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75)

#034화

잠시 후, 더 이상 사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 거기 있어요??? 제 말 들려요???”

낭떠러지 밑으로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사장은 답이 없었다.

떨어지던 순간 사장의 빡친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동굴에 들어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엄마, 아빠까지 들먹이면서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보니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맞아. 나 왕따였지.’

아이들은 때때로 필요 이상으로 악랄했다. 앞뒤 재지 않고, 거리낌 없이 남에게 상처를 냈다.

동굴 속 적막이 귀마개처럼 귓구멍을 쑤셨다. 앞으로 계속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앞에 어린 내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아이는 많이 화가 나 보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는 누군가를 향해 씩씩대며 말하는 중이었다.

“왜 안 되는데? 나는 걔들보다 힘도 약하고, 키도 작고, 쪽수에서도 밀려! 마법을 쓰지 않고는 이길 수가 없단 말이야!”

누군가 아이의 앞에 쭈그려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그 여자는… 어머니였다.

“어… 엄마….”

입에서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분통을 터뜨리는 어린 나를 달래며 말했다.

“좋아. 그럼 네가 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면서 그 녀석들을 혼내 줄 방법을 알려 줄게.”

어머니의 말에 아이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런 게 있어?”

어머니는 아이에게 집게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병 하나를 건넸다.

“아침 일찍 가서 이 기름을 네 책상 주변에 발라.”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 벽이 신문지처럼 구겨지더니 어느덧 교실 안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린 나는 긴장한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마침 심심해진 아이들이 껄렁대며 내 책상으로 몰려들었다.

책상 주변으로 기름에 번들거리는 바닥이 보였다.

‘어머니가 준 기름을 발랐나 보네.’

그때 앞장서던 키가 큰 남자아이가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다.

“아아악!!!”

뒤따라오던 아이도 연달아 미끄러졌고 우두둑, 살벌한 뼈소리를 내면서 발목이 꺾였다.

내게 시비를 걸려 했던 아이들이 모두 응급실에 실려 가자, 남은 패거리들은 멀리서 욕지거리를 하며 벼르기 시작했다.

“시발. 저 새끼가 바닥에 뭔 장난질 한 거야. 앉아서 꼼짝도 안 하는 거 보라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너무나 실감 나서 내가 보는 게 환각인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내가 동굴 안에 있다는 자각을 놓칠까 두려울 정도였다.

점심도 거르고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나는 배가 아픈지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맞아…. 기억나…. 저 때 똥이 너무 마려웠었지….’

보고 있자니 당시의 기억이 또렷하게 났다.

다만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궁금하면 계속 이 환각 속에 빠져 있으라는 것처럼.

난 결국 생리 현상을 참지 못하고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서 화장실로 뛰었다.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다.

내가 화장실 칸에 들어가자마자 문밖에서 벼르던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 저 새끼 아까부터 아랫배 부여잡을 때부터 알아봤어. 와…. 냄새 존나 지독해!!!”

난 결국 볼일을 마치고 화장실 칸에서 나왔고,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야, 너 뭐한 거냐? 너 때문에 내 친구가 지금 발목이 아작 나서 병원 갔거든? 어떻게 책임질래?”

나는 과거의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지 알 수 없어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게 왜 내 잘못인데? 너네가 알아서 넘어진 거 가지고.”

바짝 얼어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생각보다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와…. 이 새끼 말대꾸하는 거 봐? 누가 너랑 말 섞고 싶댔냐? 난 너 같은 새끼랑 말 섞을 레벨이 아니야.”

평소라면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 옆에서 맞장구나 치고 있을 녀석이, 기세등등하게 유세를 떨었다.

“넌 숨도 쉬지 마. 너 숨 냄새 맡으면 토할 거 같으니까.”

어린 나는 분노에 작은 어깨를 떨었다. 치켜뜬 두 눈에 두려움은 엿보이지 않았다. 순간, 왼쪽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번뜩이며 빛났다.

‘어?? 저… 눈… 설마….’

어린 시절의 내가 순식간에 품 안에서 어머니의 지팡이를 꺼냈다. 그리고 지팡이로 변기를 가리키자, 우두머리 행세를 하던 아이가 변기로 빨려가듯이 머리를 처박기 시작했다.

‘지금 마법을 쓴 거야? 어릴 적 내가 마법을 쓸 줄 안다고???’

분명 내 기억이 맞았다. 그걸 똑똑히 지켜보는 와중에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겨우 13살 남짓한 나이에 내가 무슨 수로 마법을 썼다는 말인가?

이어 우두머리 행세하는 아이 옆에 있던 살집이 넉넉한 아이는 갑자기 우수수 떨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에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내 머리카락!!!”

화장실 바닥엔 어느새 녀석의 머리카락 반 이상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제야 어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놨고, 지팡이는 다시 만년필로 변했다.

어린 나는 직접 마법을 써 놓고도 놀라서 넋을 놓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마법을 써 본 게 처음인 듯했다.

난 세탁소 옷걸이처럼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힘없이 서 있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그만 녀석이 익숙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지…. 엄마랑 약속했는데….”

아이가 입술을 거의 떼지 않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엄마랑 마법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너 괜찮아?”

어쩐지 아이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불안해하는 아이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아이는 날 보지 못하는 건지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아이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는 너를 이해할 거야.”

그때 아이가 급한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아이를 쫓아가려는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찌르르 전기가 오는 것같이 전율이 느껴졌다.

“방금 뭐지?”

아이는 뒤를 돌아 자리에 멈춰 선 나를 보더니 빨리 오라며 재촉했다.

“빨리 오라고!!!”

“너… 내가 보여?”

발을 내디디려는데 불현듯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던 사장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난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왼발을 들어서 조심히 땅을 디뎠다.

돌 몇 개가 발끝에 느껴지고, 자갈이 우수수 푹 꺼진 땅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가 이미 아주 좁고 가파른 길을 걸어왔음을 알게 됐다. 이제 단 한 발만 내디디면 절벽에서 떨어졌을 거라는 사실도.

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이 소름이 끼쳤다.

“휴…. 큰일 날 뻔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사라졌던 어린 내 모습이 어둠을 헤치고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는 인공 지능 로봇처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서 웃더니 앙증맞은 13살의 팔로 나를 있는 힘껏 밀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내 비명 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치면서 한참 동안이나 밑으로,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ㅡ첨벙.

난 잔잔한 호수에 다이빙하듯 떨어졌다. 잠시 정신을 잃을 뻔도 했지만 발끝이 호수의 맨바닥에 닿자 눈이 떠졌다.

힘껏 발을 굴러서 수면 위로 헤엄쳤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사방으로 우거진 숲이 보였다.

나뭇잎이 크고 넓적한 것이 열대 우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저만치 붉은 열매가 한가득 열린 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 열매를 보자마자 호수에서 채 나오기도 전에 갈증과 허기짐이 동시에 밀려왔다.

달콤할까? 새콤할까? 머릿속이 아찔해질 정도로 열매의 맛이 궁금했다.

열매를 크게 한 입 베어 먹는 상상을 하니 입안에 침이 돌았다.

붉은 광택이 나는 과일은 사과라기엔 좀 작고, 자두라기엔 껍질이 단단했다.

나는 홀리듯 과일 하나를 움켜쥐었다. 이제 힘을 줘서 똑, 따기만 하면 됐다.

‘잠깐…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정신을 차리고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상했다. 평소에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이렇게까지 열매가 먹고 싶다는 욕구가 든다는 게, 뭐랄까 좀 어색하지 않은가.

난 일단 경계하며 뻗은 손을 천천히 거뒀다.

그때 붉은 열매가 휙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감추고 있던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새까만 눈동자만 보이는 커다란 눈에 작은 콧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다.

입이 아주 컸는데 심해에 사는 아귀처럼 검은 입천장에 날카로운 이빨이 무질서하게 돋아 있었다.

“어쭈…. 안 넘어오네?”

붉은 열매는 신경질적인 하이 톤의 목소리로 말하더니, 입을 크게 벌려 내 손가락을 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손가락에 닿지 않자 열매는 자신의 몸을 앞뒤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뒤돌아 있는 붉은 열매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미친 듯이 앞뒤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나무 기둥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난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채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내게 말을 걸었던 열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열매는 재빠르게 굴러서 내 뒤를 쫓았다.

돌에 튕겨서 높이 떠오른 열매가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열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귀를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었다.

“으어억!!”

열매는 귓바퀴 일부를 맛있게 뜯어 먹고 다시 나를 쫓았다.

나무에 열려 있던 열매들은 거의 대부분 바닥에 떨어져서 나를 향해 맹렬히 굴러오고 있었다.

난 피를 흘리는 귀를 부여잡고 죽어라 달렸다. 5톤 컨테이너 트럭이 도로에 사과 박스를 쏟은 것처럼 붉은 열매가 밀어닥쳤다.

열매는 내 발뒤꿈치라도 뜯어 먹으려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바닥을 굴렀다. 이제 일부 열매들은 나보다 앞서서 포위망을 좁히기까지 했다.

“하…. 씨…. 어쩌지!!!”

멀리 언덕 너머로 쪼그려 앉아 있는 아이가 보였다. 좀 전에 나를 낭떠러지로 밀었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열매 몇 개가 방향을 틀어서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굴렀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결국 내 발걸음은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다행히도 열매는 가파른 언덕길을 빠르게 올라오진 못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위험하잖아!”

내가 아이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뛰려는데 아이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뭐래? 쓸모도 없는 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꼬나보는 아이를 보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뭐? 쓸모도 없는 게? 이씨…. 내가 이렇게 싸가지가 없었다고??’

비록 기억은 안 났지만,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에 애가 좀 건방지네 싶다가도, 차라리 소심하고 풀 죽은 모습보다는 이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좀 비키라고!”

아이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열매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자 열매가 반쪽으로 조각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오….”

내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자 아이가 날 아니꼽게 바라봤다.

“왜 저래? 짜증 나게….”

“너 사춘기냐? 왜 이렇게 삐딱해?”

“니 새끼가 뭔 상관인데.”

어린 자신에게 욕을 먹고 발끈한 내 시선에 남은 열매들이 한꺼번에 굴러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막 경사진 언덕을 넘은 열매는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었는지 단숨에 우리가 있는 곳까지 굴러왔다.

방금까지 심드렁하던 아이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야!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지 몸 하나 지키지도 못하는 게 누굴 돕는답시고 나대냐고!”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없이 많은 열매들이 바닥에 제 몸을 튕기며 우리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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