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난 그길로 서둘러 카페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되는 라흐마니노프의 웅장한 선율에 심장 소리가 북처럼 장단을 맞췄다.
카페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손님들은 없고, 미고와 사장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장이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빨리 왔네? 최 대리인가 그 친구는 잘 데려다줬어?”
“네….”
미고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안 좋아요.”
난 방금 전 길에서 만난 고양이와 나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양이가 그랬어요. 분명 애벌레를 길거리에 풀던 마법사가 회색 마녀 학살 당시에 흘러나왔던 노래를 흥얼거렸다고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커피를 호로록 삼키던 사장의 눈빛이 매섭게 날이 섰다.
“직접 보지는 못했대?”
“네….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평범했다고만 하더라고요. 혹시 길에 애벌레를 푼 게 푸에르인 건 아닐까요?”
사장은 무의식적으로 내민 상체를 다시 의자에 바짝 붙이고, 손가락 쿠키를 오도독 씹었다.
“푸에르이거나, 놈과 연관된 자일수도 있지.”
이야기를 끝마친 나에게 사장이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마치 칵테일처럼 노란색과 보라색의 층이 나뉘어 있었다.
“오늘 아침 영감이 떠오르길래 새로 개발했어. 달달할 거야. 일단 마시면서 이야기해.”
난 그제야 긴장한 탓에 목이 바싹 마른 게 느껴졌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에 신맛과 함께 강한 원두 향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모든 맛을 기분 좋게 감싸 안는 고급스러운 단맛이 입안을 향긋하게 채웠다.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않았어도 호들갑 깨나 떨 만한 맛이었다.
사장이 내 소감이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맛있어요. 정말요.”
사장이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내일부터 당장 손님에게 내놓아야겠어.”
커피를 마시고 나니 묘하게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식혜의 쌀알처럼 감정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나니, 적어도 아까보단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더 보이는 듯했다.
“어머니의 편지를 따라가면, 뭔가 푸에르에 대한 단서가 잡히지 않을까 싶어요.”
방금 마신 커피 탓인지 직감은 점점 어떤 확신으로 변해 갔다.
사장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다음에 어딜 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
미고가 펼친 손에서 엄지와 검지를 접으며 말했다.
“1마을이랑 3마을에 다녀왔으니까, 이제 다섯 곳이 남은 거죠?”
“응.”
난 품에서 어머니의 엽서를 꺼냈다.
1마을: 하피 독수리, 론
2마을: 검은 마녀, 라키
3마을: 마녀국밥 주인, 김순자
4마을: 대예언자, 욘 게일
5마을: 약방할매, 탱다리 보니
6마을: 그림자 마법사. 말룸
7마을: 소울스위퍼, 리도
“음…. 다음으로 어디를 먼저 가는 게 좋을까요? 혹시 생각해 두신 곳이 있어요?”
“응. 5마을로 가는 게 좋겠어.”
사장이 5마을이라고 말하자마자 미고가 놀란 기색을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괜, 괜찮을까요?”
난 미고가 이리 놀랄 것은 또 무엇일까 싶어, 사장이 그 의미를 설명해 주길 기다렸다.
“탱다리 보니의 약방에 가려면… 현혹의 동굴을 지나야 하거든.”
“현혹의 동굴이요?”
“그래. 탱다리 보니가 약탈꾼으로부터 귀한 약초를 지키기 위해서 현혹의 동굴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약방을 지어 놨거든.”
미고가 영 내키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현혹의 동굴은 위험한데….”
난 김순자 여사의 마녀국밥에서 봤던 석순을 떠올리며 물었다.
“현혹의 동굴이 김순자 여사님이 석순을 몰래 가져온 곳 맞죠? 그렇다면… 저도 거기 가고 싶어요.”
석순으로 기억의 일부를 찾았으니 그곳에 가면 어쩌면 더 많은 기억을 되찾을지도 몰랐다.
사장이 새삼스럽게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물론 넌 아직 그곳에 갈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지. 하지만 원래 부딪치면서 준비도 하는 거야. 완벽하게 준비된 뒤에 한다는 건 그냥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내심 불안해 보였던 미고도 사장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형은 이제 케루빔의 깃털도 있으니까요!”
사장이 기다란 손가락을 우아하게 펼치면서 날 가리켰다.
“뭐, 위급한 상황에서는 미래시도 보는 것 같으니… 죽기야 하겠니?”
사장의 마지막 말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기억을 되찾기 위해선 그곳만 한 곳이 없었다.
사장이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네 생각대로, 그곳에 가면 더 많은 기억을 찾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하지. 다만…….”
“다만?”
“현혹의 동굴은 트라우마를 맞닥뜨리는 곳이거든. 내면의 가장 아프고, 두려운 기억을 마주하게 될 거야. 계속해서 환각과 환청에 시달릴 거고. 그래도 가 볼래?”
난 위아래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 볼게요. 어차피 언제고 가야 하는 곳이잖아요. 기억은 빨리 찾을수록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옆에서 미고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용기를 북돋웠다.
“이번 주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카페에 들르지 못할 수도 있어요. 대신 금요일 저녁에 바로 올게요.”
“그놈의 회사. 알겠어.”
사장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틈틈이 마법 연습이나 열심히 해 두라고.”
“네. 실은 어머니 수첩 보면서 연습을 하긴 했는데 어렵네요.”
“그럼 뭐 쉬울 줄 알았니? 얼른 가. 내일 출근해야 된다며. 가서 마법 연습이나 더 하든가.”
사장이 내 등을 떠밀었다. 미고가 피곤할 텐데 푹 쉬라고 당부하며, 내 주머니에 한가득 손가락 쿠키를 넣었다.
“금요일에 올게요.”
난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밤을 거의 꼬박 새웠음에도 딱히 잠은 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난 잠자기 전에 협탁 위에 놓인 화분에 지팡이를 겨누고 주문을 외웠다.
“뿌리야, 돋아라. 솟아라. 흙을 세게 움켜쥐어라.”
분명 수첩엔 매일 연습하면 식물이 빠르게 자랄 거라고 적혀 있었지만, 식물은 자라기는커녕 싹도 나지 않았다.
“어렵네.”
‘언젠가 푸에르를 상대하려면 내가 마법을 쓸 수 있어야 돼. 반드시.’
연이은 몇 번의 시도, 비장한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결과는 또 실패였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뭐.’
나는 야근으로 자정이 넘어 퇴근해서도 매일 마법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금요일이 되었다.
난 퇴근 후 카페에 갈 생각에 어김없이 시계를 뚫어져라 보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최 대리는 아직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았는지 여전히 업무 이메일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엔 애벌레가 들어갔을 당시 생긴 상처가 아직까지 희미하게 빗금 쳐 있었다.
“최 대리님, 저 먼저 퇴근할게요. 좋은 주말 되세요.”
난 챙겨 온 손가락 쿠키를 한 움큼 최 대리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인사를 했다.
최 대리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최 대리의 얼굴이 어쩐지 이전보다 편해 보여서 안심이었다.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잰걸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카페, 미고가 오늘따라 유독 날 더 반가워했다.
“형! 제가 줄 선물이 있어요. 실은 사장님 것도… 여기로 와 보세요.”
미고가 카페 구석에 두었던 봉지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베이지색의 티셔츠 세 장이 들어 있었는데 한가운데 피누누 용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희 5마을에 가잖아요. 아시다시피 5마을의 상징은 피누누 용이고요! 제가 어제 마법사 장터에서 산 거예요. 다 같이 입으면 좋을 거 같아서….”
미고는 자랑스럽게 티셔츠를 나눠 주었다. 난 이런 생각을 했을 미고가 귀엽고, 대견해서 웃음이 나왔다.
“예쁘네. 잘 입을게 미고야. 고마워.”
사장은 얼핏 보더니 아랫입술을 삐쭉거렸다.
“설마 그걸 나더러 입으라는 건 아니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사양하겠어.”
나는 급격히 실망하는 미고의 표정을 살피며 사장에게 눈치를 줬다.
“성의를 생각해서 좀 받아요!”
“그래도 입기 싫어. 말했다? 난 안 입어.”
사장은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주방으로 가 버렸다.
실은 나도 조금 낯부끄러웠다. 단체 티라니. 그래도 미고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당장 옷을 갈아입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난 마음에 쏙 들어. 너무 고마워!!!”
우린 5마을에 가기 전에 간단히 옷가지와 빵 등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저번에 보니까 여기랑 마법 세계랑 시차가 좀 있는 거 같던데, 5마을은 지금 몇 시예요?”
“낮이야. 벌건 대낮. 그리고 오늘은 이동 거울 말고, 이걸 쓸 거야.”
어느새 화려한 인도 카펫같이 생긴 롱 드레스로 갈아입은 사장이 말했다.
사장이 기다란 붉은 벨벳 천을 만지작거리자 금세 간이 탈의실 같은 게 생겼다.
“오…. 이동 커튼! 이거 귀한 건데 어디서 났어요?”
서운한 마음을 금방 훌훌 털어 버린 미고가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델이 밀린 외상값이라며 주더라고.”
마델은 카페 단골 중 한 명인데, 추억을 보는 창으로 실종된 아들과의 기억을 보며 온종일 카페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마델이 지금은 좀 뭐랄까 무기력해 보여도, 한때 아주 유능한 마법사였거든. 아무튼 얼른 가자!”
좁은 탈의실 안으로 우리 셋이 겨우 몸을 넣었다.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뭘 어떡해. 이렇게 하면 되지.”
사장은 한 손으로 커튼을 거침없이 젖혔고, 탈의실이 열렸을 때 우린 카페가 아닌,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밑을 내려다볼 엄두가 안 날 만큼 까마득한 높이였다. 절벽 바로 앞에 동굴이 보였다.
미고와 사장의 표정에 일말의 긴장감이 감도는 걸 보니, 여기가 현혹의 동굴임이 분명했다.
“미고, 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까 동굴 밖에서 대기해.”
“네.”
미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딛고 있는 바닥이 푹 꺼질 것처럼 절벽은 위태로웠다.
사장과 나는 천천히 동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동굴 벽을 치고 울려 퍼졌다.
사장이 동굴 초입에서 혼잣말하듯 말했다.
“왜 이름이 현혹의 동굴이겠어. 아무것도 믿지 마.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의 주변 공간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동굴은 어느덧 좁은 복도로 변했고, 바로 그 앞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저게 누구지? 잠깐… 저건….”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어린 시절의 나였다.
어린 나는 키가 두 뼘가량 더 큰 두세 명에게 둘러싸여 뺨을 맞고 있었다.
“뭘 봐. 띠껍게 뭘 보냐고.”
“난 아무 것도 안 봤는데….”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내 뺨을 때렸고, 그때마다 고개가 양쪽으로 휙휙 돌아갔다.
“너 이름도 존나 이상한 거 알지? 그냥이 뭐냐. 그냥이. 너네 엄마는 너도 그냥 낳았다니? 그러고 보니 너 아빠도 없잖아. 너 왜 아빠 없냐?”
괴롭힘을 주도하는 아이의 질문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낄낄대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그냥 없어!!!”
비아냥거리며 웃는 아이들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데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만해.”
정강이를 맞은 어린 내가 아픈지 찔끔 눈물을 흘렸다. 난 또다시 발로 차려는 아이를 막기 위해 뛰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있는 힘껏 그 못된 아이를 밀었다.
“그만하라니까!!!”
동굴 끝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장의 얼굴로 바뀌었다.
사장이 낭떠러지로 추락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해그냥!!! 너 이씨…. 정신 안 차려!!!!! 새끼야!!!!”
분노에 찬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