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75)

#028화

갈기갈기 찢긴 수첩을 보니 분노가 솟구쳤다.

간신히 얻은 어머니의 흔적인 데다가 뒷부분 내용은 아직 확인도 하지 못했다.

로첼을 찾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라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등 쪽의 근육이 강하게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등에서 내 몸집의 두세 배에 이르는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날개가 크게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자 몸이 금세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투명 망토를 쓴 로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난 사방을 둘러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마치 증강 현실에서 발견한 오류같이 픽셀이 어색하게 깨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저기야!’

바로 위쪽엔 로첼이 미리 만들어 둔 이동 거울이 빠른 속도로 작아지고 있었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단숨에 그곳까지 날아갔지만, 로첼은 지름이 15센티미터 정도로 작아진 이동 거울 속으로 쏙- 빠져나갔다.

작은 이동 거울 너머로 로첼이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놈의 새끼야! 그 날개는 네 것이 아니야!”

이동 거울은 깨트릴 새도 없이 바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코앞에서 로첼을 놓치고 허탈한 마음으로 결국 땅으로 내려왔다.

사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거, 저 망할 놈의 독수리! 그때 살려 두는 게 아니었어!!!”

뒤따라 땅으로 내려온 미고가 거들며 말했다.

“그동안 우리 뒤를 밟았나 봐요!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나는 미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루빔의 깃털을 빼앗긴 것에 대한 원한이 컸으니 되찾으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근데요. 어째서 어머니의 수첩을 노린 걸까요? 평범한 수첩이었는데… 대체 왜.”

정확히 반으로 찢긴 수첩은 중앙 박음질 부분이 뜯겨서 너덜너덜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조심해야겠어. 로첼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아니지? 나타나기만 해 봐라. 내가 가만두나!”

사장이 양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두 눈을 번뜩였다.

우린 엉망이 된 수첩만큼이나 엉망이 된 기분으로 카페로 돌아왔다.

사장이 너덜너덜해진 수첩을 굵은 실로 단단히 고정했다. 최악은 이 수첩의 뒷부분에 뭐가 적혔는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는 거였다.

사장이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로첼에게서 다시 뺏으면 돼. 어머니 수첩 뒷부분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사장답지 않은 따듯한 위로의 말이었다. 미고도 내 눈치를 잔뜩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만 집에 가 볼게요. 가서 좀 진정하고 찬찬히 읽어 보려고요.”

“그래. 그렇게 해.”

나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카페 문을 나섰다. 집에 가는 내내 가방 속에 든 어머니의 수첩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집에 도착한 나는 씻지도 않고 침대 모퉁이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아까 언뜻 봤던 대로 수첩은 어릴 적 어머니가 개발한 마법 주문으로 가득했다.

[상대가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운 목소리를 내는 마법]

[엉덩이에 주먹만 한 종기를 만드는 마법]

[화낼 때마다 까르르 웃음이 터지게 하는 마법]

[거짓말하면 딸꾹질 나게 하는 마법]

보통은 이런 무해하고, 장난기 어린 마법 주문들이 많았지만 간혹 공격 마법도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게 있었는데 바로 [사람에게서 뿌리가 돋아나게 하는 마법]이었다.

[아주 어려움, 수백 번의 연습을 통해 겨우 성공함. 결과는? 어마어마하다. 꽤나 강한 공격이자 방어 마법으로 쓰일 것 같은 느낌!]

주문 아래에 어머니의 생각이 담긴 낙서가 적혀 있었다.

‘사람에게서 뿌리를 만들어 낸다라….’

악초 할아범의 정원에서 봤던 인간 나무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이 마법을 쓴 것일까? 그 아래에 단계별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

[주의. 사람에게 쓰기 전에 작은 식물을 대상으로 먼저 연습할 것]

1. 씨앗을 작은 화분에 심는다. 가시가 있는 식물은 피할 것! (무성하게 자랄 것에 대비)

2. 지팡이를 땅속 씨앗에 겨누고 주문을 왼다. 머릿속으로는 씨앗에서 움트는 싹을 떠올릴 것.

주문: 뿌리야, 돋아라. 솟아라. 흙을 세게 움켜쥐어라.

3. 매일 연습하면 식물이 훨씬 빠르게 자랄 것이다. 나중에 숙련되면 씨앗을 심은 지 하루 만에 뿌리가 자라서 화분을 깨트리는 것을 보게 될지도.

(솔직히 놀랐다. 나… 좀 대단한 마법사일지도?!)

어머니가 적은 낙서를 보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시지만 오늘 기억 속에서 본 어머니를 다시 떠올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내게 고기볶음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

‘역시 본인의 운명을 알고 계셨던 건가. 유품 중엔 징조를 밝히는 초가 있었으니, 이걸 통해 알았을 수도 있지.’

나는 한참 동안 수첩을 뒤적거리다가 침대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애착 인형인 양 수첩을 품에 꼭 껴안고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나는 카페가 아닌, 서울 외곽에 위치한 납골당으로 향했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는 마법사 장터에서 산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납골당은 전에 언제 왔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오랜만이었다. 내가 참 무심했다 싶은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빽빽하게 들어선 칸막이 사이로 어머니 유골함이 놓인 곳을 찾았다.

어머니 이름이 적힌 유골함 옆에 초등학교 졸업식에 어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휑하네.’

나는 품에서 브로치를 꺼내 액자 옆에 세웠다. 꽃은 늘 삭막한 풍경을 조금이나마 따듯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열었던 작은 유리문을 닫으려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처럼.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또 어떤 미래를 보게 되는가 싶어서 숨을 죽였지만,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뭐지?’

양팔에 오소소 닭살이 올라왔다. 나는 뭐에 홀린 듯이 [이다]라고 적힌 어머니의 유골함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 반질반질한 도자기에 형광등이 반사되어 눈이 시렸다.

나는 천천히 유골함 뚜껑을 열었다. 목 뒤로 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유골함 속을 확인했을 때, 나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헉….’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면서 들고 있던 유골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ㅡ와장창.

유골함은 비어 있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골이 사라졌다.

누군가 어머니의 유골을 훔쳤다.

***

나는 그길로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사장은 없고, 미고만 부산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았다.

“형~”

미고가 커피를 내리는 와중에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사장님은 어디 계셔?”

미고에겐 미안했지만,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마음에 없는 미소나마 짓기가 힘겨웠다.

“사장님은 지팡이 수리점에 가셨어요. 형 지팡이 고친다고요. 근데… 형, 괜찮아요? 표정이 너무 안 좋아요.”

미고는 어제 일로 내가 아직 마음이 상했다고 생각했는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주방에 있는 미고를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금방 올게.”

내가 마법사 장터로 나가는 청록색 문의 문고리를 돌리자, 미고가 황급히 이를 말렸다.

“형! 어디 가요?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좀 기다렸다가 사장님이랑 같이 가면….”

“아니야. 금방 올 거니까 걱정 마.”

난 청록색 문 바로 맞은편에 있던 서점을 떠올렸다.

‘분명 나무 간판에 책 모양이 그려진 것을 봤어. 서점이 틀림없어.’

마법사 거리에 혼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뻑뻑하게 돌아가는 문고리를 힘주어 돌렸다.

문을 열자,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고, 오가는 마법사들이 몇 보였지만 제 갈 길에 바빴다.

난 카페 출입구에서 맞은편 서점까지 정확히 열두 걸음을 성큼성큼 걸었다.

서점 출입문 앞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었다.

하얀 책장 위를 연필이 삭삭,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난 저절로 움직이는 연필이 무얼 쓰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키가 크고, 외모가 멀끔하지만 어쩐지 주눅이 들고, 심란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서점 앞을 서성였다. 그는 어른의 몸뚱이를 입었지만,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무구한 아이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어? 지금 내 이야기를 쓰는 거야?’

연필이 책에 적고 있는 건 아무래도 내 이야기인 거 같았다.

[본인은 자신이 외지인이라고 믿었지만, 그는 이 거리의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묘사한 이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공연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래된 버릇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입술은 늘 건조하고 텄다.]

책이 무얼 쓰나 뚫어져라 봤지만, 연필은 이내 글을 쓰기를 멈추고 더 이상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어서 그런가?’

내가 움직이는 책을 지나쳐 서점 문을 열자, 그제야 연필이 다시 움직임을 되찾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서점 문을 열었다.]

서점 문을 열자 바로 책장으로 된 미로가 나왔다.

“계세요? 아무도 없나요?”

그때 높은 책장 미로 위로 다람쥐같이 빠른 발재간이 보였다.

얼핏 봤을 땐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할머니 같기도 하고, 거대한 다람쥐의 모습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저 회색 마녀 학살 사건에 관한 책을 찾고 있는데요.”

난 그간 ‘회색 마녀 학살 사건’에 대해 사장에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사장에겐 가족이 몰살당한 끔찍한 일이었을 테니, 사장이 먼저 내게 말을 해 줄 때까지 기다리자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골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전에 상대했던 돈돈과 보탱은 푸에르의 추종자였다. 그들은 내 어머니뿐만 아니라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난 불과 얼마 전에서야 마법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로 인간 세계에서 평범하고 조용히 살아왔다.

그럼에도 보탱이란 자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체 날 어떻게 아는 거지?’

이런 일련의 생각들은 푸에르가 어머니와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할머니인지, 반쯤 다람쥐 모습을 한 사람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은 서점 사장이 책장 위를 오가며 말했다.

“그 끔찍한 일이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책이 있긴 하지. 잠시 기다려 봐.”

다람쥐 할머니가 한참 책장을 뒤지더니 책 한 권을 내게 휙- 던졌다.

난 두툼한 책을 받아 들고,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책을 펼치자 갑자기 귓가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웅장한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책을 닫으면 음악이 다시 끊기는 것을 보니, 이 책의 배경 음악인 듯했다.

책의 맨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었다.

[이 일은 1998년 2월 19일에 일어났다.]

잠깐, 그때 숫자가 눈에 박히듯이 들어왔다.

1998년 2월 19일….

이날은 내가 태어난 날이자,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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