 일을 어머니께 모두 털어놓았다.

아주 짧은 찰나의 기억이었지만 강렬했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던 미고 역시 내가 떠올린 기억을 함께 본 모양이었다.

심각한 표정의 나와 미고를 보고 사장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대신해서 미고가 말했다.

“형이 이 국밥을 먹고, 이전 기억이 떠오른 거 같아요. 기억은 머리에만 담기는 것이 아니니까요. 머리에서 지워도 몸이 기억하거든요. 어떤 체취나 특유의 맛이나 하는 그런 것들이요.”

“그래서 어떤 기억이 난 건데?”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사장과 눈을 맞췄다. 심란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지만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중학교 1학년 때쯤 기억 같고, 어머니가 이 국밥을 직접 끓여 주셨던 기억이에요.”

사장의 옆에 있던 김순자가 내 말을 듣더니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탁 치면서 말했다.

“이다가 너에게 이 국밥을 끓여 주지 않았을 리가 없지! 이 국밥 레시피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다니까.”

“저희 어머니가요?”

“그래. 이다가 인간 세상에서 먹어 봤다면서 이리저리 조합한 국밥 레시피를 알려 줬고, 그 덕분에 여기에 자리를 잡고 국밥집을 하게 된 거야. 내 음식 솜씨론? 어림도 없었지.”

이어진 김순자의 말은 이랬다.

검은 마녀였던 김순자는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검은 마녀는 회색 마녀와 달리 인간과 마법사들에게 저주를 걸고 다녀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정작 김순자는 저주를 거는 것엔 재능이 없었다. 검은 마녀들은 그녀를 저주도 못 거는 마녀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그녀가 검은 마녀인 사실만 두고 피하거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도는 김순자가 국밥집을 차려서 마법사 장터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운 게 어머니 이다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거군요.”

편지에 적힌, 김순자가 어머니께 받았다던 도움이 바로 국밥 레시피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실은 제가 여기 찾아온 이유가 어머니께서 남긴 편지에 마녀국밥 김순자 여사님을 찾아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서였거든요.”

“뭐? 나를?”

김순자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없으신가요?

“흠… 아…!”

그제야 뭔가 떠올랐는지 김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 선반 가장 위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뒀던 거 같은데…. 그래, 여기 있네. 여기.”

김순자가 들고 있는 건 모서리가 다 헤진 낡은 수첩이었다.

수첩 가운데에 큼지막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그건… 어머니 이름인 이다였다.

“어? 그거 저희 어머니 거예요?”

“응. 맞아.”

김순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수첩을 건네서 주지 않고 자신의 옷 안쪽 주머니에 담았다.

수첩이 궁금했던 사장과 미고도 김순자가 도로 수첩을 주머니에 넣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뭐…지? 왜 안 주고 도로 넣어?”

사장이 당황해서 다시 반말을 쓰며 김순자에게 물었다.

“이다가 나를 찾아오라고 한 이유가 아마도 이 수첩 때문인 거 같아. 하지만 이제껏 수첩을 잘 보관한 내 공도 있으니까… 이다의 아들,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해.”

사장이 미간 사이에 살며시 주름을 만들면서 끼어들었다.

“그냥은 안 주겠다? 어휴! 아무튼 마녀들이란…. 그래!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뭔데??”

사장이 열이 살짝 받는지 머리카락을 나풀거렸다.

“요즘 길 건너편에 새로운 국밥집이 생겨서 거기로 손님을 모두 뺏겼어. 망하기 일보 직전이야. 그래서 문을 닫고, 신메뉴를 개발 중이었지.”

나는 수첩을 넣은 안쪽 주머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김순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이다가 종종 해 줬던 고기볶음을 신메뉴로 내놓고 싶은데, 내가 하면 영 그 맛이 안 나. 이다가 분명 너한테 그 고기볶음을 해 줬을 테니 기억을 더듬어서 레시피를 좀 알려 주면….”

내가 김순자의 말을 중간에 끊고 말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한 고기볶음을 먹어 봤을 수도 있죠. 근데 전 그 음식을 먹었던 기억조차 없어요. 이런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지….”

기억이 난다면야,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먹었던 기억도 없는 음식을 무슨 수로 만든다는 말인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김순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만 보니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기억을 잃어버린 모양인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기억 일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나한테 그게 있거든. 석순….”

느닷없이 석순이라니, 김순자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사장과 미고를 바라봤다.

나와 달리 사장과 미고는 김순자가 말하는 석순에 대해서 잘 아는 눈치였다.

“혹시 현혹 동굴에서 난 석순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거 불법인 거는 알지? 알려지면 여기 영업 정지야. 아니지, 영영 문 닫아야 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사장이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추면서 속삭였다.

“그게 뭔데요? 정말 그게 있으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어요?”

옆에 앉아 있던 미고가 내게 덧붙여 설명했다.

“5마을에 현혹의 동굴이란 곳이 있어요. 그곳에서 자라는 석순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능력이 있거든요.”

사장이 팔짱을 끼고 김순자를 수상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석순을 이용해서 타인의 기억도 엿볼 수 있어. 악용될 소지가 있어서 석순을 떼 오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고.”

김순자가 언제 가져왔는지 검은색 슈트 케이스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자물쇠를 열었다.

척- 하고 열린 가방 안에 12센티미터가량 되는 석순이 보관되어 있었다.

“와…. 진짜네? 이걸 어디서 구한 거야??”

사장이 석순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해서 물었다.

“내가 착실하게 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검은 마녀잖아. 아주 오래전에 어둠의 경로로 구한 거야. 딱히 쓸 데가 없어서 보관 중이었고.”

기억만 되찾을 수 있다면 아무렴 어떤가. 난 오히려 김순자의 제안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면 돼요? 해 볼게요. 기억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요.”

고개를 돌려 미고와 사장의 눈을 마주쳤다. 우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김순자가 가방에서 석순을 꺼내서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론 기억의 아주 일부만 볼 수 있어. 난 네 기억 속에서 이다가 해 줬던 고기볶음에 관련된 기억을 찾을 거야. 이제 눈을 감고 집중해….”

갑자기 주위 불빛이 깜빡이더니 금세 어둑어둑해지고, 가게 안으로 찬바람이 쌩- 하고 들어왔다.

김순자가 눈을 감고 석순에 손을 올린 채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석순이 촛농처럼 녹기 시작했다.

금세 찐득하게 녹은 석순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어둑어둑했던 주변이 완전히 암흑으로 뒤덮이더니,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있으니 냄새뿐만 아니라, 프라이팬에 뭔가를 볶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냄새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서 어머니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아들! 여기로 좀 와 봐.”

기억 속 어린 나는 어머니의 말에 쪼르르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

“왜.”

“지금 심심하지? 엄마 요리하는 것 좀 보고 배워 둬. 나중에 다 써먹을 데가 있을 거야.”

어머니가 프라이팬을 휘적휘적 저으면서 말했다.

“잘 봐. 엄마 고향에선 램보리 뒷다리 고기로 했는데, 여긴 그게 없으니까 돼지 앞다릿살로 하는 거야.”

나는 냉장고에서 탄산음료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우선 고기를 양념에 재워야 하는데 고추장 두 숟가락, 간장 세 숟가락, 다진 마늘 한 숟가락 반, 사과랑 배를 갈아서 200그램, 마지막으로 술을 넣어.”

어머니는 고기를 양념에 모두 재운 후 냉장고에 담았다.

“이렇게 반나절 정도 두고, 센 불에 익혀 먹으면 돼. 엄마 고향에 있는 치치 나무 열매를 넣으면 맛이 훨씬 고급스러워져. 향신료 역할을 하거든.”

어머니는 귀찮아하는 어린 나를 붙들고 꾸역꾸역 고기볶음 조리법을 설명했다.

“아~ 왜 그러는데? 엄마 어디 가?”

평소와 다른 모습에 내가 어머니께 물었다.

“아니? 내가 우리 아들 두고 어딜 가겠어. 이제 너도 컸으니까 이 정도는 알고 있으라는 거지, 뭘.”

잊고 있던 예전 기억을 본 후에 큰 상가에 불이 하나씩 차츰 꺼지는 것처럼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기억에서 빠져나와 다시 허름한 마녀국밥집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정신이 들어?”

휘정거리는 내 몸을 부축하며 사장이 물었다.

김순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가 전전긍긍 몸을 꼬며 물었다.

“어때? 고기볶음!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알아냈어?”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순자는 오예!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저 이기적이고 철없는 마녀 같으니… 얼른 수첩이나 내놔!”

입술을 실룩거리던 사장이 김순자에게서 수첩을 가로채며 물었다.

“너 괜찮은 거야?”

“네. 제가 엄마, 라고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아니라.”

김순자가 마음이 급한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재촉했다.

“얼른 만들어 보자. 신메뉴 개발도 개발이지만, 사실 그 고기볶음이 너무 먹고 싶었다고.”

“램보리 뒷다릿살이랑 치치 나무 열매 있어요? 그게 필요한데.”

“치치 나무 열매? 있지! 있고 말고! 역시… 그게 들어가는 거였군!”

그 외의 나머지 재료는 평범했다. 나는 기억 속에서 봤던 것처럼 갖가지 양념에 얇게 썬 고기를 담갔다.

“이대로 반나절은 푹 재워야 돼요. 그리고 센 불로 구워서 먹는 거랬어요.”

나는 어머니의 수첩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보물처럼 품에 꼭 안았다. 얼른 집에 가서 차분히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요리를 마치고 갈 준비를 하자 김순자가 말했다.

“엥, 가게? 안 먹고 가?”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 꼭 먹으러 올게요. 어머니 요리.”

“그래. 꼭 와! 서비스로 줄게!”

한껏 기분이 들뜬 김순자는 가게 미닫이문을 열어 우리를 배웅했다.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했다. 도깨비불이 켜진 가로등이 어둠이 깔린 거리를 밝혔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거리를 걸으면서 수첩을 펼쳤다. 미고와 사장도 궁금했는지 내 옆으로 가까이 붙어 걸었다.

수첩 안에는 어머니가 개발한 다양한 마법 주문이 담겨 있었다.

미고가 노트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엉덩이에 큰 종기를 만드는 마법? 상대를 위협하는 무서운 목소리를 내는 마법? 형! 재밌는 마법이 많아요!”

사장이 글 바로 밑에 적힌 날짜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쓴 노트인가 보네. 날짜 적힌 거 봐. 벌써 40년도 더 전에 쓴 거잖아.”

“어?! 진짜네.”

어머니가 어릴 적 쓰던 마법 노트라니….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뭉클함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밖에도 괴상한 마법 주문들이 가득한 노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길을 걷는데 그때 보이지 않는 어떤 강한 힘이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세게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어…? 어!!! 이게 왜 이러지?”

하마터면 수첩을 완전히 빼앗길 뻔했다. 그나마 내가 수첩 끄트머리를 꽉 붙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갑작스럽게 허공을 상대로 힘 싸움을 하는 나를 보고 미고가 당황한 듯 외쳤다.

수첩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이 어떤 힘에 의해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수, 수첩이 갑자기!!!”

난 수첩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썼다.

한 손으로 수첩을 꽉 부여잡고, 보이진 않지만, 수첩을 잡아당기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투명 망토가 걷히더니 바로 눈앞에 독수리 로첼이 모습을 드러냈다.

ㅡ까악! 깍!

로첼은 황급히 투명 망토 안으로 다시 몸을 숨겼다.

“로첼이에요!!! 로첼이 수첩을 뺏으려고 해요!”

수첩을 뺏기지 않기 위해 순간적으로 수첩 한쪽을 세게 잡아당겼고, 수첩은 반쪽으로 부욱- 찢겼다.

“안 돼!!!”

기척을 감추는 투명 망토를 입고, 로첼이 근거리까지 날아와 수첩을 가로챈 것이었다.

수첩의 반쪽을 얻는 데 성공한 로첼은 흘러내렸던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고 하늘 위로 솟구치며 날아갔다.

“뭐? 로첼??? 로첼이 나타났다는 거야? 그 망할 놈의 독수리!”

사장은 순식간에 사라진 로첼을 찾기 위해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미고가 뒤늦게 까마귀로 변신해서 따라 날아갔고, 사장도 로첼이 날아간 쪽으로 머리카락 창을 날렸지만 보이지가 않으니 헛수고였다.

수첩은 갈가리 찢겼고, 수첩의 앞부분만 남긴 채 내 손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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