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75)

#029화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우연이라기엔 너무 이상했다.

무심코 휴대 전화를 봤는데 시간이 4시 44분인 것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연이 아니었다.

‘역시 내 예감대로 뭔가 있는 거야.’

놀란 마음을 간신히 진정하고 책장을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사진 한 장이 실려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불에 타고 있는 회색 마녀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책장을 넘김과 동시에 마녀들의 통곡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진에서 내뿜는 열기 때문에 금세 얼굴이 불그죽죽해졌다.

난 귀를 틀어막으며 간신히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회색 마녀 학살 사건

[1996년 2월 19일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마법사 학살 사건으로 당시 죽은 회색 마녀는 칠천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수천 년간 명맥을 이었던 회색 마녀 가문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자 더 이상 통곡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범죄의 동기나 배후 등이 밝혀지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정체 모를 범인을 푸에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머리카락이 모두 타 버린 채로 죽었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회색 마녀의 머리카락은 힘의 원천이자, 창이나 불로도 변할 수 있어서 보통의 불로는 태우는 게 불가능하다.]

난 돈돈과 보탱과의 전투 중에 사장의 머리카락이 활활 불탔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범인이 회색 마녀의 머리카락을 어떻게 태웠는지, 그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유일한 목격자에 대한 내용도 나왔다.

[푸에르가 살려 둔 목격자는 로프(가명)가 유일한데, 그에게 기억을 감옥에 가두는 마법을 썼다.]

잠깐. 푸에르가 기억을 감옥에 가두는 마법을 썼다고?

[유수의 마법사들이 로프의 기억을 해방시켜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렇다면 역시 이자가… 내 기억도 가둔 것일까?

[유일한 단서는 현장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들렸다는 것인데, 이를 두려워한 마법사들이 집집이 있던 피아노를 모두 태워 버리는 소동이 있었다.]

[회색 마녀를 몰살시킨 푸에르의 분노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지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데 창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ㅡ똑똑똑.

사장이 서점 밖에서 나를 바라보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장이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더러 서점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다람쥐 할머니께 책을 돌려주고 서점에서 나왔다.

“뭐야? 너 여기 왜 혼자 있어?”

“궁금한 게 있어서요.”

사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이제 완전 제멋대로구만.’이라고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책까지 뒤졌는데?”

우린 서점 건너편의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회색 마녀 학살 사건이요. 그 사건이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랑 연관이 있는 거 같아서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장이 청록색 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푸에르 추종자였던 보탱이라는 자가 저와 어머니를 알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회색 마녀 학살 사건이 98년도 2월 19일에 일어났더라고요. 그날이 제 생일이자 아버지 기일이거든요.”

사장이 내 말을 듣더니 잠시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 더 확신하게 됐어요. 제가 찾고 있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푸에르라는 걸요.”

어머니의 유골을 도둑맞았다는 사실도 이야기하려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미고가 정신없이 들이닥친 손님들의 흔적을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형! 사장님… 두 분이 같이 오시네요.”

미고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이 미고에게 수고했다며 간단히 고갯짓을 했다.

“회색 마녀 학살 사건이 궁금했으면 나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산증인인데. 안 그래?”

사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천천히 커피를 내리면서 말했다.

“그게, 사장님께선 직접 말하기 힘든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장이 끔찍한 일을 당했을 거란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은 어쩌면 이 비극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사장이 커피 세 잔을 내려서 나와 미고, 그리고 자신의 앞에 두었다.

붉은색의 커피에서 김이 났다. 커피 향에서 부둣가에서 나는 바다 비린내가 느껴졌다.

“그건 그렇지. 엄마랑 아빠, 동생이 죽고, 일가친척과 친구가 모두 죽은 날이었으니까.”

사장이 직접 그날의 일을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색 마녀의 머리카락은 물에 젖지도, 불에 타지도 않지.”

사장이 잠시 지그시 눈을 감자, 머리카락에서 작고 푸른 불이 일렁였다.

“엔간한 칼이나 창에도 끄떡없고.”

사장이 예리하게 벼린 가위 날에 머리카락을 대 보았지만, 오히려 가위 날이 두 동강이 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오로지 회색 마녀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회색 마녀의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어.”

나와 미고는 사장의 이야기를 숨죽여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놈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회색 마녀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타 버린 거야.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잃은 마녀들은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죽었지.”

시종 덤덤하던 사장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 그 비밀을 풀려고 온갖 실험을 다 했지만 소용없었어.”

난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먼발치를 바라봤다.

사장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불안함을 나눠 갖는 게 반가우면서도 막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밀을 알아내야 해. 그래야 놈에게 같은 방법으로 당하지 않지.”

나와 미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이어서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회색 마녀 학살 사건 당일,

사장이 겨우 여섯 살 때 일이었다.

이레의 엄마는 그녀를 벽장에 숨기고는 작은 입에 동백꽃이 수놓인 손수건을 물렸다.

“이레야, 아파도 참아야 돼. 알았지?”

절박한 엄마의 눈빛을 보며 어린 이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이레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고 모두 뽑아 버렸다.

아이의 두피에선 피가 흘러내렸고, 손수건을 물고 있었음에도 너무 아파서 혀를 씹는 바람에 입안에선 피가 섞인 침이 흘렸다.

이레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봤다.

엄마는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붉게 충혈된 눈이 보였다.

엄마는 제 손으로 딸의 머리카락을 모두 태워 재로 만든 후, 벽을 닫았다.

사장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호로록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내가 벽 틈에 숨었어도 푸에르는 날 찾아냈을 거야. 내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마력 때문에. 어머니는 그걸 알고 다 뽑아 버린 거야. 덕분에 나는 회색 마녀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어.”

사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미고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와 다른 거 같지 않았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네 부모님의 죽음이 푸에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욘이 예언으로 푸에르가 곧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으니, 우린 준비가 필요해.”

“준비요?”

“난 놈이 회색 마녀를 몰살시킨 비밀을 찾고, 넌 마력을 기르는 거지.”

사장의 말이 맞았다. 난 놈을 상대하기에 너무 약했고, 사장 역시 머리카락에 담긴 비밀을 풀지 못한다면 놈에게 또 속수무책으로 당할지 몰랐다.

그때 카페 출입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길게 끌면서 천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개량 한복을 입은,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여기가 맞네! 맞아!”

그는 호들갑을 떨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달에 처음 발자국이라도 찍듯이 엉성한 걸음걸이로 한 발짝, 한 발짝.

“어떻게 들어왔어? 아, 요즘 자꾸 들어오네?”

사장이 성가시다는 듯이 그에게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10년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어요. 사장님은 그때랑 어쩜 똑같네요! 역시 꿈이 아니었어!”

사장이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기억해. 그때도 말했지만 여긴 당신들이 속한 곳이 아니야. 어서 나가.”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그럼 커피 한 잔만 주세요. 제가 그 맛을 여태 못 잊어서 그래요.”

“아무튼 입맛은 고급이라니까. 자네는 요즘 뭐 해? 무당이라도 됐어?”

커피가 맛있다는 말이 듣기가 싫지 않은 듯 사장이 커피 한 잔을 새로 내리며 그를 훑어봤다.

“목사예요. 하마터면 무당이 될 뻔도 했지만.”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왔구나. 아무튼 뭐, 잘 컸네.”

“고맙습니다.”

남자는 원두가 갈리는 소리를 듣고는 흥분을 주체하기 힘든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태평하게 인사를 건넸다.

“미고야, 저 사람은 누구야?”

내가 미고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이 카페가 브릿지잖아요. 인간 세계랑 마법사 세계를 연결하는 곳이요. 근데 아주 간혹가다 인간들이 들어온다나 봐요.”

우리 둘이 소곤대는 소리를 들은 사장이 주방에서 큰 소리로 덧붙였다.

“어린아이들이나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문을 열기도 해. 또 정신이 반쯤 나간 작가라든가, 영적으로 예민한 자들이 들어오기도 하지.”

이곳에 들어온 인간이 나뿐만이 아니라니, 신기한 이야기였다.

“근데 어떻게 여태껏 인간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거죠?”

사장이 커피를 내리자 커피 향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황홀한 표정의 남자는 곡진히 커피를 받아들었다.

남자가 커피를 마시기 전에 나의 물음에 답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으니까요. 작가 나부랭이들이 말하면 망상으로 치부하고, 무당이나 목회자들이 말하면 과장이나 비유를 든다고 넘겨요.”

남자는 경건하게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더니 감탄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훌륭해요. 잘 마실게요. 고마워요. 저번처럼 여길 나가면 이곳에서의 기억이 마치 꿈처럼 흐릿해지겠지만요.”

열중해서 커피를 마시던 목사가 이번엔 나와 사장을 번갈아 가며 의뭉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도무지 피할 수 없자 내가 어색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훌륭한 커피 한 잔이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죠! 벌써 다 마셨네요. 이만 가 볼게요.”

남자는 문을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 나와 사장을 천천히 번갈아 쳐다봤다.

“마태복음 5장 44절, 두 분이 하나님 말씀을 실천 중이시군요. 원수지간에 이리 정겹게 지내시니 보기 좋습니다. 저는 이만.”

“원수지간? 누가요? 나랑 사장님이요?”

나는 황당한 남자의 말에 바로 되물었지만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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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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